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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교육에서 무엇을 평가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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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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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은 백년지대계란 말처럼 산업화 이후 거의 모든 근현대 국가들은 시민 하나하나의 교육수준이 국력과 직결됨을 깨닫고 보통교육을 실시해왔다. 이후 교육을 꾸준히 변화하여 교실과 학교 및 정책수준에서 많은 변화와 혁신이 진행되었다. 그러는 사이 이 모든 교육을 왜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사라졌다. 초점은 '왜'는 정해져 있고 '어떻게'로 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좋은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를 주변화시키는 것은 이른바 교육의 학습화와 관련한 것을 보인다. 교육의 언어를 학습의 측면에서만 논의하려 하는 경향이 강하다. 학습은 물론 교육의 핵심이다. 하지만 목적의 문제를 포함해서 내용과 관계의 문제를 다루기 힘들게 하는 측면도 있다. 


1.교육의 학습언어화와 증거기반실천의 문제점

 지난 20년간 PISA를 필두로 하여 교육의 측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는 국가간 교육체제를 비교하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 내의 지역과 개별학교에 대한 상대평가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일련의 측정 행위는 모든 사람이 동일 품질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사회정의, 책무성과 선택의 요소, 실패한 학교와 교사를 선별하게 한다. 이는 1980년대의 논의와 이어진 결과다. 당시 교육 개선을 위해 학교 효과성 연구가 이뤄졌다. 처음엔 단위학교-교수 및 학습의 역동성-타당한 결과와 산출물이라는 식으로 시각이 좁혀졌다. 이는 학교교육의 성과를 개선 및 측정가능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이런 시도가 행해졌다. 이런 측정문화는 최고 수준의 교육정책과 교사 실천에 영향을 미쳤다. 데이터 기반이기에 어느 정도 유익한 면도 있었으나 교육의 성과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사실적 정보로만 국한시키는 문제도 있었다. 

 이는 2가지의 문제를 야기했다. 우선 사실정 정보는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당위성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측정의 타당성 문제다. 이런 측정 정보가 교육이 가치 부여하고자 하는 것을 실제로 측정했느냐란 점이다. 

 학습의 언어가 부상한 이유는 총 4가지다. 우선 지식과 이해의 구성에 학생의 적극적 역할과 이에 대한 교사의 혁신적 역할에 중점을 둔 학습이론의 등장이다. 둘째는 교육의 과정이 교사 중심이어야 한다는 관점에 대한 비판, 셋째는 사람들의 삶 전반에 걸친 비공식 학습의 엄청난 증가에서 입증된 소위 학습의 조용한 폭발, 넷째는 복지 국가의 쇠퇴와 그에 따른 학습 책임을 개인에 전가하는 신자유주의 때문이다. 

 이런 학습의 언어는 교육을 교수자 중심에서 학습자 중심으로, 학습의 정의를 공식 교육과정에서 그 외의 것과 평생으로 늘렸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하지만 2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교육과 학습을 학습자 개개인의 것으로 국한했다는 것이다. 교육에서는 많은 협동, 협력 학습이 이뤄지며 꾸준한 관계가 이뤄진다. 때문에 이것을 개개인의 영역으로만 국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학습은 근본적으로 과정의 개념인데 결과적인 측면에만 주목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교육은 기본적으로 3가지 다른 기능을 수행한다.

 우선 자격화다. 교육의 기능은 그들에게 지식, 기능, 이해와 더불어 무언가를 할 수 있게 하는 성형과 관련의 형식을 제공한다. 이는 경제적 요인과 관련이 있다. 정치적 문해력, 문화적 문해력도 포함한다. 또 다른 기능은 사회화다. 교육을 통해 개인은 자신이 속한 특정한 사회, 문화, 정치 질서의 일부가 된다. 마지막은 주체화다. 교육받은 자가 사고와 행동에서 자율적이고 독립적이 되는 것이다. 이 3가지 기능은 각각의 특성이 있어나 어느 정도 서로 중첩되며 그 과정에서 시너지와 갈등이 혼재한다. 

 현재의 가장 큰 문제는 언급한 것처럼 교육에 있어 온갖 측정에 기반한 시도와 평가가 넘쳐나지만 정작 실제로 가치 있는 것을 측정하고 있느냐의 여부다. 증거에 기초하여 교육을 해야 한다는 생각과 교육이 증거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최근 세계 여러나라의 두드러진 경향이다. 이는 1980년대 영미권을 중심으로 교육 연구는 효과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시도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90년대 이런 사고가 연방 연구기금에 관한 법률에 영향을 미쳤고 2001년 미국의 초중등교육법은 모든 아이를 뒤에 남겨두지 않는다는 유명한 구절로 개정되었다. 

