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우리의 지식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담는 데 실패한다. 언어가 정말로 담는 것은 통제하려는 우리의 시도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언어에 매달린다. 실험 보고서를 작성하고, 숫자를 매기고 중요도를 합의하고, 무언가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묘사한다. 경외, 역겨움, 공포,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우리가 붙인 이름에 그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가끔 나는 과학자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한다--이름을 붙이는 것. 볼 수 있는 것, 추론할 수밖에 없는 것, 존재했으면 하고 바라는 것에.
과학자란 자연 세계의 시인인가? 아니면 시인이 상상 세계의 과학자인가? 시만큼 긴 이름들, 과학 논문만큼 긴 이름들, 양쪽 다 우리가 언어라 칭하는 이름들로 적혀 있다. 우리는 이름을 짓고 이 이름들을 후대에 남겨주고 그런 뒤에 죽는다. 목구멍에 마지막 숨이 걸린 채로. (33~34 페이지)
그러나 이제 그것은 사라지고 없다. 작약은 전성기를 누렸고, 넘치도록 충분하게 누렸다. 그토록 순수한 것이 불멸이라는 지옥에 갇혀서는 안 된다. (57 페이지)
결말이 의미를 만든다. 죽음은 영원한 의미 생성자인데, 오로지 죽음 속에서만 어떤 새로운 것이 일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새로운 것이 망각과 불확실성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새로운 몸속에서 세계를 헤매었고, 감각이 주는 황홀한 기쁨과 창작과 발견이라는 지적 자극을 받아들였으나 이는 모두 끝났고, 바로 끝났기 때문에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내 사랑들은 그 경험에 적절한 의미를 주기 위해 끝나야만 했으나 나 자신이 끝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 나는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는 고통을 멈추기 위해 내 심장을 단단하게 굳혔다. 나는 내부로 침잠했고 곧 내 안에서 질식했다. 삶은 독이다. 모든 독이 그러하듯 적은 용량은 치료제이지만 많은 분량은 치명적이다. 그리고 나는 삶을 너무 많이 맛보았다. (152 페이지)
삶이 행복하게 끝나든 슬프게 끝나든 차이점은 당사자가 느끼는 감정의 무게, 좋든 나쁘든 지구에서 살아 있는 동안 가졌던 선명하게 의미 있는 순간들이 가지는 무게뿐이 아닌가? 그 무게가 결국은 우리를 진정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가? (284 페이지)
유전자가 우리 삶의 서사를 엮는 몇 줄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의 모든 코드도, 문학도 그러하지 않은가? 이들은 우리가 존재하기 전부터 존재한다. 우리는 이들을 영속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이야기를 영속시키기 위해. 우리는 그저 매개체일 뿐이다. 우리는 몸으로, 삶으로 이야기를 하고, 그리고 죽는다.
이야기는 계속 남는다. (306~307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