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개별 작품에 대해 풀어놓은 책은 많이 없지만 그 작가와 사조, 예술사를 다룬 책은 많다. 반면 문학은 개별작품 하나하나가 재밌거리이자 공감거리지만 그 작가와 문학사를 다룬 책은 많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책 '문학의 역사'는 서양, 특히 영국문학에 집중해 그 역사와 흐름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로웠다. 그리고 다 읽고나니 역으로 고대부터 한국문학사의 흐름을 다룬 책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저자의 문학에 대한 깊이와 혜안도 높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문학에 대해서는 다양한 생각이 있을 수 있지만 저자는 문학이 세상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능력의 정점에 다룬 인간의 지성이라 했다. 참으로 그런 것 같다. 사람은 세상을 경험하고 그것을 해석하고 느끼며 표현하고 싶은데 그것을 잘 반영하며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은 상당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상을 반영하고 같으면서도 다르며, 직접적이기도 하고 간접적이기도 하다.
최초의 문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신화다. 신화는 인류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문학은 사실상 이런 기능을 계승했다. 신화는 불가사의한 세계의 원리를 나름 설명함으로써 의미 없이 태어난 모든 인간에게 의미 부여를 한다. 신화의 구성요소는 두 가지로 일단 플롯이 있어서 발단, 전개, 갈등, 해결 등의 구조가 있다. 그리고 신화는 지금의 관점에선 허무맹랑하지만 반드시 어느 정도의 진실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 신화는 서사시로 계승된다. 최초의 서사시는 '길가메시 서사시'로 추정된다. 서사시는 영웅적인 가치를 표현하는 매우 오래되고 엄선된 텍스트다. 서사시는 역사상 전환기에 나타나는데 이 전환기는 바로 고대국가의 탄생 시기다. 고대국가는 자신들의 탄생 이유를 정당화하고 신격화해야 했는데 이런 근본적 이상을 담은 영웅형태로 이를 표현했고 이것이 서사시다. 때문에 서사시는 아무나라나 만들지 않는다. 훗날 위대한 제국으로 성장할 나라의 탄생이 기록된다. 사실 대부분의 나라가 서사시를 만들었을지 모르지만 살아남은 정복 제국의 서사시만 남기에 그럴 것이다. 문학적 서사시는 찬가와 비가로 나눠지며 길고 영웅적이며, 민족주의적이고 시적이다. 서사시는 보통 후대가 그리워하며 되돌아보고 싶을 정도로 지나가 버린 위대한 시대를 배경으로 삼는다. 그래서 동서양의 제국들은 이런 서사시로 인해 과거의 영광의 시대를 항상 그리워한다. 그럴리가 없었을 텐데 말이다.
비극은 단지 끔찍한 이야기가 아니라 결국 비극으로 이야기가 굴러가게 되는 요소를 갖춘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은 무엇을 묘사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묘사하는냐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즉, 비극적 사건은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나 필연처럼 그럴듯하게 다가와야 한다. 그래서 비극의 주인공들은 대개 판단착오처럼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를 저지르고 이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나도 얼마든지 그랬거나 그럴 수 있기에 필연적이고 공감을 불러오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래서 비극은 두려움보다는 연민을 불러일으킨다고 보았다. 인간의 삶은 절대로 내 맘대로 되지 않기에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는 비극이다. 그래서 비극의 공식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오늘 날 영국문학은 700년 전 제프리 초서에게서 출발한다. 초서는 17세기 무렵 잉글랜드 주민들이 비로소 단일한 언어로 쓰고 말하기 시작한 시점의 사람이다. 그래서 초서의 문학은 영국 문학일 뿐만 아니라 영어로 쓰인 문학의 출발이기도 하다. 그리고 초서 이전 문학은 작가를 딱히 가지지 않았는데 초서 이후로 작가가 분명이 생겨난다. 초서는 개인적으로 유복한 삶을 살았지만 1380년이 되어서는 운을 잃고 세상의 주변부로 밀려나게 된다. 그리고 재능있는 사람에게 이런 한직의 시간은 집필의 시간이 된다. 초소는 켄트에 틀어박혀 위대한 시인 켄터베리 이야기를 쓴다. 이 작품은 인쇄기 이전에 나온 것이라 필사본만 존재하고 직접 쓴 육필은 전해지지 않는다.