 이런 증거기반실천은 원래 의료분야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것이 다른 영역으로 확대한 것인데 이것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효과적인 개입으로써의 전문적 행위가 강조되고 그것의 인과가 분명해야 한다. 의료는 그러한 측면이 강하다. 하지만 교육은 그렇지 않다. 교육은 선형적 관계가 아니며 끊임없는 되먹임 관계다. 의료에서 치료가 있으면 낫거나 실패하지만 교육은 가르침이 있어도 반드시 배우는 것은 아니다. 교사의 교수가 어떤 학생에겐 매우 이롭지만 다른 이에겐 해로울 수 있으며 배우는 과정도 타고난 재능과 가정과, 친구, 주변 등 환경 여건의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교육에 대한 증거기반실천적 접근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수반한다. 우선 특정 목적에 대한 효과적인 방법이 있더라고 학생은 그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육은 항상 활동과 전략 그리고 개입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즉, 기술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도덕적 실천에 가깝다는 점이다. 그래서 교사는 교육상황에서 단지 효과가 어떨지를 질문하기보다는 폭넓게 이런 상황에서는 아이에게 어떤 것이 가장 적합한지를 질문한다. 

 

2. 책무성의 문제

 책무성의 개념은 진정한 민주적 잠재력을 가진 개념에서 벗어나 교육 실천을 사실상 억압하고 규범적 문제를 단순한 절차의 문제로 축소시킨 일련의 과정으로 전환되었다. 앞장의 증거기반실천이 교육의 민주적 통제에 위협이라면 책무성은 교육의 관리적 접근으로 인해 교육자들이 자신의 행위와 실천에 대해 책임지기보다는 결과에 대해 자기검열하게 하여 교육을 위축시키게 만들었다. 

 원래 전통적인 교육에서의 책무성은 지금처럼 거버넌스 체계가 아니라 관련하는 여러 주체가 상호 책임을 갖는 체계였다. 즉, 현장체험학습을 가서 아이의 돌발행동으로 사고가 난다면 과거엔 아이의 행동문제, 부모의 교육문제, 교사의 관리 문제, 버스기사의 문제, 그외 사회의 문제로 분산되어 상호책임졌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사건이 터지면 학교와 교사에게만 책임을 묻는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분위기는 체험학습 자체를 시행하지 않는 교육회피로 이어지게 된다.  

 이는 교육이 복지주의에서 관리주의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복지주의에서는 형평성, 통합, 사회정의 같은 전문적 기준에서의 가치와 헌신이 이뤄지고 협력의 강조 같은 공공서비스가 중요하다. 하지만 관리주의에서는 고객 자향의 정신, 효율성 및 비용효과성, 경쟁, 자유시장 경쟁, 품질 보증이 중요하다. 이런 전환의 기저에는 신자유주의가 있다. 공동선의 추구에서 공급자로서의 국가와 서비스 소비자로서 납세자 관계가 되어 버린 것이다. 

 1980-90년대만 해도 학부모는 자신을 교육의 소비자라 생각하지 않았고 교육을 상품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사실 부모의 선택과 학교가 부모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자체는 민주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부모의 요구가 사회에서의 교육의 형태와 목적에 대한 숙고가 결여된 것이라면 이는 단지 경제적 사회적 자본이 문화적 자본으로 바뀌는 결과를 초래해 불평등만 재생산하게 된다. 

 그리고 책무성은 강화되었지만 교육소비자인 부모와 학생, 공급자인 학교는 간접책무성 관계에 불과하다. 교육 공급의 질은 정부가 책임지고 학교는 당국의 규제에만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책무성이 강화되었음에도 부모는 교육의 방향에 참여 권한이 없다. 또한 책무성으로 학교에 인센티브를 가하게 되면 학교는 학생을 잘하게 만들기보다는 잘하는 학생을 유치하려 한다. 그것이 훨씬 손쉽기 때문이다. 또한 책무성의 문화에서 학교와 교사는 공급자 측에 갇혀 전문적 목소리를 내기도 어렵다. 

 결국 책무성은 학교 현장에서 학부모와 학생의 민주성을 다소 신장시킨 면이 있다. 하지만 학교는 정부의 각종 정책과 규제에 묶여 있기에 지역과 학교 특성에 맞는 요구를 실행시켜주지 못한다. 또한 책무성은 공공성과 기반한 학교교육의 제공을 납세자로서의 수요자측면으로만 바라보게 하여 공공성을 넘어선 개인적 요구와 과다한 요구 교육에 대한 책임을 교사와 학교에 집중시켰다. 이는 학교와 교사의 교육전문성을 약화시키고 자기 검열을 하게 만들며 급기야는 모든 책임과 위험을 회피하도록 해 교육자체를 크게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학생들이 운동회를 할 때 조차 시끄럽다고 소리치는 것이 지금의 실태다.


