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말
실패에 관한 프로젝트라는 걸 생각할 때, 어쩌면 실상 아무도 감사의 말을 기대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이 옹호하는 대안적 형태의 지식을 생산하는 정신으로, 나를 상실, 결핍, <네모바지 스펀지밥>뿐만 아니라 실패, 멍청함, 부정성이라는 주제로 인도해준 그 모든 멋진 사람들을 언급해야겠다.- P9
이 책에는 줄거리 요약이 많이 등장하는데, 바라건대 벌랜트의 것처럼 재미있는 것들이었으면 좋겠다.- P10
전복이라는 개념이 슬프게도 유행이 지난 듯 보이는 시대에도 나는 여전히 끈질긴 전복적 지성들로 이루어진 배교자무리에 속하기를 원한다. 폴 아마르, 알리샤 아리존, 카르멘 로- P11
이 책은 부분적으로 논문 형태로 발표된 바 있다. - P12
서론
저급 이론
대안은 무엇인가?
(전략). 우리는 모두 꿈이 산산조각나고, 희망이 짓뭉개지며, 환상이 깨지는 일에 익숙하다. 그런데 희망 다음에는 무엇이 오는 걸까? - P16
다시 말해, 냉소적 체념도 아니고 순진한 낙관도 아닌 대안은 과연 무엇일까?- P16
이 책은 ‘저급 이론low theory (스튜어트 홀의 연구에서 내가 차용한 용어다)과 대중적 지식을 사용해 대안을 탐구하고, 이원론의 전형적인 덫과 교착상태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탐색한다.- P17
(전략). 그러나 저급 이론은 대안이 비판과 거부라는, 종종 극도로 어둡고 부정적인 반직관성¹이라는 혼탁한 영역에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과 만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책은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 고급 이론과 저급 이론, 대중문화와 난해한 지식을 번갈아 들여다보며 삶과 예술, 실천과 이론, 사고와 행위 사이의 구분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 앎과 무지를 둘러싼 더 혼란스러운 영역을끝까지 파헤쳐 볼 것이다.
1 [옮긴이] 반직관성(counterintuitive)은 사회에서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는 도덕적 직관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윤리학의 개념이다.- P17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전반의 급격한 경기변동이 우리에게 준 교훈이 있다면, 우리는 적어도 성공과 실패의 정태적 모형²에 대한 건강한 비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2 [옮긴이] 정태적 모형(static model)은 특정 현상에 대한 수학적 모형 가운데 정해진 시점을 중심으로 생성한 모형으로, 현실에 부합하는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하지 않지만, 쉽게 이해할 수 있어 많이 쓰이는 경제학의 모형 설정 방식을 말한다.- P18
실패는 퀴어들이 특별히 잘하는 일이자 지금껏 항상 잘해왔던 일이다.- P18
(전략). 또 실패는 확실히 실망, 환멸, 절망과 같은 일련의 부정적 정동을 동반하는 한편, 그런 정동을 이용해 우리 삶에서 해로운 긍정주의 toxic positivity⁴가 지닌 허점을 찾아낼 기회 또한 마련한다.
4 [옮긴이] 상실이나 고난 등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하더라도 슬픔이나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르고 지나치게 긍정적이거나 낙관적으로만 생각하고자 하는 경향을 뜻하는 개념으로, 심리학에서도 널리 사용된다.- P19
페미니즘의 측면에서 보면 실패는 종종 성공보다 더 나은선택이었다.- P21
여성의 실패를 다루는 익숙한 예시로 실패에 관한 논의를시작해보면 유익하고 재미도 있을 것이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2006)에서 애비게일 브레슬린이 연기하는 올리브 후버는 ‘미스 리틀 선샤인‘이라는 어린이 미인대회에 선발되고야 말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중략).