내용은 1387년 4월 순례자 29명이 런던의 템스강 남안의 타바트 여관에 모이며 시작한다. 이들은 4일 간 100마일의 순례에 나서 켄터베리 대성당의 순교자 토머스 베케트의 묘지까지 갈 예정이다. 긴 여정인 만큼 1명 씩 가는 길에 이야기 두 개, 오는 길에 이야기 두 개 씩 총 116개의 이야기를 나누기로 한다. 이들은 다양한 직종, 성별, 신분을 지녔기에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당대 사람들의 모습을 내포한다. 이야기는 다소 외설적이기도 사회 비판적이기도 엉뚱하기도 하나 막판엔 주임신부의 고결하고 진지한 설교로 다행히 마무리된다. 안전장치가 아닐까 싶다.
셰익스피어는 엘리자베스 1세 6년차에 태어났다. 그의 시대는 신교와 구교의 전환기였고, 왕위 계승에 대한 혼란기였다. 엘리자베스 1세가 독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왕위 계승에 대한 소재로 가득차 있다. 다양한 고민의 반영인 셈이다. 그는 운문에 각운이 없는 무운을 사용했다. 그래서 일상언어의 유연함과 시의 장중함을 모두 갖춘다. 그리고 셰익스피어는 작품에서 독백을 탁월하게 사용하여 무대 위 인물들의 마음 속을 능숙히 보여준다.
18세기 들어 영국에서는 문학 창작과 관련한 법과 상업적 틀이 생겨난다. 이를 위해서는 3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우선 문학 시장이 생겨나야 한다. 그리고 시장이 생기려면 당연히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문해력을 갖춘 사람이 있어야 하고, 이들이 문해력을 갖게 해줄 교육기관도 필요하다. 또한 문해력을 갖춘 이들을 저렴하게 책을 살 수 있게 인쇄술과 저렴한 종이도 필요하다. 이 모든 게 갖춰진게 18세기 였다. 그리고 1713년부터 영국에는 저작권 법이 생겨났다. 이때부터 최초의 창작물은 저자가 소유하고 타인은 그의 허락을 받아야만 사용이 가능해졌다. 초기 저작권은 보호기간이 매우 짧았지만 차츰 연장되었고 오늘날에는 사후 70년으로 규정되었다.
유럽에서 원류 소설이라 할 만한 작품은 5가지다. 데카메론,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돈키호테, 천로역정, 오두노코다. 그리고 영문학에서 소설 장르의 출발점으로 여겨지는 것은 대니얼 데포의 로빈슨 크루소다. 이 소설은 자본주의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당시는 무엿상과 자본주의, 기업가의 시대다.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를 개발하여 큰 부를 이루는데 이는 기업과 정신과 연관된다.
1789-1832년의 문학을 낭만주의라고 일컫는다 1789년은 프랑스 혁명의 해로 낭만주의는 바로 이데올로기에 중심을 둔 최초의 문학 운동이다. 이데올로기는 한 무리 또는 여러 무리의 사람들의 삶에 기준이 되는 신념이나 집합이다. 그래서 낭만주의에는 국가를 넘어서는 세상을 바꾸려는 신념이다. 하지만 낭만주의 문학에는 이데올로기가 전부는 아니다. 그들은 우리 삶을 규정하는 감정과 심리에 매혹되어 있기도 하다.
제인 오스틴은 6권의 소설을 썼는데 모두 여주인공이 누구와 결혼할지가 주제다. 그래서 사람들은 좁은 주제의 세밀한 표현때문에 그의 작품을 세밀화에 비유한다. 오스틴의 모든 소설에서는 여자주인공의 결혼 문제가 주요 관심사지만 정작 작가 자신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폭이 좁은에도 오스틴의 소설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정작 그 주제를 매우 재밌고 흥미롭게 잘 다뤘다는 점과 도덕적 진지함에 있다. 도덕적 진지함은 복잡한 상황과 문제에서 어떻게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명료하게 제시했다는 것이다.
