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알람이 울렸다. 김금희 신작 구매 시, ‘신형철, 김금희 북콘서트 초대‘. 바로 구매했다. 몇 시간 뒤에 들어가보니 이미 매진되었는지 친필 사인본과 책갈피로 이벤트 페이지가 바뀌어 있었다. 보통 신청 글을 쓰면 뽑아주는 식이라 엄두도 못 내는데 사면 바로 가게 해주겠다니 너무 좋았다.
표지가 참 예뻤다. 그리고 출판사가, 편집자가 얼마나 애지중지 이 책을 만지고 만들었는지가 느껴지는 사은품과 면지가 좋았다. 일단 그런 것부터 좋았다. 면지의 예쁜 무늬와 오돌도돌한 감촉이 참 좋았다. 거기에 작가님의 귀여운 사인까지.
사람이 하나하나 손으로 꽂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제작한 책갈피에 적힌 문구와 띠지에 적힌 문구는 편집자와 마케터가 고르고 고른 문구들일 것이다. 이런 걸 읽고 책을 읽으면 그 부분만 도드라질 것 같아서 일부러 다 읽고 나서 나와 얼마나 겹치는지 보았다.
겹치는 부분도 있고 아닌 부분도 있다. 낚시를 하는 것 같은 문구도 있다. 어쨌든 왠지 하나하나 정성이 느껴졌다.
마지막 두 편 정도를 읽지 못하고 북토크에 갔다. 몸살 기운이 있어서 힘든 날이었는데 최선을 다해서 좋고 훌륭한 두 사람을 보니 기운이 났다. 참 좋았다. 토크쇼가 지루하지 않도록 책 제목 5행시와 7행시로 행사의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식의 신형철의 너무 진지해서 약간 촌스러우면서도 은근히 재치 있고 귀엽고 정직하고 겸손하고 선의에 찬 진행이 참 좋았다. 또 과장하거나 으스대지 않고 선선하게 그러나 열의에 차서 이야기하는 김금희도 참 좋았다. 둘 다 달변이라고 뽑내지 않으면서도 또박또박 정말 말을 잘하는 사람들인 듯하다.
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무궁무진한 함수로 이어져 있는 미궁이 아닌가. 우리는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한 죄인이 될 수도 있고 사랑해 마땅한 사람을 사랑하는 행운아일 수도 있고 세상에는 돌고래나 대형 수목과, 심지어 좋아하는 책상과 결혼한 사람도 있다. 그런 목재로 만들어진 반려자는 왁스를 먹여주는 일 이외에 별다른 관리가 필요하지 않고 상상력만 발휘한다면 다양한 스킨십도 가능하다고 책상과 결혼한 여자가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니까 상상력만 있다면 불운한 사랑이란 없는 것이었다.
51쪽_사장은 모자를 쓰고 온다
신형철의 말마따나 김금희는 이상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다. 실제로 그녀는 이상한 사람들에게 매혹된다고 했다. 소설에 이상한 사람들이 잔뜩 나오지만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이상할지 몰라도 읽다보면 그 이상한 사람들의 편이 되고 만다. 이런 게 소설의 힘이자, 김금희의 힘인 것 같다. 사장은 모자를 쓰고 온다의 사장은 객관적으로 보면, 특히 아르바이트생의 입장에서 보면 극혐에 가까운 카페 사장이다. 그런데도 책을 읽다보면 그녀가 신경 쓰이고 어떤 연민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하다가, 동질감 같은 것도 느껴진다.
우리는 어딘가 잘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자기 세계에 대한 충만한 고독, 그리고 왠지 모를 열패감이 뒤섞인 이상한 동질감이었다.
83쪽_오직 한 사람의 차지
이런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종류의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 것이겠지 싶다. 나도 김금희도 신형철도 어쩌면 그런 면에서 모두 한통속이라는 생각도 들고, 그런 점이 참 안심이 되는 면이 있다. 그리고 고고한 척, 순수한 척 살아가는 적응력 부족 인간들의 허술하고 찌질하면서도 애처럽고도 사랑스러우면서도 징글징글한 어떤 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잘도 보여준다.
기는 나의 그런 감상적인 성격이 문제라고 했다. 인생이란 열기구와 같아서 감상을 얼마나 빼버리느냐에 따라 안정된 기류를 탈 수 있다고. 아무것도 잃으려 하지 않으면 뭘 얻겠어. 하고 충고했다.
78쪽_오직 한 사람의 차지
그래, 그런 우리들은 그렇다치고, 조금 다른 사람들 좀 더 잇속 빠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김금희는 똑같은 애정과 연민과 이해를 갖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런 글을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어느 한쪽에 서서 다른 쪽을 비난하거나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그 양쪽 모두를 이해해보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김금희 책이 주는 위안인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모든 인간에 대한 연민과 이해의 기본 동력은 상실인 것 같다. 누구보다 상실에 대해 열심히 말하고 위로하는 작가가 그녀인 것도 같다.
