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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 15,120원 (10%840)
  • 2018-10-02
  • : 23,384

 30년 전, 소련을 필두로 동구권이 무너지며 바야흐로 자본주의와 결합한 민주주의의 시대가 도래한 것처럼 보였다. 물론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도 체제가 민주주의긴 하지만 그쪽 진영은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독재로 흘러버렸고 경제적으로도 실패했다. 반면 자본주의를 앞세운 진영에선 실제로 민주주의가 구축되어 안정적으로 운영되었기에 당시 자본주의와 결합한 민주주의가 가장 경쟁력 있고 선도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중국과 러시아를 필두로 상당수 사회주의 진영이었던 권위주의 국가들은 민주주의를 운영하지 않고도 산업 경쟁력을 회복했다. 반면 승자로 보였던 유럽과 미국의 자본주의와 결합한 민주진영에서는 경제가 흔들리고 더불어 민주주의도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다. 책은 미국의 사례와 역사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진단하고 나름의 해법을 제시한다. 

 민주주의는 서구에서 본격화한지 300여년 정도가 지난 제도다. 상당히 안정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지금의 민주주의는 매우 쉽게 흔들린다. 사람들은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지키고 지탱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히틀러나 트럼프, 한국 역사상 독재를 한 대통령 혹은 그에 준하는 자들은 대개 국민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선출된 권력이다. 이는 시민이 충분히 민주적이지 않고, 이러한 잠재적 독재자들이 대중의 약점과 감성을 매우 잘 파고들어 자신에게 영합하게 만들기가 생각보다 쉽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가 보기에 미국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그것을 수호한 것은 견제와 균형의 원리다. 그것을 구현한 것은 미국의 양 정당이며 이들이 지켜온 규범은 사호관용과 이해, 그리고 권한 행사에 있어서 자제의 원리다. 놀랍게도 이는 미국 헌법이나 여타 법률에 전혀 규정되어 있지 않다. 어느 순간부터 정치인들이 이를 실천해 온 것이며 그것이 굳어져 규범화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 정치가 양극화하며 1980년대부터 이 규범에 균열에 생겨왔고 그것의 결과는 잠재적 독재자인 도널드 트럼프의 탄생과 규범의 파괴였다. 

 린츠의 연구에 의하면 잠재적 독재자는 4가지 특성을 공통적으로 드러낸다. 우선 말과 행동에서 민주주의 규범을 거부한다. 그리고 경쟁자의 존재를 부인하고 제거하려 든다. 또한 자신의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폭력을 용인하고 조장한다. 마지막으로는 언론의 자유를 포함하여 반대자의 기본권을 억압한다. 도널드 트럼프는 선거 결과를 부정했고, 오바마를 무슬림으로 취급했으며, 지지자들의 국회점거를 용인하고 그 범죄자들을 사면까지 했으며, 자신을 비방하는 언론 기자를 출입금지시키거나 대놓고 면박한다. 그리고 한국의 탄핵된 대통령 윤석렬도 이 4가지 특성을 상당히 드러냈었다. 그도 툭하면 부정선거 의혹을 드러냈고 실제 국정원을 동원해 이를 조사했으며, 선거해서 승리했음에도 야당대표의 수사를 지시하고 제거하려 했으며, 재임 중 각종 공식행사에서 반국가세력을 언급했고 계엄을 단행했으며, 자신을 비난한 언론사 기자를 대통령 전용기에 탑승 금지시켰다. 

 이런 잠재적 독재자는 대개 포퓰리스트 아웃사이더로 기성정치에 반대하며 자신이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부패하고 음모를 꾸미는 엘리트 집단과 전쟁을 벌이겠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기존 정치인이 오히려 비민주적이고 비애국적이라 매도하며 기존의 질서를 뒤흔들어 집권한다. 