찰스디킨스는 지폐나 우표에 초상이 있을 정도로 위대한 작가다. 그리고 심지어 오늘날에도 매년 100만권 이상의 책일 팔릴정도로 생명력이 있다. 그가 위대한 이유로 작가는 다섯 가지 이유를 꼽는다. 첫째로 오랜 작가 기간 내내 무척 창의적이었다. 둘째는 올리버트위스트처럼 어린이를 소설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독자로 하여금 어린이가 얼마나 쉽게 상처받고 멍드는지, 어른과 달리 어린이가 어떻게 세상을 바라 보는지를 작품으로 깨닫게 했다. 셋째는 그는 자신이 살았던 시기에 민감했고 이를 반영했다. 넷째는 소설이 사회를 반영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이해한 최초의 소설가라는 점, 다섯 번째는 인간이 그래도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믿음을 고수했다는 점이다.
미국문학은 영국 문학의 아류처럼 초기에 여겨지기도 했지만 전혀 다른 자연과 정치체제를 가졌다는 점에서 확연히 다른 존재다. 미국문학의 출발점은 여작가인 앤 브레드 스트리트로 파악된다. 그는 계몽한 청교도의 딸로 여자도 충분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정신 속에서 교육을 많이 받았다. 청교도주의는 미국 문학의 주춧돌이다. 19세기 청교도 주의는 뉴잉글랜드에서 초워룾의자들의 작품을 통해 문학으로 피어났다. 바로 삶의 진실은 일상적인 세상의 것들보다 위에 있다는 것이다. 자유는 다양한 면면에서 시를 포함한 미국적인 모든 이념의 본질로 이는 미국의 자유시로 이어진다. 자유시는 압운을 벗어던 진 시로 형식면에서 파격적이다.
19-20세기 미문학은 강렬하고 독특한 자기규정을 하는데 이는 프론티어 논지다. 자신들의 본질적 특성과 가치가 문명이 서부로 확장하는 투쟁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난다는 생각이다. 이는 사실상 거의 모든 카우보이 소설과 영화에 투영되어 있다. 미국은 지역도 넓은 만큼 문학도 지역색이 뚜렷하다. 윌리엄 포크너와 캐서린 앤포터로 대표되는 남부 문학, 뉴욕의 유대인 문학, 서부해안 문학이 그러하다.
문학은 사회역사적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기록자 역할을 한다. 국제사회에서 일어나는 일 뿐만 아니라 그 일데 대한 국가의 복잡하고 유동적인 반응도 새겨넣는다. 전성기의 제국주의와 그 직후의 포스트 제국주의 단계를 거치는 동안 영국인에게는 자부심과 수치심이 불안정하게 출령였고 문학에 이것이 반영되었다.
전쟁은 시와 뗄 수 없는 관계다. 최초의 위대한 시일 일리야드도 트로이 전쟁에 관한 이야기다. 그래서 제1차 대전에는 영시가 가장 많이 쓰여졌다. 1차 전쟁은 매우 끔찍한 전쟁이었고 사람들은 국가주의와 영웅주의에 매몰되어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전장의 작적은 구시대적 전략사고를 가진 장성들로 인해 인력을 갈아넣는 소모전에 불과했다. 양쪽은 깊은 참호를 파놓고 서로 포를 쏘았고, 쓸데없이 기관총으로 무장한 적진에 병력을 뛰어넣게해 소모시켰다. 저자는 이런 전쟁의 아픔을 표현한 전쟁시를 높게 평가하면서도 그러면서도 이런 전쟁시를 탄생시킨 병사들의 수천만 생명보다 과연 이 전쟁시가 가치가 있을지를 되묻는다.
레이 브레드 버리의 화씨 451은 흥미로운 작품이다. 화씨 451은 저절로 종이에 불이 붙는 온도다. 주인공은 소방관으로 통상적이지 않게 불을 끄기 보다는 책을 태우는 일을 한다. 책을 태우는 것은 과거의 이상한 생각들을 막아 이상향을 구축하려는 독재적 사회 때문이다. 항상 독재자들은 모든 사상을 정리하고자 책을 태운다. 진시황이 그리고 히틀러가 그러했다. 주인공은 책을 태우다 우연히 한 권의 책을 보게 되고 그것을 읽고 독자이자 사회의 반역자가 된다. 그는 숲에서 그와 비슷한 사람들의 공동체게 숨어들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책 하나하나를 외워서 자신이 스스로 위대한 책 자체가 되어버린 상태였다. 책은 언제든 소각되어 모두 없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