아프리카에서 기원한 인간은 지구 각지로 퍼져나갔다. 인간은 육상 생물이기에 우선적 경로는 당연히 이동이 적합한 육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구는 70%가 물로 뒤덮여 있다. 그렇기에 바다는 어쩔수 없이 때론 이동의 경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바다는 깊고, 땅보다 훨씬 이동하기 어려우며, 방향과 위치를 가늠하기 어렵고, 식량과 식수도 없으며, 거센 파도와 풍랑이 언제든지 생존을 위협했다.물론 디젤엔진과 첨단 항법장치가 개발된 지금 바다는 과거만큼 인간에게 도전의 대상이자 경외, 위협이지 않다. 책 '인류의 대항해'는 산업화 이전 바다로 진출하고 도전했던 과거 인류의 교역과 진출의 역사를 다룬다.
1. 동남아와 태평양
빙하기에 동남아 지역은 지금의 인도차이나 반도와 섬들이 연결된 커다란 대륙인 순다와 호주 및 인근의 섬들이 연결된 사훌이라는 커다란 대륙이 있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해류와 바람이 비교적 예측이 용이해 항해에 적합했고 줄줄이 분포한 높고 낮은 섬이 많아 기준 가시선 항법에도 좋았다. 과거의 항해는 무엇보다 가까운 시간내에 육지로 도달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육지가 항상 보이는 곳에서만 항해하거나 일련의 섬들을 따라 항해하는 방법을 주로 이용했다.
바다에서 육지 발견은 생각보다 어렵다. 이상적인 조건에서 카누에 탄 사람은 대기가 빛을 굴절시키는 것을 감안해 지구의 곡면이 허용하는 한 최대한 멀리 볼 수 없다. 여기에 구름이나 옅은 안개, 거품이라도 생긴다면 시계는 상당히 나빠진다.
그런데 동남아 지역은 해역 전반의 기상상태가 양호하고 센바람이 비교적 장기간 없어 육지 발견과 항해가 좋다. 여름 몇 달간 몬순으로 북서풍과 북서해류가 남으로 이동시켜주고, 겨울에는 남동 무역풍과 북쪽해류가 북으로 이동을 시켜준다. 이 패턴으로 계절간 방대한 지역을 이동하며 흩어진 섬사회를 탐험하고 식민화하고 교역하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항해가 용이해도 도구가 필요하다. 바로 선박이다. 최초의 배는 뗏목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뗏목은 섬유질의 끈으로 나무들을 엮기에 끈이 나무를 파고들지 않아 좋았다. 다음 등장한 수단은 갈대보트다. 이는 매우 가벼워 뭍으로 쉽게 옮길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방수처리를 해도 갈대 자체가 물을 쉽게 먹어 오래가지 못한다. 다음으로 등장한 쓸만한 배가 카누다.
통나무 카누는 몸통 속을 파내서 쉽게 만들지만 길고 폭이 좁다. 그래서 안정성이 낮고 수송력도 적다. 뱃전이 낮아 내부로 물도 쉽게 들어온다. 그래서 나온 해법이 아웃리거를 달거나 쌍둥선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면 카누의 안정성과 수송력이 몰라보게 좋아진다. 그리고 카누에 돛대와 돛의 설치도 가능해진다.
2만 5천년전 후빙하기의 항해자들은 솔로몬 제도까지 정착한다. 1만 3천년전 마우스섬까지 간 항해자들은 농사를 짓지 않았다. 그들은 섬 동물을 너무 많이 사냥해서 회색늘보주머니쥐, 주머니오소리, 왈리비들의 사냥감을 섬에 들여오기도 했다. 뉴기니와 비스마르크 제도는 여러 열대작물이 유래한 곳인데 식량이 되는 토란, 사탕수수, 일종의 바나나 종이 있는 곳이다. 이런 개량종 식물이 등장하여 카누 선장들은 토란과 마 같은 작물을 이용하여 식량을 배안에 저장하여 장기 항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잦은 항해에도 남태평양의 인구는 좀처럼 늘지 않았다. 이는 말리라이가 옮겨왔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최소 2종의 말리리아 원충이 수천년전 정착자들을 따라 순다에서 사훌로 이동했다. 말리라이가 열대지역의 섬들에 퍼쳐 모기 서식지 보다 높은 뉴기니의 고지대 지역만 높은 인구 밀도가 유지되었다.
