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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soon님의 서재

번개에 맞아, 타버린 땅처럼 길에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하는 한 남자.

소년은 연신 뒤를 돌아보며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우리가 도와줄 수 없나요? 아빠?"

그러나 아버지는 매몰차게 어린 아들을 돌려세우고는, 몇 날 며칠 통조림으로 주린 배를 달래고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또다른 생존자들의 위협에 몸을 사리며 새우잠을 자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 이미 지칠 대로 지쳐버린 걸음을 재촉한다. "못해. 우린 못 도와줘.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하루하루 연명하는 일 자체가 고통인 그들, 소년도 알고 있다, 그대로 멈춰서 부상당한 남자를 돕자면 그들의 목숨마저 위험해질 거라는 사실을, 그러므로 지금 그들로선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을 소년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억지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안다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계속 걸어, 끝까지 살아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을 자신도 이해한다고. 언제고 자신과 아들의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길 수 있도록 두 발의 탄알만을 남겨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그래도 살아야겠기에, 숨이 붙은 인간이어서 살아야겠기에, 주위 잿빛 풍경처럼 마음 저 밑바닥까지 새카맣게 타버린 아버지를 소년도 잘 알기에 더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대신, 어린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온다.

숨이 붙은 채로 서서히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생면부지 남자에 대한 연민으로, 모든 따뜻한 것이 사라져 어둠밖에 남지 않은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그래도 살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어렴풋이나마 가슴으로 느끼면서, 눈물은 뜨겁게 아이의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책장을 덮는 그 순간까지 이 가슴 시린 고통은 계속된다. 조금의 다독임도 없다. 저 너머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푸른 희망에 대한 암시도 없다. 불을 운반하는 아버지와 아들은 그저 걸을 뿐이다. 묵묵히 견뎌낼 뿐이다. 인간을 제외한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이 죽어버린 그 끔찍한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을 온 몸으로 천천히 견뎌내면서 부자는 살아낼 뿐이다.죽지 않는다고, 모든 게 괜찮을 거라고. 뻔한 거짓말로 서로를 위로하면서.

책을 읽는 내내 온 마음이 모래사막처럼 까끌까끌 건조하고 불편했다. 살아야 한다는 게, 인간으로서 삶을 지켜낸다는 게 이렇게 고통스럽고 무섭고 삭막하고 끔찍한가, 라는 생각들이 바쁘게 끝을 향해 내달리다가,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어린아이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되었다.

뜨겁다. 마음속에 뜨겁고 축축한 무엇이 자리를 만든다.

시커멓게 재가 쌓인 그곳에 물이 고인다. 그리고 아름다움, 이라는 말.

고통스러울 만큼 아름답고, 감각적인 소설이다.

책 한 권에 담아내기엔 너무 무거운 감동이다.    

나는,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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