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한국 정치가 매우 암울한 시절에 나온 책이다. 10년 정도 전으로 당시 대통령은 탄핵 당한 박근혜였고,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고, 통진당이 해산되었으며 국정 농단 사건은 아직 일어나기 전의 상황이다. 저자 한홍구는 역사가로 세월호 사건과 통진당 해산을 바라보며 한국 보수에 대한 논의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가 보기에 친일반공세력으로 시작하여 독재정권과 결탁한 한국 보수의 탄생은 소위 세월호 사건과 통진당 해산 사건의 원인으로 보였던 것 같다. 그는 이런 시선으로 한국 보수가 과거 친일세력에서 한국 전쟁을 이용해 반공세력으로 탈바꿈하고 이후 독재정권과 결탁하여 어떻게 민주주의를 파괴해 왔는지 조목조목 서술한다. 그리고 이들이 매우 무책임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보수에겐 뼈아프겠지만 작금의 현실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보수정권이 배출한 대통령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이명박-박근혜-윤석렬이다. 김영삼을 제외한다면 이들에겐 모두 공통점이 있다. (사실 김영삼은 오랜 야권인사로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보수쪽에 붙었기에 정통 보수 세력이라고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하여튼 이들의 공통점은 범법자라는 것이다. 노태우 이전은 독재자 및 그 협력자로 헌정 질서를 부정선거, 쿠데타 등으로 파괴했고 노태우 이후로는 모두 징역 10년 이상의 중범죄를 저질렀다. 보수 세력에서 이런 대통령들만이 배출된다는 것은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적어도 그 정당에 민주주의를 중시하고 수호하려는 철학과 시스템이 부재하다고 봐야 한다. 책에 나온 그들의 역사로 들어가 보자.
1. 한국 전쟁
광복 후 반민특위가 구성되어 친일파를 때려 잡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선택을 받은 이승만은 이런 친일 세력을 자신의 정권 파트너로 선택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어떤 정당성도 없고 지탄을 받는 상황이었지만 한국전쟁이 벌어지며 상황은 급변한다. 이들은 이 전쟁을 이용해 적극적인 반공세력으로 변모하면서 자신들의 신분을 세탁할 기회로 사용한다. 민족반역자에서 민족 영웅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개전하자 국군은 형편없이 밀리면서도 거짓 승전보를 전한다. 그리고 이승만은 무려 대구까지 피신하면서도 마치 자신은 서울에 있는 것 같은 방송을 녹음한다. 상당수 시민들이 이것을 믿고 피란하지 않았다 서울에 묶이게 되다. 당시 서울시민은 무려 100만이었다. 국군은 역사교과서에도 나오는 것처럼 자신들의 주요 인사들이 피신하자 사람들이 건너고 있음에도 한강 인도교를 폭파한다. 수백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승만 정권은 비난일 일자 명령을 따랐을 뿐인 대령 최창식을 처형한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수복까지 2주가 걸렸다. 핵심 친북세력은 모두 서울을 뜨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도망갔던 도강파는 어쩔수 없이 남았던 잔류파를 부역자로 몰아 처벌한다. 이런 부역자 처벌은 일부 극우세력에 좋은 기회였다. 살인, 고문, 재산약탈, 부녀자 겁탈이 자행되었다. 한국 경찰사 제 2권에 따르면 인민군 치하 3개월 간 부역자 검거 15만 3825명, 자수 39만 7090명으로 총 55만이 부역자 처지가 되었다. 이들과 그 가족은 이후 두고두고 연좌제의 굴레에서 고통받게 된다. 부역자 처벌에 앞장선 것은 친일민족반역자에서 애국 반공투사로 변신한 김창룡, 원용덕, 노덕술 같은 이들이었다.
집권층은 한국 전쟁에서 적들이 물러간 후 부역자 처벌에만 열을 올렸지 정작 전쟁에 책임을 지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그의 큰 아들을 한국 전쟁에 참전시켰다 잃었다. 그 아들의 무덤은 북한에 있는데 수만의 중국병사들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는데 그 아들만 귀환시킬 수 없단 이유였다. 또한 미국장성의 아들 중 한국전에 참전한 자는 145명으로 이들 중 무려 35명이 전사했다. 어떤 특권도 없었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전쟁 당시 대한민국 장관이나 국회의원, 고위 장성의 참전하여 군인으로 아들이 사망했다는 이렇다할 자료는 없다.