기원전 1600년 경 뉴브리튼 섬의 위타리 섬이 대규모로 폭발한다. 이 대재난 직전이나 직후 정도에 이전에 비해 더 크고 튼튼한 카누를 탄 사람들이 서쪽에서 비스마르크 제도에 도착한다. 이들을 라피타인이라 한다. 이들은 기원전 1500년가지 오세아니아 근해에 정착하고 향후 2-3세기 동안 이동하지 않고 토착민과 통혼하며 융화한다.
라피타인은 새로운 식량을 가지고 오는데 그로 인해 수렵에 의존하던 섬 경제에 유연성이 생겼고 식량의 저장이 가능해 장거리 항해능력이 생겨났다. 이들의 쌍동선 카누는 비록 느린 속도였지만 거의 맞바람의 60도 각도에서도 항해가 가능했다. 라피타인들의 섬 이동은 의도적 식민화 과정이었다. 이는 인구압력이나 교역, 차남들의 기회 탐색이 요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외딴 섬들은 자급자족이 어려웠기에 교역이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섬들간에는 이런 교역 구조를 정례화하기 위한 전통이 존재했다. 그것이 쿨라 교환관걔다. 두 종류의 교환물품인 빨간조개껍대기와 하얀조개껍데기가 각각 시계방향과 반시계방향으로 섬들을 돌았다. 이 물품이 섬에 오는 것은 섬의 위신 문제였고 물품이 오가며 다른 물품의 교환이 이뤄졌다. 의례에 참여하는 자들간에는 서로 네트워크가 형성되었고 교역의 날짜는 정기적이고 주기적이며 신중했다. 이런 식으로 섬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의존을 정례화했다.
라피타인의 진출은 사모아섬까지였다. 사모아 섬 동쪽은 섬이 더 작고 고립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무려 1800년간 라피타인의 후손은 여기에 머문다. 서기 1000-1300년이 되어서야 동태평양 지역의 식민화가 이뤄진다.
2. 에게해
에게해는 빽빽한 섬과 강한 바람, 짧고 가파른 파도로 인해 건너기 만만치 않은 바다다. 그리스 앞바다엔 에비아, 크레타, 로도서, 레스보스 4개의 큰 섬이 있고 그 가운데 키클라데스제도가 있다. 초창기 항해가들에게는 다행스럽게 이 키클라데스제도의 섬간 거리가 10-20km정도로 가까웠다. 키클라데스제도는 건조지역으로 땅이 척박하다. 즉, 식량과 식수 확보가 어렵다. 하지만 석기시대 수렵민의 필수품인 흑요석이 풍부하다. 특히 밀로스 섬에 많았는데 빙하기에는 해수면이 지금보다 많이 낮아 밀로스섬까지 가기 쉬웠다.
메마른 땅이지만 작물과 가축을 동반한 영구정착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4천년 전 낙소스섬에 농경인이 정착했다. 대개 대규모, 중간급의 섬부터 정착이 시작되었다. 키클라데스제도에서는 보리, 밀, 콩류가 자라고 염소와 양이 척박한 섬의 사면에서 살수 있다. 하지만 생산성이 낮아 인구 부양력이 낮고 이는 섬 사이의 고도의 상호의존성을 요구했다.
나일강 유역은 질 좋은 목재가 부족했다. 파라오들은 부피가 큰 목재 수송을 위해 해상무역을 했다. 삼나무 무역은 지금의 베이루트은 비블로스를 국제무역의 요충지로 만들었다. 그래서 레바논의 삼나무 무역은 기원전 2200년경까지 수세기간 번영했다. 레바논으로의 여정은 여름철의 연안 항해가 가장 많았다.
기원전 2000년 이집트의 배들은 크레타에 도달했다. 여름이면 우세한 북풍으로 지중해 연안을 따라 터키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가서 키프로스 크레타 에게해에 도달했다. 초여름엔 에테시아 바람을 타고 북아프리카와 나일을 들러 귀환했다. 이집트 나일 삼각주 북서부의 아나리스 시는 기원전 1640-1530년까지 국제무역을 육성한 힉소스인들이 통치하고 미노스인의 영향력이 매우 컸다. 고대 키프로스는 구리의 원산지로 청동기 시대 인기가 좋았다.
이 번영은 기원전 1200년경 미케네와 미노스, 히타이트가 붕괴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해적들이 에게해에 득세하며 끝난다. 람세스 3세는 기원전 1187년 나일에 침입한 이들은 막느라 전쟁을 치뤄야 할 정도였다. 기원전 1000년 경이 되어야 동지중해에 다시 안정이 찾아온다. 레반트 연안의 비블로스와 티레, 시돈의 페니키아 상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들은 자줏빛 염료 무역을 장악해 부를 쌓았다.
