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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내 인생 최고의 사치
  • 82년생 김지영
  • 조남주
  • 12,600원 (10%700)
  • 2016-10-14
  • : 94,845

책을 덮고나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소설 속 김지영 씨가 낯설지가 않아서.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일해왔고, 꿈꿔왔지만 맘충으로 전락해버린 우리들의 이야기이자 내 이야기인 것 같아서 말이다.


“사람들이 나보고 맘충이래.”

김지영 씨의 대답에 정대현 씨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댓글 다 초딩들이 쓴 거야. 그런 말 인터넷에나 나오지 실제로 쓰는 사람 없어. 아무도 그런 생각 안 해.”

“아니야. 아까 내가 직접 들었어. 저기 길 건너 공원에서 서른쯤 된 양복 입고 회사 다니는 멀쩡한 남자들이 그랬어."

김지영 씨는 낮에 있었던 일들을 남편에게 얘기했다. 그때는 그저 당황스럽고 수치스럽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다시 상황을 복기하고 있으려니 얼굴이 달아오르고 손이 떨렸다.

"그 커피 1500원이었어. 그 사람들도 같은 커피 마셨으니까 얼만지 알았을 거야. 오빠, 나 1500원짜리 커피 한잔 마실 자격도 없어? 아니, 1500원이 아니라 1500만 원이라도 그래. 내 남편이 번 돈으로 내가 뭘 사든 그건 우리 가족 일이잖아. 내가 오빠 돈을 훔친 것도 아니잖아.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

(164-165쪽)


김지영씨에게 이상 증세가 나타난 건 2015년 가을부터였다. 남편 정대현 씨와 대화를 하던 중 그녀가 장모님 말투와 표정을 흉내내 말을 했던 것이다. 마치 빙의한 것처럼.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그녀는 대학 동아리 선배 흉내를 내더니 급기야 추석 날 시댁 어른들 앞에서 장모에 빙의해 사단을 냈다. "사돈 어른, 외람되지만 제가 한 말씀 올릴게요. 그 집만 가족인가요? 저희도 가족이에요. 저희 집 삼 남매도 명절 아니면 다 같이 얼굴 볼 시간 없어요. 그 댁 따님이 집에 오면, 저희 딸은 저희 집으로 보내주셔야죠.(18쪽)" 정대현 씨는 그 길로 정신과에 찾아갔고 김지영 씨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82년생 김지영. 흔하디 흔한 이름을 가진 소설 속 주인공 김지영의 이야기는 이름처럼이나 82년 즈음을 살아갔던 여자들과 비슷한 삶을 살았다. 어릴 적에는 아들타령이 심한 할머니 아래 태어나 막내 남동생에게 늘 좋은 음식, 새옷, 방까지 양보하며 살았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한 반에 50명이 넘는 교실 안에서 빡빡한 복장규정과 채벌, 교육을 빙자한 성희롱이 가득한 교육을 받았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학점과 토익에 몸받쳤지만 신나게 놀던 남자 동기들이 대기업에 줄줄이 들어가는 것을 바라만 보다 중소기업에 겨우 취직한다. 회사에 들어가서는 왜 윗선에는 여자들이 없나 의아했지만 열심히 하면 되겠지 밤새 일하고 주요 프로젝트는 남자 동기들에게 빼앗긴다. 결혼을 해서는 같이 일하지만 집안일과 양가부모를 챙기는 건 오롯이 김지영 씨 몫이되었고, 남의 가족계획에 관심이 많은 시댁의 성화에 애를 낳아 육아까지 떠맡게 되었다. 아이를 돌보는 문제가 나오자 "많이 도와줄게"라며 마치 자기 일은 아니지만 도와는 줄 수 있다는 듯 선심쓰는 남편의 회유에 결국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 


집안일에 아이 뒷바라지까지 하며 몇 년을 보내자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아이스크림집 알바라 그거라도 시작하려고 남편에게 이야기 했다가 "하고 싶은 일이야?"라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듣고선 포기했다.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리고 나오던 어느 날, 30년을 열심히 살아온 내가 이제 집안일이나 아이 키우는 것 말고는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간만에 아메리카노를 한잔 사 마시고 앉아 있는데 직장인들로 보이는 남자들에게 "나도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커피나 마시면서 돌아다니고 싶다. 맘충 팔자가 상팔자야"라는 말을 듣고 김지영 씨는 간신히 버텨오던 모든 힘을 놓아버리고 만다. 


"그래서 오빠가 잃는 건 뭔대?"

"응?"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라며. 나는 지금의 젊음도, 건강도, 직장, 동료, 친구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도, 계획도, 미래도 다 잃을지 몰라. 그래서 자꾸 잃는 걸 생각하게 돼. 근데 오빠는 뭘 잃게 돼?"

(136-137쪽)


<82년생 김지영>은 여느 소설과 같은 극적인 요소도, 엄청난 이야기도, 심각한 갈등도 없다. 그저 82년에 여자로 태어나 2016년까지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를 각종 통계와 문헌을 기반으로 재구성해 들려줄 뿐이다. 그런데도 이 소설은 그 어떤 소설보다 더 흥미롭고 공감가며, 맘충으로 전락해버린 그녀의 삶이 가슴 저미게 아프다. 


여성이 아니라면 포착하지 못했을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는 폭력을 포착해낸 것도 인상적이다. 바바리맨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고 단체 기합에 반성문을 쓴 일진은 "벗은 새끼가 잘못이지 우리가 잘못이야? 뭘 반성하라고. 내가 벗었어?"라고 외치고, 면접에서 거래처 상사가 신체 접촉을 하면 뭐라고 대처할거냐는 질문에 "제 옷차림이나 태도에 문제가 없는지 돌아보겠습니다"라며 피해자가 되려 자신의 잘못을 찾는다. 딸을 낳은 며느리에게 "괜찮다"라고 위로하는 시어머니는 아무 잘못없는 내 딸을 태어나기도 전에 죄인으로 만들어버리고, 남편은 결혼 전과 달리 육아와 집안일을 아주 자연스럽게 '도와주는 것'으로 정의해버리며 자기 일을 떠넘겨 버린다. 


어린시절 김지영 씨는 엄마에게 "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았냐"고 묻고, 취직을 해서는 "왜 여자에게 기회를 주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김지영 씨는 맘충으로 전락한 후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엄마는 할 수 없어서 못했고, 회사는 많은 여성들의 출산 이후의 삶을 봐 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 소설은 김지영 씨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또 다른 김지영의 이야기이자, 우리들의 이야기이자, 나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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