 트럼프와 양극화로 인해 이런 잠재적 독재자들이 최근에 등장한 것 같지만 미국 역사를 살펴보면 이들은 과거부터 꾸준히 존재해왔다. 성공한 것이 최근일 뿐이다. 이들이 과거 실패했던 것은 미국의 정당이 문지기 역할을 하며 이들을 제거해왔기 때문이다. 정당들은 잠재적 독재자를 선거기간에서 당내의 경선에서 배제하거나, 정당의 조직 기반에서 극단주의를 제거하고, 반민주적인 정당이나 후보자와의 모든 연대를 거부하고, 극단주의자를 체계적으로 고립시키며, 그들이 유력주자로 떠오를시 연합전선을 구축해 대항한다. 

 미국역사상 등장했던 잠재적 독재자들은 찰스 코글린이나 휴이 롱, 조지프 매카시 등이 있다. 이중 매카시는 냉전시대 공포를 이용하여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언론을 검열하고, 출판사를 폐쇄했다. 그는 상원의 불신임에도 40%의 지지율을 얻었다. 그리고 1968-72년 윌리스는 극단적 인종차별로 큰 인기를 얻었다. 이들은 대중의 지지를 얻었지만 정당의 문지기 역할로 인해 체계적으로 배제되었다. 

 미국의 건국자들은 민주주의를 확립했음에도 대중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대중이 무지몽매하여 언제든지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의원내각제는 총리가 의회의 일원으로 정치 내부자의 인정을 받아야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반면 대통령제는 국민 선거로 결정되는 만큼 이 같은 필터기능이 없다. 그래서 미 건국자들은 선거인단제도를 고안하였다. 하지만 선거인단은 국민 선거 이후에 구성되어 후보자 자체를 거르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정당과도 무관하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필터기능이 없다. 

 이로 인해 미국은 역사상 정당이 사실상 민주주의 관리인이 된다. 19세기 초 대통령 후보 선출은 의회간부회의라는 하원단체에서 매우 폐쇄적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다 1830년대 초부터 각 주의 대의원이 참석하는 전당대회에서 후보가 결정되었다. 대의원도 일반투표가 아니라 각 주 및 전당위원회에서 선발했다. 프라이머리 선가는 1890-1914년에 도입되었다. 하지만 당시엔 대의원의 프라이머리 승리후보에 대한 지지의무가 없었다. 이런 일련의 전당대회 시스템은 비민주적이거나 위험한 후보를 제거했다. 프라이머리는 대선 후보 지명에 대한 구속력이 없고 그 자체로 화려한 행사에 불과하다. 실질적 힘은 당내부자가 갖고 있었고 이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 후보자가 되는 길이었다. 이는 오랜 기간의 동료평가 기능을 했다. 정치인들은 서로를 알고 오랜 기간 같이 일하면서 성격과 이념, 위기관리능력, 인성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가능하다. 

 정당들은 1970년대 들어 기존의 후보 선정 시스템을 바꾸기 시작했다. 1968년이 시작인데 당시는 로버트 케네디 암살, 베트남 전 갈등, 반전 시위의 열기로 사람들은 기존 정당에 신뢰가 사라져서 전통적 후보 지명시스템에 대해 강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급기야 시카고 전당대회에 반전시위대가 난입하였고 그 과정을 경찰이 강경진압한다. 그 후폭풍으로 대선후보 험프리가 패배한다. 이에 민주당 지도부는 대통령 후부 지명과정을 개방해야 한다는 강한 압박에 직면했고 이후 지금의 구속력있는 프라이머리가 생겨난다. 1972년 민주, 공화 양당은 전당대회에 참여하는 대의원 대부분을 각 주의 프라이머리와 코커스를 통해 선출한다. 후보들은 대의원의 이탈을 막기위해 미리선출했다. 당지도부에 의존하지 않고 대선후보를 선출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장벽이 남아있었다. 프라이머리에서 승리하려면 막대한 선거자금, 호의적 언론기사, 모든 주에서 자신을 위해 활발하게 뛰어줄 인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후원과 언론인, 이익단체, 사회운동가, 주지사와 시장, 상하원 의원등과의 광범위한 연합도 요구되었다. 