페니키아인은 육로를 거쳐 메소포타미아만과 페르시아만, 이집트와 홍해를 거치는 교역로를 장악했다. 그들은 해상무역에 집중해 기원전 1000-800년 시칠리아에서 샤르데냐가지 고대 동지중해 무역을 장악했다. 그리고 북아프리카까지 진출해 카르타고와 우타카에 전초기지를 수립한다. 그들은 그리스 포카이아인과 경쟁했으나 승리해 일부 그리스 식민지를 제외한 지중해 전 해안 지역을 석권한다.
기원전 500년이 되자 개방형 해적선 대신 세삼하게 설계한 전함이 등장한다. 충각이 달리고 병사가 서서 싸울 수 있는 갑판이 등장하고, 그로 인해 노잡이는 보호 받으며 바닥에 격리되어 노를 저을 수 있어 속도가 높아졌다. 전함을 더 빨라지고 더 낮아지고 날렵해졌다. 이단 배치 노는 삼단 노선으로 진화한다.
아테네의 항구 피레우스는 교역로의 광대한 그물의 중심이다. 아테네는 30만의 시민을 위해 연간 800척의 분량의 곡물을 수입했다. 로마인들은 농부 군인으로 해상무역 전문가는 아니지만 해적 소탕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들은 대규모 무역과 곡물 운송 사업에 뛰어든다.
3. 몬순 세계
몬순세계는 몬순의 영향을 받는 동아프리카 해안, 홍해, 인도, 스리랑카, 동남아, 중국을 아우르는 광대한 지역이다. 몬순 계절풍은 예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에서 이란 해안을 따라 인도로 항해가 쉽다. 홍해는 나일강과 연결되며 페르시아만은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과 연결된다. 교역의 최적조건인 셈이다.
몬순계절풍은 11월-3월 북동부에서 불어온다. 이건 비교적 얌전하다. 5월-9월은 남서부에서 불어오고 이건 상대적으로 강하고 스콜이나 폭풍을 동반한다. 고대 페르시아만에서는 연안에서 갈대에 역청을 발라 방수처리한 보트를 썼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야자를 제외하면 이렇다할 목재가 없었다. 배로 쓸만한 좋은 목재는 인도 서해안에 풍부했다.
인도는 거대한 아대륙 국가로 자급자족적 국가라 해안에 큰 관심이 없었다. 기원전 2000년 하라파 문명의 요람인 인더스강 유역이 장거리 상업의 중심지였다. 인도의 사정이 이러하니 무역의 중심은 메소포타미아였다. 이슬람 이전 아랍인들은 인도의 조선공들에게 배운 기술인 널을 꿰멘 배를 타고 다니며 인도양 연안 항해의 큰 비중을 담당했다. 4-6세기 중국의 배들이 인도와 교역했다. 6세기 스리랑카는 중국과 페르시아가 만나는 기점으로 거래상품은 비단이었다.
이슬람이 부상하자 거대한 상업적 팽창이 인도양을 감쌌다. 아랍의 배를 페르시아에서 광저우까지 진출하다. 아랍의 배는 널을 티크나 코코야자로 만들었다. 티크는 매우 오래가고 작업이 쉽고 인도 남부에서 널리 자란다. 코코야자는 몰디브와 라카티브 제도에 풍부하다. 배는 용골에 가로 널을 꿰메 붙이고, 짝을 지어 가지런히 맞댄 널을 끄트머리에 단순한 작은 송곳으로 힘겹게 구멍을 꿇고 코코넛 껍질로 만든 거친 밧줄로 통과시키는 식으로 건조했다. 이는 쇠못배도다 약하고 물이 샜다. 역청이나 송진을 고래기름과 혼합한 뱃밥으로 이음새의 틈을 매우고 생선기름으로 널을 방수처리했다. 그래서 환기가 어려운 갑판아래는 악취가 심했다.
대형삼각돛은 사각에 비해 배가 바람에 훨씬 가깝게 붙어 범주하는 것이 가능했다. 해안 가까이 붙어 항해하는데 유리해 인도양 무역선에 안성맞춤이었다. 다만 맞바람에 약하고 뒤에서 바람을 받는 경우 효율이 낮았다.