뭐야 저 차들을 좀 봐. 저렇게 다들 안개등을 켜고 가니까 꼭 별빛 같은데 이 곡예운전은 대체 어떻게 끝날지도 모르는데 기는 그렇게 말했다. 마치 동면을 지속해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던 시절을 다 잊은 봄날의 곰처럼, 아니면 우리가 완전히 차지할 수 있는 것이란 오직 상실뿐이라는 것을 일찍이 알아버린 세상의 흔한 아이들처럼.
93쪽_오직 한 사람의 차지
이런 구절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담요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그 기적의 길을 걷지 못한 채 끝나는 여름 바캉스가 아쉬워서가 아니라, 몸살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지금 저 광경처럼 아주 거대한 반구 모양의 세숫대야에 불과하다면 손을 담그고 마구 흔들어 진흙탕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충동과 함께, 그런 맹렬한 적의와 분노로 이제 모든 게 철저히 망가지거나 훼손되어 다시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125쪽_레이디
작가의 설명에 의하면 이 책에서 작가의 애정을 가장 받지 못한 작품이 ‘누구 친구의 류‘이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 이 작품이 오래 남았다. 나의 나이 때문인지, 나의 결혼 때문인지, 쿠바 때문인지, 잡지박물관 때문인지, 류의 가난 때문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 작품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릿저릿하는 게 있다. 내가 20대 초반이었다면 아마도 레이디나 오직 한 사람의 차지 같은 작품에 더 이입되었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이 누구 친구의 류이다. 제목부터 좀 그렇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 류는 아까의 대화와는 상관없이 특별히 꺼려질 것도 한심할 것도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나쁠 것도 좋을 것도 비극도 희극도 없는 얼굴로 노래하는, 그냥 흔한 어느 친구의 류일 뿐이었다.
249쪽_누구 친구의 류
‘채스의 모든 것‘과 ‘새 보러 간다‘와 ‘문상‘도 기억에 남는다. (이러면 거의 다 남는 건가;;;) 소설 안의 어떤 굴욕이, 어떤 직업이, 어떤 슬픔이 나의 것과 비슷해서 그런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자전소설. 이 소설을 읽지 않은 채로 북토크에 갔었는데 청중의 요청으로 김금희가 이 소설의 한 부분을 읽었는데 정말 울컥했다. 읽고 보니 또 울컥했다. 마트의 까만 비닐봉지와 교문에 매달려 힘껏 흔들다 깔려죽은 아이와 야시장의 노파는 나도 오래 못 잊을 것 같다. 여러 이유로. 그리고 이 소설을 읽으며 비로소 김금희가 왜 그다지도 상살에 대해 오래 생각했는지, 왜 그다지도 열열히 살아 있음을 응원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K는 여자가 늙었다는 것, 여자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 마침내 늙어버렸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적어도 여자는 거부하지 않았음을, 살 것을, 최선을 다해 살 것을. 여자가 했다면 자기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이 도시에서 어떤 무게를 감당하면서 거짓말처럼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이루어야 할 모든 것을 이루는 셈이었다.
272쪽_쇼퍼, 미스터리, 픽션
그는 유심히 들었는데 왜 그런 이야기들은 기억나지 않고 그것을 제외한 자신의 모든 것들만 생생한가 생각했다. 왜 어디 먼 곳을 다녀온 것처럼 지쳐 있는가. 청년은 그런데 자기의 이런 이야기는 소설로 쓰면 안 될 것 같다고 했다. 머저리 같아서. K가 픽션 뒤에 숨으면 되지, 하니까 그러면 머저리 같지 않아져요? 하고 물었고 K는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을 지우면서 더 머저리 같아지지, 했다.
273쪽_쇼퍼, 미스터리, 픽션
작가는 이번에도 작가의 말에서 쐐기를 박는다.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붙드는 일, 삶에서 우리가 마음이 상해가며 할 일은 오직 그뿐이는 생각을 한다.
지금 쥘 수 있는 많은 것들 중에, 소설을 선택해준 당신에게 내 미약한 응원과 용기를 보낸다. 그 덕분에 나는 오래 쓸 수 있는 방향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하고 감사한 일이라고, 우리가 온전히 차지할 수 있는 이 영역을 포기하지 말자고 적어둔다.
293쪽_작가의 말
그녀는 열심히 소설을 쓰며 우리를 응원한다. 나도 그녀에게 작은 감사와 응원을 보내고 싶다. #김금희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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