3. 멈춤의 교육(주체화의 교육)

 멈춤의 교육은 자격화, 사회화, 주체화를 모두 포괄하지 않는다. 주체화에 중점을 둔 방식이다. 저자는 주체화는 유일성 개념이라 설명한다. 그리고 현전으로서의 출현이라는 개념이 인간의 주체성과 주체화에 대한 인본주의적 약점을 극복한다고 본다. 즉, 주체화는 현전으로서의 출현인 것이다. 그리고 아렌트의 개념을 빌린다. 

 아렌트에게 행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고 특징은 자유이다. 행위한다는 것은 주도적이 되는 것이며 뭔가 새로운 것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래서 행위는 탄생이다. 다만 그녀가 말하는 자유는 선택한는 것을 무엇이든 하는 자유가 아니라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것을 존재하게 하는 요청이다. 그래서 이는 내면의 감정이나 지극히 사적인 것이 아닌 정치적이고 공적인 것이 된다. 즉, 나의 행위는 시작의 절반에 불과하며 타인이 나의 행위의 주도성에 응하느냐가 중요하다. 결국 주체가 현존하는 것은 개인의 측면을 강조하나 항상 세계 속에서 출현하므로 공적이고 타인과 같이 가는 것이다. 

 멈춤의 교육은 표준적인 질서의 중지 가능성을 열어주는 교육이다. 이를 통해서 유일성이 발현하고 유일한 타자를 만날 수 있다. 그래서 교육을 서비스로 보는 수요자의 요구는 배격된다. 이는 공동선의 추구가 아니라 지극히 개인의 이익과 민주주의에 대한 추상적 대의 명분의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엘커스는 학교가 지나치게 많은 민주적 간섭에서 보호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학교는 자율적으로 기능할 때 가장 잘 작동한다는게 그의 생각이다. 학부모와 학생 개개인의 공동성에서 벗어난 요구를 모두 들어주려하는 경우 겨우 의미없는 파편화된 교육과정만 초래될 뿐이다. 따라서 이런 선호들은 그것의 출처, 타당도, 가치성, 근거가 이기적인지 이타적인지를 고려해야 한다. 

 이런 일련의 것들을 위해 필요한 것이 숙의 민주주의다. 이는 개인의 욕구를 집단의 것으로 전환한다. 이는 어떤 신호가 가장 많은 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최선인지를 판단한다. 때문에 공공의 이익은 때론 사적 이익을 침해한다. 공적 영역에 대한 참여와 헌신은 특정의 규율과 특정의 자제력을 요구한다. 이는 참여와 헌신이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배움을 통해 어느 정도는 고통스럽게 내면화 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그리고 학교는 교과 학습에서 주체화의 장을 마련해줘야 한다. 이를 통해 개인이 세계에 대한 분명한 인상을 취할 수 있고 세계로의 진입도 가능해진다. 주체화는 교과 내용에 대한 참여를 통해 일어날 수 있는 사회적이고 상호주관적이며 결국은 정치적 과정이다. 

 포용도 중요하다. 포용인 민주주의의 정당성에 관여한다. 민주적 의사결정의 규범적 당위성은 그것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여 결과에 영향을 미칠 기회를 갖는 정도에 달렸다. 민주주의 역사는 포용범위의 지속확대 역사다. 그리고 배제의 역사이기도 하다. 배제의 대상은 합리성과 분별력은 없고 이기심만 가득한 자들이다. 그래서 민주적 교육은 개인으로 하여금 민주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준비가 되도록 하는 과정이다. 

 숙의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참가자들에게 더 공적인 마인드를 갖게 하고 보다 관용적이고 박식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에 주의를 갖게 한다. 그래서 자신의 관점을 더욱 공적으로 만들 수 있게 한다. 


 책은 교육에 대한 좋은 함의와 고민을 담았다. 전 세계 교육은 신자유주의와 측정의 사고방식에 함몰되어 있다. 그래서 작금의 교육현장은 공공선을 담아내는 그릇의 역할보다는 이기심과 공공성이 전무한 소수로 얼룩지고 있다. 그들은 말도 안되는 무한 요구로 학교와 교사, 그리고 다른 학생들을 괴롭히며 수많은 교육기회를 날리고 소진시킨다. 이런 것들에 대한 강한 제재가 필요하다. 자정작용은 어렵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밖에 보지 못하기에 주변의 비난엔 아랑곳하지 않는다. 법적 제재가 현재로선 유일한 방안으로 보인다. 책은 교육과 그 본질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들어주었다. 교육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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