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의 밤, 또 한 여성의 질.
나는 낯선 여성의 다리 사이에서 밤을 지새우는 일에 익숙하다. 열두 시간 동안 일면식도 없는 두세 명의 여성들과 차례로 한 공간에서 함께 보낼 때도 있다.
11쪽 중에서
산부인과는 참 묘한 공간이다. 생명의 탄생이라는 그 무엇보다 고귀한 감정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 어떤 고통도 비교할 수 없는 산고의 고통이 존재하는 끔찍한 공간이기도 하다. 새생명을 품에 안은 기쁨의 눈물도 있지만, 아픔을 견뎌야하는 고통의 눈물도 있다. 세상에 태어났음을 알리는 아가의 힘찬 비명소리도 있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통에 신음하는 아픔의 비명소리도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옆에서 안내하고, 지켜봐주는 존재가 있다. 바로 조산사.
출산을 하고나서야 비로소 안 사실이지만 산부인과에서 산모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의사가 아닌 바로 조산사다. 의사는 최후의 순간이 되야만 비로소 만날 수 있다. 그 최후의 순간까지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조산사다. 조산사는 내가 진통을 느끼고 입원한 순간부터 분만하고 아기를 내 품에 주기까지 모든 과정을 함께 한다. 아기의 심장박동을 체크하고, 자궁문이 얼마나 열렸는가를 확인하며, 내 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모든 굴욕적인 것들을 일상인듯 아무렇지 않게 치워준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애처로운 내 고통의 신음소리까지 듣는다. "괜찮아요.", "거의 다 왔어요.", "할 수 있어요.", "조금만 더 참으면 돼요" 등과 같은 진심어린 응원의 말까지 해주면서 말이다.

조산사의 세계를 그린 책 <힘주세요!>는 영국에서 조산사로 일하는 리저 해저드가 쓴 에세이다. 새생명을 받는 고귀한 일이라는 포장 뒤에 숨겨진 12시간 교대 근무와 그로인한 과로, 매 순간이 새로운 시도인듯 산모와 아이에게 닥칠지 모르는 위험 앞에서 긴장해야하는 극한의 스트레스, 그럼에도 산모와 아이를 모두 안전하게 돕고자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는 조산사의 세계를 생동감있게 그려냈다.
그 안에는 약물 중독 임산부, 레즈비언 부부, 열다섯 미성년자 임산부, 23주에 양수가 터져 생명의 기로에 놓인 아기를 품고 온 임산부까지 다양한 산모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출산의 다이나믹함은 물론 산후에 벌어지는 이야기인모유 수유를 둘러싼 대립, 산후 우울증 등에 관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무궁무진한 출산 세계의 일들과 그 뒤에서 모든 것을 묵묵히 돕고 있는 조산사들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책의 마지막에 이런 말이 있다.
"그럼에도 매일 대도시의 병원과 지방의 작은 출산 센터에서, 진료소와 병동에서 다양한 연령과 경력을 가진 조산사들이 푸른색 연기가 되어 증발한다. 너무 많은 조산사들이 스트레스와 피로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지지만, 다행히도 이들이 떠난 자리에는 수천 개의 더 많은 군대가 남아 있다.(360쪽)"
내가 두 아이를 출산했던 산부인과도 최근 조산사를 구하지 못해 결국 분만을 하지 않기로 했다. 순간 내가 둘째를 낳았을 때, 마지막까지 "할 수 있어요, 엄마"를 외쳐주고 병실로 올라가기 전에 "고생 많이 했어요"라고 말해주던 조산사 선생님이 생각났다. 그녀는 태어난지 24시간도 안 되어 응급실로 간 둘째 소식을 듣고 내게 와서 말없이 손을 꼭 잡아주며 "별일 아닐거에요. 엄마가 힘내야 해요"라며 같이 눈시울을 붉혀줬던 따뜻한 사람이었다.
내가 제대로된 감사 인사도 못한 그녀도 아마 엄청난 스트레스와 피로 속에서 일했을 터였다. 그날 내가 그 누구보다도 그녀에게 의지했고, 지금도 가끔씩 그녀의 얼굴과 따뜻했던 손을 떠올린다는 걸 그녀는 알기나 할까? 너무나 고마운 사람들, 그들이 있기에 우리는 안전한 출산을 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