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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쟁이님의 서재
  • 기독교 사회주의 산책
  • 이덕주
  • 12,600원 (10%700)
  • 2011-08-31
  • : 335


 

 

이 책을 집어든 된 이유

 

'기독교 사회주의'.

왠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만났다. 이 책의 제목을 보고 꺼내서는 안될 말을 꺼내기라도 한 듯,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왜일까. 한국에서, 특히 기독교권 내에서 '사회주의'라는 말이 갖는 정서나 의미가 단순하지 않은 것 같다. '사회주의=공산주의'로 인식되는 한국 상황에서,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 보는 사회주의와 기독교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기독교인이라면 대부분 혼란스럽고 의문스러울 것이다. 더군나나 이 책의 저자는, 사회운동이나 소위 좌파적 운동에 몸담았던 운동권 출신의 지식인이 아닌, 한국 교회의 초기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신학자가, 이런 책을? 여러가지 혼란과 의문, 호기심이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사실, 사회주의에 관해선 오랫동안 관심이 있었던 터였다. 내가 사회주의를 처음 접한 것은 학부시절 서양사학입문 수업에서였는데, 당시 사회주의의 전체 지형도를 개괄적으로 다뤘었다. 그 때 '사회주의=공산주의'의 공식을 처음으로 깰 수 있었다. 과학적 사회주의(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여러 사회주의 사상의 일부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사회주의가 그리는 이상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이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면서 기독교 신앙과 어떻게 조화를 이뤄야 할 지 혼란을 느끼기도 했다. 당시 학생선교단체에서 활동했는데, 소수였지만 이런 지적 이슈와 신앙의 문제를 고민하는 선배들을 만날 수 있었다. 기초적이나마 사회주의에 관한 서적을 읽었다. 하지만 여전히 사회주의에 관해선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는 복잡한 마음이 있었다. 기독교 내의 사회참여 신학의 부재에 대한 갈증과 80년대 좌파운동에 대한 막연한 빚진 마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왜 사회주의를 이야기하나

 

그는 글의 서두에서 자신의 첫 신학적 과제로 '한국교회가 당면한 영적 위기와 권위 상실의 문제'의 이유로 '처음 사랑'을 버린 것에서 찾고, 한국 초대교회의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위와 같은 저작을 펴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어 자신의 두번째 신학적 과제로 '민족 분단과 통일의 문제'를 들며, '반공주의'로 일관한 한국 교회가 현대사의 역사적 책임에 있어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지적한다. 역사 속에서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대화와 공존을 모색한 사례들을 연구하고 그 첫 결과물로서 자신의 저작을 소개한다.

 

 

그가 말하는 기독교 사회주의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대화를 종교적 차원에서 모색하려는 것이 기독교 사회주의입니다. 개인의 자유와 창조적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함으로 인권과 생산성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자점, 그리고 인간 사회에 피할 수 없는 소득 격차와 경제적 불균형을 제도적 분배구조를 통해 평등을 추구하려는 사회주의의 장점을 서로 조화시켜 모든 사람이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제3의 이념과 체제를 모색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과 방법을 성서와 기독교 전통에서 찾아보는 것이 역사적으로 기독교 사회주의를 모색했던 신학자들의 역할이었습니다." (p.29)

"기독교 사회주의는 '남을 배려하는' 기독교, 개인의 자유보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독교, 모으는 것보다 '나누는 것'에 우선 가치를 두는 기독교를 지향합니다."(p.31)

 

사실 이것은 '기독교 사회주의'라기 보다는 원래 기독교의 모습이었는데, 자본주의적 질서 속에서 외면되고 잃어버린 기독교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편의상 그런 것들을 기독교 사회주의, 혹은 사회주의적 기독교로 표현한 것 같다. 이 책에서 이덕주 교수는 한국교회의 문제의 원인을 자본주의 질서에 무비판적으로 길들여진 기독교에 두고 있다.