2. 간첩 사건
독재정권은 정당성이 없기에 태생적으로 취약하며 자주 흔들린다. 그 때마다 전가의 보도로 휘두른 것이 반공몰이였고 그 수단이 간첩 조작 사건이었다. 한국 전쟁 이후 방첩당국이 적발한 간첩은 무려 4500명이다.
한국전쟁 이후 실제 대남 간첩은 많았다. 북한의 직파 간첩은 1950년대 90.9%, 1960년대 75.9%, 1970년대 42.1%, 1980년대 27.9%로 해가 갈수록 줄어들었지만 전쟁 직후엔 상당히 많았다. 1970년 이후에는 간첩의 수는 상당히 줄었는데 여기엔 이유가 있다. 1950년대만 해도 국경은 허술했고, 남북한의 차이가 그다지 심하지 않고 지역마다 피란민과 다른 지역의 사람이 섞여 외부인이 쉽사리 의심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970년대가 달라지면 상황은 상당히 달라진다. 남북한의 차이가 책으로 배우기 어려울 만큼 커졌고, 지역사회는 안정되어 외부인은 쉽게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간첩은 교육엔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이렇게 쉽게 적발이 되며 그 효율성은 떨어져갔다. 북한이 간첩을 줄이게 된 이유로 보인다.
하지만 남한의 상황은 반대였다. 1950-60년대 대량이 남파간첩이 들어서며 방첩조직은 크게 비대화하였다. 이들은 조직의 유지를 위해 간첩이 필요했으며 정권은 안정을 위해 간첩이 필요했다. 양쪽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주요 시국마다 간첩사건은 조작된다. 1950-60년대의 간첩은 진짜 간첩이었던 반면 1970-80년대가 되자 간첩은 재일동포나 납북어부, 월북자 가족등의 조작하기 쉬운 사회적 약자가 간첩이 된다. 1990년대에는 통일운동에 관심이 많은 운동권 출신 그리고 이후에는 탈북자가 간첩 조작의 대상이 된다.
간첩조작 사건에는 검사와 경찰, 사법부의 협조가 잇따랐다. 일반형사사건은 경찰10일 검찰은 20일 수사가 가능하다. 하지만 간첩사건에는 내란죄나 외환죄에도 없는 특별형사소송규정이 국보법에 적용되어 경찰이나 안기부 20일 검찰30-50일 합법 구금이 가능했고 이 기간 고문이 자행되었다. 그들은 이렇게 상당기간 구금하고 실제로는 서류를 합법적으로 조작했다.
또한 비밀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부분의 간첩은 누구나 아는 사회적 사안을 누설한 거승로 기밀누설죄를 적용받았는데 1997년에서야 헌재가 비공지성과 실질비성을 갖춰야 한다고 엄격히 규정하기 전까지 비밀을 이현령비현령수준이었다. 경부고속도로가 4차선이라더라 짜장면이 싸고 맛있다라는 말까지 기밀이었다.
고문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마치 중세의 마녀사냥처럼 간첩사건에서는 자백이 증거의 왕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간첩사건은 재일동포 관련 경우 외국과 관련이 있었는데 이 경우 영사의 증명이 또 다른 증거의 왕이었다. 영사는 형사 업무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음에도 희안하게 그러했다. 당시의 법관들은 이 모든 정황을 직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지만 그들 역시 검찰의 무리한 수사와 증거미비에도 많은 억울한 이들을 간첩으로 판결했다.
3. 진보적인 제헌헌법
남한의 제헌헌법은 지금의 관점에서 봐도 매우 진보적이다. 제헌헌법 18조는 노동자의 권리규정이다. 기존의 노동 3법외에도 4번째 권리로 이익 균점의 권리를 보장했다. 이는 기업 운영이 이득을 기업인 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나눠야 한다는 규정이다.
