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비슷하게 진행되다가 드라마로 끝이 난다. 뱃사람들이 초원이라고 부르는 잔잔한 바다, 갑자기 폭풍이 일어나는 사나운 바다, 그 속에 숨어 있는 악마 같은 흰 고래. 이 모두 자연의 한 모습이다. 몇 년씩이나 땅을 밟지 않고 바다에 머무는 고래잡이 뱃사람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간접체험하다가 결국 자연에게 압도된다. 인간은 왜 자연과 대결하고자 하는 것일까. 헛될지라도 흰 고래와의 대결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는 에이해브 선장의 모습은 한계를 넘어서려고 분투하는 인간의 숭고함인가 아니면 광기인가. 그 장엄함에 존재의 비극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인간의 역사는 자연 정복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인간들은 자연의 물질적 제약을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 왔다. 이제 인간은 자연을 압도하여 권력을 마구 휘두르다가 오히려 자신의 생존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인간의 어리석음이고, 압도당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자연의 위대함이다.
책은 매우 다층적이다.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고귀함부터 자연의 아름다움과 사악함, 거기에 얽힌 인간 문명의 위대함과 어리석음까지. 결국 느끼는 것은 만물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천지불인天地不仁', 그저 그뿐이다.
참고로, 난 이 책보다 <하트 오브 더 씨> 영화를 먼저 봤는데, 두 이야기는 괴물 흰 고래가 나온다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난파한다는 것 외에 줄거리상 큰 공통점은 없다. 영화에 멜빌이 등장인물로 나와서 난 <모비 딕>의 주요 줄거리가 <하트 오브 더 씨>와 상당 부분 겹치지 않나 생각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책 속 몇 구절:
향유고래가 평상시 헤엄치는 자세를 보면 머리 앞면이 수면과 거의 수직을 이룬다는 걸 알 수 있다. 앞면의 아랫부분은 돛의 아래 활대 같은 아래턱을 끼운 긴 구멍을 더 깊숙이 들여놓기 위해 상당히 뒤로 기울어졌으며, 입은 머리 바로 아래쪽이라 사람으로 치면 입이 턱 밑에 있는 셈이다. 그뿐 아니라 고래는 겉으로 드러난 코가 전혀 없고, 그나마 있는 코(분수공)는 머리 위에 있으며, 눈과 귀는 머리 양쪽으로 전체 몸길이의 3분의 1 지점에 달렸다. 그러므로 이제 향유고래의 머리 앞부분에는 아무 기관이 없고 어떤 민감한 것도 돌출되지 않은, 그야말로 무신경하고 꽉 막힌 벽이라는 걸 이해해야 한다. (89~90 페이지)
영원토록 경뇌유를 짤 수 있다면! 하지만 나는 오래 반복된 경험을 통해 인간이란 어떤 경우에도 결국 자신이 얻을 수 있는 행복에 대한 환상을 낮추거나 최소한 변경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행복은 지성이나 공상이 아닌 아내와 사랑, 침대, 식탁, 안장과 난롯가, 시골 같은 곳에 놓아야 한다. 나는 이제 이런 것들을 모두 깨달았기 때문에 기름통을 영원토록 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밤에 그리는 환상의 상념 속에서 나는 줄지어 선 천사들이 저마다 경뇌유 통에 손을 담그고 있는 천국을 봤다. (210 페이지)
숭고한 비극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은 근원을 알 수 없는 신들의 계보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건초를 말리는 반가운 태양과 부드러운 심벌즈 소리처럼 은은한 가을의 보름달 앞에서도 이것만은 인정해야 하는데, 신들도 늘 즐거운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날 때부터 인간의 이마에 새겨진, 지워지지 않는 슬픈 낙인은 다름 아닌 그것을 새긴 자들의 슬픔의 흔적이다. (282~283 페이지)

<"입이 턱 밑에 있는 셈"이라고 멜빌이 묘사한 향유고래의 모습. 고래에는 수염고래와 이빨고래의 두 소목이 있는데, 향유고래는 이빨고래 중 가장 큰 종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