4.동아프리카
바스코 다가마가 1497년 잠베지강 어귀에 도달했을 때 이미 몬순 무역은 규모가 상당했다. 아프리카는 철, 금속, 가죽, 황금, 구리, 노예등의 상품의 무한한 공급지였다. 동아프리카 해안은 연중 대부분의 기간 북동 몬순 계절풍이 불었다. 이 지역은 인도양 세계의 일부로 내륙과 사회적 유대로 매끄럽게 연결된 곳이다. 아자니아 본토와 마다가스카르를 비롯한 앞바다 섬들은 매우 다양한 환경을 제공했다.
북쪽은 반건조 기후, 남쪽은 사바나와 맹그로브 습지, 열대 우림. 물고기와 조개가 풍부하고 목재가 많으며, 산호도 건축에 이용이 가능했다. 동아프리카의 철광석과 목재는 초기 교역조건으로 매력적이었다. 이후에는 황금과 상아, 노예가 상인들을 끌어당겼다. 상아는 인도의 것보다 단단해 조각에 유리해 인기가 좋았다.
아프리카의 맹그로브 장대는 중동 여러 도시의 가옥 지붕을 이었고 노예는 수입되었다. 노예들은 유프라테강 저지대의 습지 일부에서 물을 빼는 역할을 맡았다. 무역선들은 동아프리카의 당나라의 도자기를 실어 날랐다. 페르시아만의 상선들은 아프리카 상아와 인도네시아 용연향을 인도와 스리랑카, 남중국해에도 운송했다. 잦은 교역으로 소규모 이슬람 사회가 동아프리카 해안에 형성되었다.
아라비아, 페르시아, 아자니마 무역은 9세기 후반 당나라가 멸망하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노예반란으로 쇠퇴한다. 하지만 서기 첫 천년 후반기가 되자 지중해에 중대한 정치 사회적 변화가 나타난다. 남부 독일에 신성로마제국에 등장하고 비잔틴 제국이 전성기를 맞이하고 북아프리카에 파티마 왕조가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예술, 수공업, 정교한 건축, 사치품과 원자재 수요가 증가했다.
이후 대략 800년간 아프리카에서 금이 수출되었고 이는 당시 글로벌 경제의 중심 요소였다.
5. 알류트 열도
이곳은 습기가 많고 비교적 따뜻한 남서풍이 북쪽으로 불어서 연중 1/3기간 시계를 심각하게 제한한다. 곳곳에 바위섬이 많고 거센 풍랑이 있어 항해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아한대 치곤 상대적으로 기후가 온화하고 고지대 호수의 민물이 매우 맑고 해안은 상륙에 적합하다. 그리고 바다사자와 바다표범, 고래, 대구, 넙치 등 해양생물이 풍부하다. 그래서 초기부터 해양사회가 발전했다.
북극권의 선박은 뼈나 유목으로 프레임을 짜고 힘줄로 묶어 유연한 선체구조를 가진다. 다음 바다사자나 표범의 가죽으로 덮는다. 가죽을 프레임에 단단히 고정하지 않는데 프레임 자체도 다소 느슨하다. 이는 유빙이나 부빙에 배가 부딪히 때 충격을 완화하여 침몰을 막기 위해서다. 그리고 배가 가벼워 얼음위로 올리기가 쉽다. 이 가죽보트는 프레임이 유연해 형태를 변화시키기도 쉽다. 그래서 시시각각 항해형, 사냥형, 적재형, 이동형으로 변화한다.
북극권의 배 바이다르카는 제작에 수개월이 소요된다. 일단 용골과 뼈대인 유목을 모으는 것이 어렵다. 턱처럼 생긴 이물이 물의 저항을 줄이고 노젓는 사람이 내는 속도 향상에 기여한다. 고래 수염으로 묶은 상부 프레임은 속도와 내향성에 기여하고 바다사자 가죽 덮개는 선체를 덮어 방수를 한다.
알류트 지역은 전통적으로 해양생물을 사냥하기에 해안거주를 한다. 650-750년 대규모 해안마을이 사라지고 연어를 따라 강으로 거주지가 이동했고 1450년이 되어야 다시 해안으로 거주지가 돌아왔는데 이는 800-1200년 중세 온난기로 대양순환저해로 해수온도가 상승해 해양생산성이 저해했기 때문으로 추정되다. 알류트인의 대형보트 제작에는 바다사자의 가죽덮개가 필수인데 보트 한대당 바다사자 15-20마리가 필요하다. 따라서 바다사자의 감소는 치명적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