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작가의 소설은 이상할 만큼 오래 남는다. 읽는 동안에는 피식 웃게 만드는 장면이 많은데, 책을 덮고 나면 그 웃음이 어느새 서늘한 질문으로 바뀌어 있다. 『쥬디 할머니』 역시 그랬다. 수록된 작품들은 모두 다른 시대와 다른 인물을 그리고 있지만, 결국 한 가지 질문으로 모인다. 우리가 평온하다고 믿는 일상은 얼마나 쉽게 균열을 드러내는가.
이번 단편집에서 특히 오래 마음에 남은 작품은 표제작 「쥬디 할머니」와 「애보기가 쉽다고?」, 「부처님 근처」였다. 세 작품은 노년, 돌봄, 전쟁이라는 서로 다른 소재를 다루지만, 모두 평범한 삶 속에 숨어 있는 외로움과 상처를 들춰낸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표제작 「쥬디 할머니」는 처음에는 조금 우스꽝스럽다. 미국에 사는 손녀의 사진을 크게 걸어두고, 세련된 노년을 연출하려 애쓰는 할머니의 모습은 허영심 많은 인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그 허영은 외로움을 감추기 위한 마지막 울타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식이 보고 싶어 일부러라도 앓아눕고 싶다는 고백은 웃음을 단숨에 멈추게 만든다. 특히 외국식 이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세태를 비틀며 보여주는 풍자는 지금의 SNS 문화와도 묘하게 겹쳐 보였다. 보여지는 삶을 애써 꾸미는 사람들의 모습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지는 「애보기가 쉽다고?」는 은퇴 후 손주를 돌보게 된 한 남성을 통해 돌봄 노동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던 사람이 가족 안에서는 너무도 쉽게 '아이 보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과정은 웃기면서도 씁쓸하다. 육아를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처럼 여기지만, 그 노동을 떠맡은 사람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진다. 박완서는 그 과정을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려내면서도 가족 안에서조차 돌봄이 얼마나 쉽게 당연한 희생으로 소비되는지를 날카롭게 짚어낸다.
세 작품 가운데 가장 깊은 여운을 남긴 것은 「부처님 근처」였다. 전쟁이 남긴 상처를 다루지만 거창한 비극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초값을 흥정하고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슬픔 역시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시간을 보여준다. 특히 세월이 흐르며 상처를 기억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현실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은 오래 마음을 붙들었다. 잊는다는 것이 반드시 치유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박완서 작가는 조용하지만 강한 문장으로 들려준다.
세 작품을 함께 읽으며 느낀 것은 박완서 작가가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의 균형감이었다. 그는 인물을 쉽게 미화하지도, 그렇다고 냉정하게 재단하지도 않는다. 허영도 보여주고, 속물적인 모습도 드러내며, 때로는 이기적인 마음까지 숨기지 않는다. 그런데도 독자는 끝내 그들을 미워할 수 없다. 누구나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이 작품들이 수십 년 전에 발표되었다는 사실이다. 노년의 외로움, 가족 안에서의 돌봄, 시대가 남긴 상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마음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쥬디 할머니』는 오래된 작품집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을 비추는 이야기처럼 읽혔다.
박완서 작가는 독자에게 정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인물들의 민낯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스스로 질문하게 만든다. 웃으며 읽기 시작했지만 마지막에는 마음이 묵직해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을 관찰하는 날카로운 시선과 그 안에 담긴 따뜻한 이해가 함께 살아 있는 작품. 그래서 이 단편집은 읽고 난 뒤에도 여러 날 동안 문장과 장면들이 마음속을 천천히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