이렇게 진보적인 제헌헌법은 당시 좌파나 중도층이 만든 것이 아닌 이승만을 비롯한 보수 우경세력이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것이다. 제헌헌법 84조는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저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 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한다. 경제적 자유는 위의 이념실현을 위해 제한되는 것이었다. 제헌헌법 85조는 광물, 기타 중요한 지하, 수산자원, 수력과 경제상 이용할 수 있는 자연력을 국유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87조는 중요하나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가스 및 공공서을 가진 기업은 공영이나 국유로 한다는 규정이다. 이는 사실상 국가사회주의를 표방한 것이다.
여기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있다. 일단 광복 당시 한반도 내의 사업시설을 포함한 자본의 94%가 일제가 남긴 적산이었다. 이를 특정 집단이나 기업에 불하하는 것은 민중의 적대감을 유발하는 것이었고 마땅히 조선 사람 전체의 소유가 되어야 했다. 다음은 당시만 해도 한국이 농업국가로 자본이나 기득계층이 이렇다할 산업 기반이 없었기에 대부분의 산업이 국유화되어야 그들이 마땅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는 점이다. 마지막은 북한의 상황이다. 북한은 남한보다 먼저 더 강한 토기개혁에 앞장섰다. 그렇기에 남한에서도 지주 계층의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체제유지를 위해 강제 토지수용을 통한 토지개혁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4. 전시작전권
한국 전쟁이 끝난지 70년이 넘었고 한국의 국력과 국방력이 세계적 수준에 올랐음에도 여전히 한국의 전시작전권은 미군에 있다. 그래서 수도방위사령부 정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부대가 한미연합사령부의 통제를 받는다.
한국이 작전권의 통제를 받은 것은 광복군 때부터다. 당시 광복군은 중국에서 활동하며 중국의 제약과 지원을 받았다. 중국정부는 이른 바 한국광복군 9개 행동준승을 제정하여 광복군에 중국군사위원회의 통할, 지위를 받으며 임시정부가 아닌 중국 최고 통수부의 유일한 군령을 받아야 한다고 통보한다. 임시정부는 궁색한 상황에 이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으나 강한 내부 반발에 부딪힌다. 그리고 3년에 걸친 교섭 끝에 중국 정부는 1944년 9월 마침내 9개 준승 폐기를 결정한다.
전작권 이양 논의는 베트남 전쟁에서도 있었다. 당시 파월 사령관이었던 채명신은 베트남 전쟁이 패배할 전쟁이란 직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한국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미국의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전 지휘권을 강하게 요구한다. 당시 한국군 이외의 다른 우방국이 작전권이 있었기에 한국이 미국의 용병부대라고 국제적 비난을 받는 상황이었고, 심지어 남베트남군조자 작전권이 있었기에 이런 요구가 관철될 수 있었다.
주월군이 작전권을 획득하자 한국군도 전작권을 요구한다. 특히 한국의 전작권은 한국 전쟁 당시 국회비준 조차 없이 이승만의 편지 한장으로 이양된 상태였기에 법적 문제도 있었다. 1976년 미국의 카터가 당선되자 주한미군 철수가 가시화 한다. 중공이 유엔 상임이사국이 되자 평화분위기가 조성되며 미군은 한국에 더 이상 유엔사령부를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대신 설치된 것이 한미연합사령부다.
전시작전권은 미 오마바 정부 때 양도받는 것이 시대적 상황이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이를 포기했고, 이제는 미중 갈등이 장기화하며 시대적으로 양도받기 어려운 상황이 도래하고 말았다. 이번 윤석렬의 친위 쿠데타에서 미국은 자신들에게 사전통지 않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상한 상황이다. 비록 불법적 반란이긴 하나 이것이 다른 나라에 미리 보고하고 간섭까지 당할 상황일까. 미국이 이렇게 대놓고 짜증을 낼 수 있는 이유는 전작권때문이다. 한국군의 움직임은 전작권이 미국에 있기에 그들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한국보수는 박근혜 탄핵 때 결국 그 강을 건너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탄핵 동조세력과 탄핵 반대 세력 중 결과적으로 살아남은 것은 탄핵 반대세력이었다. 이 때 한국보수는 체질개선을 하지 못했고 그것이 이어져 지금의 비극으로 이어졌단 생각이다 이번에도 대통령 탄핵을 두고 보수는 갈라질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보수 지지층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이번엔 올바른 보수 세력을 택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