 

"한국 교회의 부조리와 부정적인 현상의 원인을 물량적 성장주의 신학에서 찾는 학자들이 많습니다만 세속적 자본주의 원리를 교회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에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하겠습니다....교회의 양적 부흥과 성장은 이룩하였지만 그에 걸맞은 성숙이 뒤따르지 않아 정신적 연령이 낮은 거인이 된 형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개인적 종교의 자유만 말하고 사회적 책임은 도외시하는 이기적 집단으로 비치게 되었습니다."(p.30)

 

 

과학적 사회주의에 관해

 

그는 마르크스가 '공상적 사회주의'라 비판했던 것들에 다시 주목한다고 밝히면서 과학적 사회주의(공산주의)의 한계를 비판한다. 공산주의의 실패 앞에서 부정할 수는 없는 사실이지만, 과학적 사회주의의 역사적 의의를 쉽게 간과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사실 과학적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실험이 있었기에 자본주의 진형 안에서 복지국가로의 이행이 앞당겨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진영이 공산주의로 넘어갈 것을 염려하여, 자본주의를 수정하고 복지 정책 강화에 앞장선 것은, 이러한 이념적 대결 속에서 가능했다고 본다. 마치 종교개혁으로 인해 카톨릭에서 반동종교개혁이라하여 스스로 내부를 정화하는 운동이 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결국 기독교 내, 개인의 몫인가

 

기독교에서 출발하지만 대사회적으로 보편성을 갖는 '토지공개념' 같은 정책들의 예가 적어 아쉽다. 비록 '기독교 사회주의'지만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는 사람에게도 유효하고 사회적으로 설득력이 있는 정책 제시가 필요한 것 같다. 또한 구약과 신약의 공동체들을 언급면서도 여전히 그 해결에 있어서는 개인의 신앙과 양심에 호소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 '진보'라는 정신적 액세서리까지 향유하려는 강남 좌파에게, 자발적인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안일한 시각이 아닐까 싶다. 마르크스가 공상적 사회주의를 비판할 때와 동일한 비판을 피해가긴 어렵지 않을까? 사회주의적 실천의 동력을 기독교 내에만, 개인적 신앙에만 둘 것인가. 이 부분은 여전히 내게도 숙제요 의문이다.

 

 

이책의 미덕

 

어찌보면 이 책은 기독교 진보진영에서 볼 땐 충분히 '좌파적'이지 못하며, 보수기독교에서 볼 땐 덮어놓고 지나치게 '좌파적'이라고 몰아세울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원래부터 사회적 책임의 전통이 있었던 성경'에 대한 교정적 시각을 제시한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고 본다. 한국 기독교가 자본주의에 무비판적이고 우파적인 상황에서, 구약의의 만나공동체, 희년공동체, 신약의 성만찬 공동체, 오순절 성령공동체의 맥락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조목조목 잘 드러내 주었다. 교회들이 잘 보지 않는 예언서들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들에 대해 제대로 짚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학샏하거나 강탈하거나 빚진 자의 저당물을 돌려주지 아니하거나 우상에게 눈을 들거나 가증한 일을 행하거나 변리를 위하여 꾸어 주거나 이자를 받거나 할진대 그가 살겠느냐 결코 살지 못하리니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은즉 반드시 죽을지라. 에스겔 18장12-13절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면서 처음에 "하나님의 택하신 민족인데 어찌해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교도에게 망하였는가?"이해할 수 없었던 백성들은 예언자들의 설명을 듣고 그 원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떠나' 산당을 세우고 우상을 숭배한 것도 큰 죄지만 그에 못지않게 '가난한 이웃으로부터 마음이 떠나' 빈곤 문제를 방치한 것도 큰 실수였습니다."(p.124)

 

모쪼록 이 책이 한국의 진지한 신앙인들에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화해시키는 시각을 제시해주길 바란다. 그러나 진정한 화해는 무엇보다 행동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좋은 게 좋은, 덥거나 차지도 않은, 적당한 물타기, 미지근한 양시론, 양비론은 화해일 수 없고 건설적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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