 이 장벽은 2010년대에 무너지게 된다. 연방대법원은 2010년의 판결로 외부자금이 더 쉽게 유입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로 인해 정치후원자를 찾는 것이 매우 쉬워져 기존의 정당에 의존을 덜 하게 되었다. 그리고 케이블 티비와 유튜브, SNS의 등장은 대체언론의 성장을 가져와 기존 시스템에 대해 의존을 더욱 덜어주었다. 

 이처럼 미국역사에서 대선 후보가 되는 과정은 과거 매우 비민주적이고 폐쇄적인 체계에서 더욱 민주적이고 개방적으로 변화하였다. 하지만 정치 전문가에 의한 필터기능이 사라지면서 미국에서는 극단적이고 정치경험이 전무한 포퓰리스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가능해졌다. 상당한 역설인 셈이다. 

 과거 독재자들은 정적을 대놓고 투옥, 추방, 암살했다. 하지만 지금의 독재자들은 탄압을 합법적으로 포장한다. 이를 위해 심판 매수가 필요한데 바로 법원이다. 그리고 현대 독재자들은 종종 명예훼손이나 모욕적 혐의로 소송을 남발해 반정부성향이 강한 인물을 합법적으로 경기에서 배제한다. 그러면 언론사는 공격으로 인해 자체검열을 시작한다. 독재자는 야당을 지지하는 기업도 공격한다. 그리고 예술가, 지식인, 팝스타, 스포츠 선수 등 문화계 인사도 공격한다. 이들의 높인 인기와 도덕성은 독재자에게 위협이다. 그래서 독재자들은 이들을 회유, 협박한다. 주요 언론인과 기업가들이 매수되거나 경기장 밖으로 쫓겨날때 저항세력은 힘을 잃는다. 현대의 독재정권은 이렇게 해서 법률의 테두리 안에서 승리를 거머쥔다. 

 여기서 더 나아가 독재정권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게임의 법칙도 바꾼다. 헌법과 선거시스템, 다양한 제도를 바꾸어 저항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공공의 선이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며 그래서 경쟁자에 불리하게 운동장을 기울인다. 

 잠재적 독재자라도 민주체제이기에 뭔가를 하려면 명분이 필요하다. 경제위기, 자연재해, 전쟁, 폭동, 테러와 같은 안보 위협은 좋은 구실이다. 그래서 잠재적 독재자일수록 그런 상황이 아님에도 위기를 강조한다. 실제 미국의 트럼프는 자신을 반대하는 민주당 우호지역을 범죄 우범지역, 테러지역으로 규정하고 군대 투입을 하고 있다. 시민들 역시 안보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러한 조치를 찬성한다. 

 법체계는 본질적으로 모든 것을 규정할 수 없기에 모호하고 개념에 공백이 있다. 그래서 헌법 조항에만 의존해서는 잠재적 독재자를 막을 수 없다. 민주주의가 오래 건강하게 작동하는 국가는 비공식적 규범에 의존한다. 바로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다. 상호관용은 정치 경쟁자가 늘 헌법을 존중하는 한 권력을 놓고 서로 경쟁을 벌이며 사회를 통치할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권력에 대한 반항은 역적으로 여겨졌고 제거로 이어졌기에 이는 혁신적 사고다. 그리고 민주주의 붕괴 사례에서 독재자들은 반대파를 국가의 위협으로 낙인찍어 제거한다. 제도적 자제는 법적 권리를 신중하게 행사하는 태도다. 법을 존중하면서 입법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자세다. 대통령은 행정명령의 권한을 갖고 있다. 한국의 윤석렬은 행정명령을 마구 집행해 입법부와 갈등을 일으켰고, 국회분의 헌법재판관이나 방송통신위원등을 임명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제도적 자제에 실패한 사례다. 

