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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nesa님의 서재
  • 기록이라는 세계
  • 리니
  • 15,930원 (10%880)
  • 2025-01-03
  • : 27,425

얼마 전 친구와 술자리를 가졌다. 저녁을 겸하는 자리여서 삼겹살과 소주로 메뉴를 정했는데 그날따라 삼겹살보다 쌈채소에 손이 더 많이 갔다. 친구는 그게 네 몸이 원하는 것이니 많이 먹어라는 말을 건냈다. 그날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금세 잊어버렸지만, 그 말은 계속 기억에서 맴돈다. 갈증을 느끼면 자연스럽게 물에 손이 가듯이 내가 원하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찾게 되는 경험을 한 셈이니 말이다.


최근 들어 글쓰기나 기록에 관한 책을 보면 지나치지 못하고 구해다 읽는 것도 그러한 작용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경험한 무언가를 글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뇌리에 깊이 박혀 있어 글쓰기나 기록에 관한 책에 자연스럽게 손을 뻗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니까. 그렇게 손에 잡힌 책이 리니 작가의 『기록이라는 세계』이다.


기록이 뭐 별건가요? 남기면 기록이죠.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사진으로 찍는 것도, 단어 하나로 하루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카페에서 받아온 스티커를 붙여두는 것도 기록입니다. 어떤 형태든, 어떤 내용이든 괜찮아요. 글씨가 안 예뻐도 전혀 상관없고요. 매일 쓰지 못해도 좋고 어설프게 쓴 문장이라도 충분합니다. 중요한 건 한 줄이라도 좋으니 일단 써보는 거예요. (223쪽)


『기록이라는 세계』의 에필로그의 한 문단이다. 어떤 것이라도 쓰면 기록이 된다고 하지만 기록이 별거인 것은 써본 사람은 안다. 문제풀이 연습장을 제외하고는 노트를 한 권 채워본 적이 없는 나는 더 그렇다. 이에 저자는 ‘길이’, ‘넓이’, ‘깊이’의 이렇게 3장으로 구분한 기록법 25가지를 소개한다. 짧은 메모부터 포토로그, 사람 관찰 일지, 영어 필사 등 처음 보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이 한 번 정도는 들어본 노트이다. 각각의 기록법의 소개와 함께 그런 기록의 실례가 ‘이렇게 써보세요’의 장에서 소개되어 있는 것이 좋았다. 어쨌든 따라 해보고 싶은 누군가의 노트를 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까.


한편 이렇게 기록을 하면 뭐가 좋을까란 생각이 들 수 있다. 저자는 소개하는 기록법의 많은 부분에서 기록을 하면서 나를 좀 더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는 말을 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특정일을 하면 느꼈던 특별한 감정 등이 기록을 통해 점차 나 자신에 대해서 알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조각을 할 때 조각상은 이미 그 안에 있어 대리석 덩어리에서 필요 없는 것을 제거할 뿐이라는 말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 없는 대리석을 제거하는 과정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완성된 조각상이 보이는 미켈란젤로와는 달리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은 처음부터 선명하게 보이질 않기에 부지런히 대리석을 제거하듯이 기록을 남겨 나 자신을 알아가야 할 것 같다.


나 자신을 알아가기 위한 기록이라고 하면 완벽하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다시 높은 벽이 느껴진다. 이런 점을 먼저 경험했다는 듯이 저자는 처음 ‘짧은 메모’편에 이런 조언을 한다.


기록을 대하는 태도는 삶의 태도와 많이 닮았어요. … 완벽주의 때문에 시작의 허들을 넘지 못할 때, 사실 방법은 딱 하나에요. 완벽하지 않더라도 시작해보는 거죠. (23쪽)


하루 삶을 돌아볼 때 즉흥적으로 선택을 하는 일이 그렇게나 많으면서 왜 기록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시작하려고 하는지 반성이 되는 말이다. 체계적이기도 하고 즉흥적이기도 한 삶의 모습이 그대로 기록에 녹아져 있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프랑스의 브리야 사바랭은 1825년에 쓴 미식 관련 고전 『미각의 생리학』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가 먹은 것을 말해다오. 그러면 나는 네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하지만 난 먹은 것을 듣지 않아도 어떤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을 안다. 그 사람의 기록을 보면 된다. 기록이 쌓이면 그 사람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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