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유효한 필독의 서
1.
명불허전이다.
오래전 일월서각 발간, 김자동 선생 번역의 <한국전쟁의 기원>을 구입해 두었음에도 수십년 간 읽다가 그만두기를 반복하고 끝내 완독하지 못한 채 한국전쟁에 관한 다른 책들을 읽어왔다.
조지프 굴든의 <한국전쟁>(김쾌상 역, 일월서각 1982), I. F. 스톤의 <한국전쟁비사>(백외경 옮김, 신학문사 1988),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2.>(나남출판, 1996), 와다 하루키의 <한국전쟁>(창비, 1999), 정병준의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돌베개, 2006), 데이비드 헬버스탬의 <콜디스트 윈터 -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정윤미 옮김, 살림 2009) 등이다.
2.
최근 이 책이 완역되었다는 광고를 보고 생일선물로 요청해 전권(세권)을 득템한 후 지난 무더운 여름기간 중 이 책 1권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70여 전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45 ~ 1947년까지의 한반도 상황이 매우 입체적이고 구체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혼돈의 해방정국이 눈앞에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각이 들 정도로 책의 내용이 풍부하고 사실적이다. 한국전쟁 당시 노획한 북한 문서를 처음 사료로 이용하여 책의 깊이와 수준을 최고 수준으로 높인 것으로 유명하다.
3.
1권은 식민지 시대의 일제 통치상황, 지주와 소작농의 실태, 해방 후의 한반도 상황, 미군의 진주, 남한의 9월 총파업과 10월봉기 등 긴박하고 앞을 알 수 없는 혼돈 속의 한반도를 다각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4.
한국전쟁의 간결한 진행상황이나 전체적인 조망을 바라는 독자에게는 이 책이 부족한 것으로 비칠지 모르겠다.
그러나 1950년 김일성이 남한을 침공해 3년간의 참혹한 공방전 끝에 휴전으로 어정쩡한 마무리를 지은 단순한 전쟁의 스토리가 아닌, 전쟁이 발발하게 된 좀 더 넓고 복잡한 먼 인과관계 즉 원인(遠因)을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게는 이만한 책이 없다고 생각된다.
5.
예전 일월서각판에 비해 책의 만듦새가 훨씬 뛰어나고 가독성도 매우 높다.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김범씨와 (시장성이 없는) 이런 훌륭한 책을 출간한 글항아리에 감사드린다.
6.
너무도 긴박하게 진행되는 책 내용에 손에 땀을 쥐고 책을 읽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은 이후 소련문서가 공개되면서 많은 부분 비판받고 극복된 부분이 없지 않지만 이 책은 아직도 전쟁이 완전히 종식되지 않은 한반도에 사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의미 있고 유효한 책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