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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dakh1님의 서재
  • 한중록
  • 혜경궁 홍씨
  • 16,200원 (10%900)
  • 2009-11-25
  • : 160
한중록은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영의정 홍봉한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쓴 글로 남편인 사도 세자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한 많은 일생을 자서전적인 것이다. 세자빈이라는 높은 신분의 인물이 쓴 글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가치를 지니고 있고 궁중 문학의 효시로도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

영조는 장희빈의 계략에 빠져 인현 왕후를 버렸던 숙종의 아들이다. 영조를 보필해 왕위로 올린 것이 노론인데, 사도세자는 노론을 싫어했다. 노론과 사도세자의 대립이 커지자 소론이 사도 세자의 편에 들면서 노론을 감싸주는 영조와 소론의 힘을 받은 사도세자의 권력 다툼으로 비회되고 만다. 노론의 대표가 바로 혜경궁 홍씨 집안이다. 영의정이었던 혜경궁의 아버지 홍봉한에게 노론을 적대시하는 사도세자는 사위기 전에 정치적 적군으로 제거 해야하는 대상이었다. 해서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친정과 노론을 보호하기 위해 한중록을 썼다. 정조에게 무너진 친정을 복원하기 위해 닦달을 하지만 그가 죽자 손자인 순조에게 네 아이가 내 친정을 복원해주기로 했다는 증거물로 한중록을 창작해냈다고 한다. 결국 손자 순조 대에 친정이 복원된다.

그러니 사실 이 책은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쓰여졌다는 것이 정설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잘은 모르겠으나, 역사적 사료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도세자가 뒤주속에 죽었다는 것은 한중록의 기록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그정도로 사도세자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없었다는 것.

사실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으나,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태도는 자식에게 이상심리와 정신병력을 물려줄 정도의 것이었을 것만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것이 바로 영조의 신분 컴플렉스에 의한 것임도 맞고. 조선은 종모법, 그러니까 엄마의 신분을 따르는 신분제 사회였는데, 무수리의 아들이었던 영조는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로부터 한을 풀고 싶었던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헌데 왕가의 자손으로서의 뛰어난 역량을 보이지 못했던 사도세자가 마음에 들지 않자, 그에게 강압적으로 대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들은 한중록은 잘 담고 있다.

*책 속의 말말!
1. 부자 성품이 다르셔서 영조께서는 인자하고 똑똑하고 도리에 밝으셨고, 경모궁은 말이 없었으며 행동이 민첩하지 못하셨다. 보통 때 물으시는 말씀이라도 머뭇거리며 대답하여 영조 대왕께서는 늘 갑갑해하셨다. 영조 대왕께서는 이럴수록 가까이 두시고 친히 가르쳐 서로 간의 정을 쌓으실 방법을 생각지 않으시고 꾸지람이 사랑보다 앞섰다. 내가 궐에 들어와 보니 왕세사조 영조 대왕께 친근함 보다는 어려움이 앞선 열 살 먹은 어린아이였으나 감히 마주 앉지 못하고 신하처럼 업드려 뵙는 것을 보고 어찌 그리 과하신가 싶었다. 그러더니 을축년 왕세자가 야단스럽게 날뛰며 노는 것이 예사롭지 않고 병이 드시는 듯하였다. 점을 쳐 보니 저승전에 있는 귀신의 농간이라 하였다. 신께 제사를 지내고 경을 읽어도 낫지 않아 저승전을 떠나 융경헌으로 옮기고 나는 집복헌으로 가서 지냈다. 선희궁께서도 자주 오시고 성품이 어질고 공손한 화평 옹주도 오빠를 귀히 여기고 친히 지내셨다. 화평 옹주가 오래 사셨다면 얼마나 든든햇을까.

2. 무진년 유월 화평 옹주가 돌아가시는 큰 일이 생겼다. 각별히 귀여워하던 따님을 잃고 영조 대왕과 선희궁은 몸을 버리실 듯이 애통해하시며 미터 아드님도 돌보지 못했다. 그 사이에 아드님은 활을 쏘고 칼을 쓰며 그림을 그리며 학문을 닦는 일은 멀리하였다. 영조 대왕은 그런 경모궁을 조용하게 친근히 앉혀 가르치시는 게 아니라 신하들이 모인 때에 흉을 보고 세자의 뜻을 다그쳐 물으시곤 했다.

