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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풍의 언덕
  • 에밀리 브론테
  • 11,700원 (10%650)
  • 2005-03-15
  • : 20,955

<폭풍의 언덕>은 '폭풍이 불 때, 그 폭풍의 바람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곳' 워더링 하이츠(Wuthering Heights)에서 벌어지는 두 주인공 '히스클리프'와 '캐서린 언쇼'의 이루어질 수 없는 뜨거운 사랑과 언쇼와 린튼 가문에 대한 히스클리프의 광적인 복수를 담은 소설이다.


 본 작품의 작가는 <제인 에어>를 쓴 샬롯 브론테의 언니 에밀리 브론테이다. 1818년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그녀는 본 작품을 집필한 후 1년 뒤인 1848년 30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폭풍의 언덕>은 에밀리 브론테의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이다. 그녀가 살아있을 적엔(물론 1년밖에 안되었지만) 너무나 극단적이고 음산하고, 음울하며 광기 어린 캐릭터 묘사와 줄거리 때문에 평단에서 외면받았지만, 후세에 본 작품은 영미 3대 문학(<리어 왕>, <백경>과 함께), 세계 10대 소설(서머싯 몸이 선정하였다)로 선정되며 세계문학사의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워더링 하이츠에서 살고 있는 언쇼씨는 시내에 나갔다가 버려진 아이 '히스클리프'를 데리고 온다. 언쇼 씨는 근본도 없고 꾀죄죄한 소년 히스클리프를 극진히 키운다. 한편 언쇼 씨에겐 아들 힌들리와 딸 캐서린이 있다. 장남 힌들리는 질투심과 유산에 대한 욕심으로 히스클리프를 못살게 군다. 반면 캐서린은 거친 매력을 지닌 히스클리프에게 강하게 끌린다. 언쇼씨가 노환으로 죽고, 힌들리가 집안의 가장이 되면서 히스클리프의 입지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노골적으로 천대한다. 또한 캐서린은 드러시크로스 지역의 에드거 린튼과 교제하며 히스클리프에게 거리를 둔다. 사실 캐서린은 누구보다 히스클리프를 사랑했지만, 신분의 차이에서 오는 거리감과 귀족 에드거의 신사적인 모습에 잠시 흔들리고만 것이다. 캐서린은 갈팡질팡하며 가정부 넬리에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는데, 히스클리프는 그녀의 말을 엿듣고 캐서린이 자신보다 에드거를 더 사랑한다고 오해를 하고 만다. 깊은 배신감과 상처를 안고 폭풍이 몰아치는 새벽, 히스클리프는 워더링 하이츠를 떠난다. 히스클리프가 떠난 뒤 캐서린은 에드거와 결혼한다. 그리고 3년 뒤 어느 날 히스클리프가 돌아온다. 자신을 학대한 언쇼가와 자신을 배신한 캐서린에 대한 복수심을 떠안고. 


 <폭풍의 언덕>은 564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소설로 위의 줄거리는 소설의 3분의 1 정도 되는 내용이다. 이후 3분의 2는 히스클리프의 광기 어린 복수와 이에 맞서는 캐서린 린튼의 용기 있는(?) 사랑을 담고 있다. <폭풍의 언덕>이 지금까지도 인기를 얻는 것은 왜일까? 도대체 어떤 매력을 지니고 있길래? 나름대로 분석해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인류의 보편적인 관심사인 남녀 간의 금지된 사랑(신분제와 연관된)을 섬세한 감정묘사로 절절하게 담아냈다. 넬리에게 히스클리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 다음 장면을 보자. 


"꼭 짚어 말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당신이든 누구든 자기를 넘어선 삶이 있고, 또는 그런 삶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만약 내가 이 지상만의 것이어야 한다면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무엇일까? 이 세상에서 내게 큰 불행은 히스클리프의 불행이었어. 그리고 처음부터 나도 각자의 불행을 보고 느꼈어.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무엇보다도 생각한 것은 히스클리프 자신이었단 말이야. 만약 모든 것이 없어져도 그만 남는다면 나는 역시 살아갈 거야. 그러나 모든 것이 남고 그가 없어진다면 이 우주는 아주 서먹해질 거야. 나는 그 일부분으로 생각되지도 않을 거야. 린튼에 대한 내 사랑은 숲의 잎사귀와 같아. 겨울이 돼서 나무의 모습이 달라지듯이 세월이 흐르면 그것도 달라지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어. 그러나 히스클리프에 대한 애정은 땅 밑에 있는 영원한 바위와 같아. 눈에 보이는 기쁨의 근원은 아니더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거야. 넬리,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언제까지나,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어. 나 자신이 반드시 나의 기쁨이 아닌 것처럼 그도 그저 기쁨으로서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서 내 마음속에 있는 거야. 그러니 다신은 우리가 헤어진다는 말은 하지 마."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라고 말하는 캐서린을 보라. 약 200년이 지난 지금도 캐서린의 저 대사는 사랑에 빠진 청춘의 마음에 불을 지피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폭풍의 언덕>의 또 다른 매력은 입체적인 캐릭터에 있다. 캐서린 언쇼를 잃고 복수의 화신으로 태어난 히스클리프의 야성적인 매력은 지금껏 등장한 여느 소설 속 악한들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진정한 나쁜 남자랄까?(사실 진짜 나쁜 놈이기는 하다) 이외에도 무려 500여 쪽에 달하는 이야기를 처음 본 사내에게 털어놓는 넬리의 사람 좋음과 입담, 히스클리프에게 학대받으며 멍텅구리로 자라난 헤어튼 언쇼와 아버지의 원수 히스클리프마저 품는 캐서린 린튼의 자애로운 모습은 독자에게 절망 속에도 꽃은 피어난다는 희망을 갖게 만든다. 이외에도 워더링 하이츠의 황량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전달하는 배경 묘사와 연출 역시 본 작품을 한 단계 높은 위치에 갖다 놓는다. 


 무릇 인간은 알 수 없는 존재이다. 하나의 단어로 인간 존재를 규정할 수는 없다. 각자 자신만의 맥락을 가지고 살아간다. 다시 말해 전형적인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몇몇 소설들은 인물을 전형성에 가둬놓는다. <폭풍의 언덕>에는 전형적인 인물이 없다. 전형적인 인물이 없기에 전형적인 스토리도 없다. 혹자는 본 소설을 이렇게 평가했다. "이상화되지 않은 현실의 인간을 창조해, 선과 악에 대한 판가름이 아니라 선악이 한데 어울려 몸부림치는 인간 실존의 세계를 강렬한 필치로 그려냈다." 그렇다. 소설을 읽다 보면 도대체 왜 저 인물은 저렇게까지 할까?라고 의문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이다. 에밀리 브론테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속성을 예리하게 통찰해냈다(무려 30살에). 그렇기에 <폭풍의 언덕>은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훌륭한 작품이지만 읽기가 녹록하지 않았다. 길기도 길거니와 비슷한 이름의 다른 인물이 자꾸 나와 인물관계가 헷갈렸고, 번역투가 주는 답답함이 나를 힘들게 했다. 그럼에도 이 책을 끝까지 읽은 것은 이 책을 추천한 이에 대한 의리와 가끔씩 튀어나오는 마음을 울리는 대사들(위와 같은) 때문이다. 이는 곧 내가 소설을 끊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폭풍의 언덕>을 읽을 예비 독자들도 내가 느낀 감동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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