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7) 언젠가는 에드워드 새처에게 이런 식으로 힘껏 달려 들어 그놈이 멱딴 돼지처럼 피를 철철 흘리도록 만들 거야. 버몬트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걷어차 버리고 말 거라고. 셰이커 교인을 놀리면 안 된다는 사실을 따끔하게 가르쳐 줄거야. 러닝 읍내에서 다시는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게 만들 거다. 반드시.
주인공 로버트가 에드워드 새처에게 어떻게 복수를 할지 내심 기대했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나를 끌고가는 단어가 생겼다. 꽤 묵직했다.
‘셰이커’ 각주에는 ‘공동생활을 강조하는 미국 기독교의 일파’로 되어 있지만 초록 검색창의 결과를 훑어보며 “노동ㆍ신앙ㆍ삶이 일체가 된 삶을 추구하며 근면과 절약의 생활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일파”로 정리할 수 있었다.
(p.49)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네 엄마나 이모, 네 누이들, 그리고 너와 나 우리 모두는 검소하게 살아야 하는 기독교인이야. 우리는 셰이커 교본대로 살고 있잖니. 속세에 찌든 사람들이 아니라고. 그래서 세속적인 갈망이나 욕심 때문에 고통받지 않아. 그런 것 때문에 속상하진 않단다. 나는 부자야. 가난한 건 그 사람들이지.“
글을 읽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셰이커 교본에 기록된 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이러한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빠의 모습에 로버트가 의구심을 내비치는 장면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빠의 죽음을 통해 로버트도 결국 그러한 삶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다.
- 로버트 자신도 셰이커 교인으로서의 삶을 살기로 선택한 것일까?
로버트가 13살이 되었기 때문일까?
이 모두가 아니라면,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까?
태너 아저씨는 농장을 통해 동물들의 탄생을 관장하는 역할을 하며 부, 명예, 여우, 미래를 말하는 반면 로버트의 아빠 헤븐 펙은 도살장에서 동물들의 죽음을 이끄는 대척점에 위치하며 죽음과 의무, 책임에 대해 말한다.
- 무엇이 더 나은 삶인가? 이러한 질문에 나는 적확한 기준을 갖고 대답할 수 있는가?
우리의 생활에서 너무나도 익숙한 동물들의 죽음이 묘사되었다. 누군가는 그러한 묘사를 통해 동물권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삶과 죽음을 분리해서 혹은 대척점에서 두고 생각 할 수 있는가’를 조금 더 깊게 고민해 보고 싶었다.
- ‘우리는 죽음을 생각할 때 비로소 삶을 바라보게 된다’는 누군가의 말은 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묘사되고 있는 집동물들 길들이기 방법에도 적용될 수 있는가?
(p.177) 마지막으로 클레이 샌더 사장님이 아빠랑 일하던 동료들과 함께 찾아왔다. 그날 하루만큼은 모두들 일손을 놓았다.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은 날이었다.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은 날은 아빠의 장례식 날이었다. 로버트에게는 아빠의 죽음이지만 다른 존재에게는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도살꾼의 죽음이었다. 어느 위치에서 바라보느냐(해석하느냐)에 따라 문제는 새롭게 인식되기도 한다. 로버트가 기말고사 성적표를 받아온 날에도 엄마와 캐리이모는 ‘수’라는 글자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칭찬을 해 주었지만 매티 이모는 ‘양’밖에 읽을 줄 몰랐기 때문에 ‘수’라는 글자가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었다.
- 지금 내가 보는 것은 본질을 정확히 보고 있는 것이 맞는가? 나는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하며 로버트를 다시 생각했다.
-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은 날인가?
아빠의 장례식 날인가?
내가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하는 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