 미국 역시 강력한 민주주의 규범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건국초기 공화주의자와 연방주의자들은 서로를 제거 대상으로 여겼다. 그러다 수십년이 지나서 상호공존의 정신이 생겨났다. 이는 오래가진 않았는데 남북전쟁때문이다. 당시 인종차별에 대한 갈등은 최고조였다. 하지만 전후 흑인 노예에 대한 시민권의 확립과 군의 철수 부분에서 북부쪽이 상당한 양보를 하고 흑인들의 시민권 문제를 해결하지 않음으로써 갈등이 봉합된다. 갈등이 다시 재점화한 것은 1963-64년에 미뤄뒀던 흑인 시민권 문제가 다시 법적으로 쟁점화하고 해결되면서부터다. 이는 인종을 포섭하고 미국은 진정한 민주사회로 바꿨지만 미국의 양극화와 상호관용과 자제의 규범에 균열을 내는 시작이 되었다. 

 과거 미국의 양당은 모두 내부적으로 다양성을 보존했고 정당간의 차이가 미미했다. 하지만 1964-65년 남부지역의 민주화는 남부지역의 백인을 공화당으로 북동부를 민주당 지지지역으로 바꾸었다. 민주가 진보, 공화가 보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실제 1950년대 유색인종의 7%가 민주당 지지였다면 2012년엔 무려 44%가 되었다. 그리고 공화당 지지자 중 백인 비중은 90% 정도로 큰 변화가 없다. 또한 공화당은 개신교의 정당이 되었다. 1973년 연방대법원은 낙태 합법화 판결을 하였는데 이후 공화당이 개신교를 대변하게 되었다. 그 결과 2016년 백인 개신교 집단의 76%가 공화당을 지지한다. 

 규범파괴는 양당이 모두 자행하고 있지만 대개 시작은 공화당이었고, 그 파괴의 정도도 더욱 심각하다. 저자는 그 이유로 공화당 지지자가 민주당 지지자에 비해 막말을 일삼는 당파성향이 강한 매체에 더욱 의존하고, 보수이익 단체가 강경화했으며, 지난 수십년간 민주당은 지지계층의 다양성이 확보된데 비해, 공화당은 백인 개신교로 동질적이고 이들이 기득권을 잃어 편집증적 반발을 하는 것을 원인으로 지적한다. 

 한쪽이 강경반응을 보이면 조선시대 사화가 그랬던 것처럼 반대쪽도 강경반응으로 대응하기 쉽다. 저자는 이것이 해결책이 아니라고 말한다. 강경대응으로 반대쪽이 나서면 오히려 전제주의가 강화되기 쉽다. 그리고 중도진영을 실망시켜 지지도가 떨어지고 친정부세력이 더욱 강해지는 경우가 있다. 또한 쌍방의 강경대응은 기존의 민주적 규범을 완전히 무너뜨려 더욱 낮은 수준의 민주주의를 고착화한다. 사람들은 초기엔 민주주의 규범의 파괴에 놀라고 격앙하지만 그것이 자주 자행될수록 기준은 낮아지게 된다.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은 이렇다. 잠재적 독재주의자가 나타나면 민주적 규범과 절차 파괴행위에 대해 강경대응하면서도 반대 진영은 철저히 규범을 지키고 연합전선을 이뤄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현상에 대한 대응이다. 가장 궁극적인 해법으로는 사회불평등 해소와 보편적 복지를 통한 사회 양극화의 해소를 든다. 잠재적 독재주의자가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기존 민주체제와 정치권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때문에 그것을 애초에 봉쇄하는 것이다. 다만 시민의 자질에 대한 지적이 없는 점은 좀 아쉽다. 시민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신봉자라면 잠재적 독재주의는 사실 불만이 있더라도 들어설 길이 없다. 즉, 상당한 수의 시민이 자신의 경제적, 정치적 유불리로 인해 민주주의의 파괴를 용인하는 셈인데 이는 시민성의 문제다. 이런 부분에 대한 지적도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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