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의 소설집 '오래된 일기'에 수록된 9개의 단편 소설을 하나씩 읽어갈때마다, 가슴 한 켠에 통증이 느껴졌다. 과연 그 통증은 무엇이었을까.
살아가면서 나 역시 수 많은 크고 작은 결정을 내려왔다. 그리고 그 결정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과연 그 결정은 '올바른 (혹은 객관적인) 판단'으로 이루어진 결정이었을까. 아니면, 결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나의 고집이었을까.
나의 결정을 애써 합리화 시키기 위해 멀리 던져버렸던 그 '올바른 기준'은 어느새 그의 소설을 읽는 도중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기회비용'이라며 애써 치부하며 지금의 나 자신을 만들기 위해(내가 있기 위해) 비껴 왔던 (아니 애써 감춰왔거나 포기해왔던) 지난 시간들 (그리고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재연되고 있었다. 이승우의 소설은 그랬다. 내가 지내왔던 지난 날들에 말을 걸게 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지난 날들에 어떤 말을 건넬 수 있을까. 만약 "미안해. 이제는 그러지 않을께." 라고 말하며 손을 내민다면, 과거의 나는 기꺼이 지금의 나를 용서해 줄까. 아마도 이 역시 현재를 합리화 하기 위한 고결한 위선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마저도 하지 않는다면, 내게 생겨났던, 그리고 내가 지내왔던 지난 일들에 대해 너무도 무책임하게 '무슨 일이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내 행동들에 대해 무감각해져버릴 것이다. 빛바랜 일기장에 대한 현재의 고백. 어쩌면 이 고백이야 말로, 과거의, 현재의, 그리고 미래의 나를 위한 최소한의 예의 일지도 모른다.
'오래된 일기' 중 세 번째 단편, '타인의 집'에선 한 노인이 사내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자신의 생명을 조금식 떼어내서 하루씩 삶을 연명하는 거랍니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 삶을 내놓아야 하는 거지요. 그것이 인생이에요. 떼어낼 것이 없어지면 삶도 멈추는 거겠지요." 이 문장은 이승우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통증이 내 깊은 구석까지 전해지더라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 통증을 느껴야만 한다고 말한다.
무감각하지 않고 아픔을 느낀다는 것은 신경이 살아있는 자만이 할 수 있다. 비록 가슴 아픈 통증이지만,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