3. 영조 대왕은 뛰어난 왕이었다. 효심이 지극하고 하늘을 받들고 백성을 사랑하며 성덕이 뛰어나셔서 역대의 그 어느 임금과도 비할 수 없었다. 다만 경종 원년에 왕위 계승문제로 큰 사건을 지내고 그에 대한 불만으로 이인좌의 반란을 겪으며 마음의 병을 얻으신듯했다. 말씀할 때에도 죽을 사와 돌아갈 귀자를 입밖에 내지 않고 불길한 말을 주고받거나 들으면 양치질을 하시고 귀를 씻으셨다. 좋은 일을 할 때와 좋지 않은 일을 할 때 드나드는 문이 다르고 사랑하는 사람의 집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다니지 못하게 하셨다. 그런데 화평 옹주가 오실 떄는 옷을 갈아입고 보시며 왕세자를 뵐 때는 일을 보셨을 때 입으신 옷 그대로 입으신 채 보셨다. 대답을 들으면 귀를 그 자리에서 씻으시니 선희궁께서도 임금의 사랑이 공평하지 않는 것을 서러워하셨다.

4. 화평 옹주가 돌아가시고 영조 대왕께서는 왕세자에게 나랏일을 대신 보게 하셨다. 그러나 이리하면 이라한다 꾸중하고, 저리하면 저리한다 꾸중하셨다. ˝그만한 일을 혼자 결단치 못하고 내게 번거롭게 물어보니, 일을 맡기는 보람이 없도다.˝ ˝내게 물어보지는 않고 왜 감히 스스로 결정을 내리느냐?˝ 심지어는 백성이 춥고 굶주릴 때나 가뭄이 들고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꾸중하셨다. ˝세자의 덕이 없어서 그렇다,˝ 한 번 꾸중에 놀라고 두 번 격노에 겁내시어 아무리 장한 기품이라 한들 한 가지라도 자유롭게 하지 못하였다. 또한 영조 대왕께서는 호화로운 행사를 구경하실 때는 왕세자를 부르시지 않고 동지섣달 사형받는 죄인을 볼 떄나 옆에 불러 앉히시니 어찌 아드님 마음이 편하며 서럽지 않을까. 왕세자께서는 병이 도지면 딴사람 같아 도교의 경문인 옥추경을 읽고는 뇌성보화천존이 보인다고 무서워하셨다. 천둥이 치면 귀를 막고 엎드리며 깜짝깜짝 놀라며 자주 신음하고 몸도 잘 쓰지 못하게 되었다. 병자년 오월 영조께서는 승문당에서 신하들을 만나고 갑자기 낙선당에 오셨다. 세수도 하지 않고 옷도 단정치 못한 왕세자를 보시고 화를 내셨다.

5. 영조대왕꼐서는 왕세자를 부르시고 사람 죽인 일을 바로 대는가 보려 꾸짖으셨다.
˝울화가 치밀면 견디지 못하고 사람을 죽이거나 닭 같은 짐승을 죽여야만 마음이 풀립니다.˝
˝어째서 그러느냐?˝
˝마임이 상하여 그럽니다.˝
˝어찌하여 상하느냐?˝
˝저를 사랑하지 않으시기에 서럽고, 꾸중하시므로 무서워 화가 되니 그러하옵니다.˝
그말을 들은 영조 대왕께서는 잠시 정이 통하셨는지 측은한 마음이 드셨는지 노여움을 가라앉히시고 말씀하셨다.
˝내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으마.˝ 부자간에 그런 말씀은 처음이었다. 나는 하도 뜻밖이라 몹시 기쁘고 감격하여 물며 아뢰었다.
˝은혜를 내리시면 그렇지 않을 것이빈다.˝ 그러나 하늘이 두 분 사이를 멀게 하시니 아버님께서는 이러지 말자 하시다가도 다시 노한 마음이 생기시고, 아드님은 아버지를 뵐때마다 속이는 일 없이 잘못을 다 아뢰었다. 이는 타고난 천성이 착하기 때문이었다.

6. 경모궁은 옷을 입지 못했다. 옷을 한 번 입히려 이삼십 벌이나 해놓으면 귀신인지 무엇인지한테 바치기라도 하는 듯 불사르기도 했다. 한번 순하게 갈아입으시면 당신도 다행으로 여겨 입으시고 더렵혀질 때까지 입으셨으니 그 무슨 병인가.

7. 경모궁은 정성왕후와 인원왕후의 소상을 차례로 지내고 홍릉에 참배를 못하다가 임금님을 모시고 따라가셨다. 그때 큰 비가 쏟아지자 영조께서는 아드님을 데려온 탓이라며 쫓아 돌려보내셨으니 기분이 어떠셨겠는가. ˝점점 살길이 없다.˝ 왕세자가 이렇게 말하며 옷을 못 입는 증세가 더 심해져 안타까웠다. 비단 옷 한 벌을 입으시려면 몇 벌을 이어서 불사르고 겨우 한 벌을 입으셨으니, 없앤 비단이 몇 궤짝인지 모른다.

8. 왕세자의 병환도 어쩔 도리가 없었으며 영조 대왕의 처분은 부득이하신 일이었다. 뒤주는 영조 대오앙 스스로 생각하신 것이다. 나나 영조대왕의 고통은 스스로의 고통이다. 슬픔 중에도 세손만은 보전하여 나라를 길게 지탱하신 임금님의 은혜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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