이 영화로 오스카 각본상을 받은 마이클 안트는 캘리포니아 주지사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고서 이시나리오를 구상했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경멸하는 한 가지를 꼽는다면, 그건 바로 루저들입니다!"- P23
(전략). 이것은 사회질서를 설명하는 동력으로서의 긍정적 사고에 의존하는 낙관주의도 아니고, 모든 것을 무릅쓰고 긍정적인 면만을 보고자 하는 낙관주의도 아니다.- P24
규율되지 않은
비가독성 illegibility은 정치적 자율성의 믿을 만한 원천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제임스 C. 스콧, 「국가처럼 보기」
(전략). 진지하게 여겨진다는 것은 시시하고 문란하고 지엽적이게 될 기회를 놓친다는 의미다. 진지하게 여겨지고자 하는 욕망이야말로 이미 증명된 지식 생산의 길을 답습하도록 강요하는 힘이다. - P25
어떤 종류든 간에 훈련은 벤야민식의 지식 접근법, 즉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길을 따라 "틀린" 방향으로 걸어가기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⁹
9 Walter Benjamin, Selected Writings 1913-1926, vol. 1, 1996.- P25
특히 물리학과 수학 같은 기초과학 분야에는 괴짜 지식인들이 꽤 많아서(그렇다고 그들 모두가 은둔자 테러리스트 유형은 아니다). 논문 출판 압박으로 관습적 지식 생산과 그 경로상의 발자취 많은 샛길에 매여 있게 하는 학계를 거부하고 인적 없는 곳에서 배회하곤 한다.- P26
일례로 2008년에 뉴요커는 여러 야심찬 물리학자와 수학자처럼 ‘모든 것의 이론‘이라는 거창한 이론 발견에 열중해 있던 괴짜물리학자에 관한 특집기사를 냈다.- P26
리시가 제창한 ‘모든 것의 이론‘은 결국 기대에 못 미쳤지만, 그럼에도 온전히 새로운 질문과 방법론의 지형도를 제시했다. (중략), 학계에서 거부당하거나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기관을 만들어 영상 세계를 향한 자신들의 꿈을 탐험한 이들이다.⁹- P27
새로운 형태의 지식을 창조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학제를 혁신하는 실험을 하고자 한다면 지금이 적기일 수 있다.- P27
이 책은 관습적 지식이라는 감옥 밖으로의 산책이자 실패, 상실, 자발적 퇴행이라는 규제되지 않은 영역으로의 산책으로서, 규범과 일반적 사유 방식을 크게 우회한다.- P28
프레드 모튼과 스테파노 하니는 2004년에 소셜 텍스트Social Text에 게재한 선언문 「대학과 지하공동체: 일곱 가지 테제」에서 대학과 규율에 관해 급진적으로 다루면서, 학제가 붕괴하고 있으며, 관례적으로 분리되어 있다고 여겨졌던 분과들 사이가 좁혀지고 있다고 간주한다.¹⁴
14 Fred Moten and Stefano Harney, "The University and the Undercommons: Seven Theses," 2004, pp. 101-115.- P29
무언가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건립하는것. 이것이 왜 안 될 일인가?- P30
예컨대 하나의 우회로서 시작된 책 국가처럼 보기: 인간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계획들은 어떻게 실패했는가에서 제임스 C. 스콧은 근대국가가 이윤을 일차적 동기로 삼는 사회적, 농경적, 정치적 실천을 합리화하고 단순화하기 위해 지역적이고 관습적이며 규율되지 않은 형태의 지식을 어떻게 짓밟았는지 상세히 설명한다.¹⁷
17James C. Scott, Seeing Like a State: a State: How Certain Schemes toImprove the Human Condition Have Failed, 1999: [국역본]「국가처럼 보기』, 전상인 옮김(에코리브르, 2010).- P30
(전략). 즉, 질서정연함이 우월하다는 논리로 사고하고, 더 지역적인 지식 실천, 덜 효율적이고 시장성이 덜한 결과를 낳을지는 모르나 장기적으로 더 지속 가능할 다른 실천들을 지우고 희생시킨다는 뜻이다.- P32
스콧은 유럽 무정부주의자들의 사유를 빌려와 더 실용적인 형태의 지식에 더욱 주목한다.- P32
사실 우리는 어쩌면 국가와 다르게 보는 방법에 관심이 있을지도 모른다.- P33
규율은 자격을 부여하거나 박탈하고, 합법화하거나 비합법화하며, 보상하거나 처벌한다. 무엇보다 규율은 고정된 채 스스로를 재생산하고, 반대 의견을 억누른다.- P33
푸코는 대학이 장려하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전 지구적이론" 대신 "예속된 지식, 즉 "기능적 일관성 혹은 형식적 체계화에 묻히거나 가려진 지식 생산의 형태로 눈을 돌려 생각해볼 것을 촉구한다.²⁴ (중략).
이것이 우리가 아래로부터의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24 Foucault, Society Must Be Defended, p.7.
- P34
‘예속된 지식‘을 정의하는 것과 관련해 우리가 물어야 할것 ‘예속된 지식‘의 생산과 유통에 참여하는 방법이다. 어떻은게 규율적 지식 형태를 저지할 것인가?- P35
첫째, 통달mastery에 저항하라. (중략). 예컨대 우리는 실패를 통달에 대한 거부로, 자본주의 내에서 성공과 이윤이 직관적으로 결탁하는 데 대한 비판으로, 패배에 대한 반헤게모니 담론으로 읽어낼 수 있다.- P36
둘째, 나이브함이나 터무니없음(우매함)에 특권을 부여하라.- P37
(전략).. 그러한 교수법을 추구할 때 우리는 이브 세지웍이 말한 것처럼 무지가 "지식만큼 강력한 복수의multiple 것이라는 점, 그리고 배움은 종종 가르침에서 완전히 독립되어 생긴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³"⁰
30 Eve Kosofsky Sedgwick, Epistemology of the Closet, 1990, p. 4.- P38
『무지한 스승』은 과도하게 훈련받은 자가 순종적인 아이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이끄는 데 의존하지 않는, 해방적인 형태의 지식을 추구하는 반규율적 방식을 옹호한다. 자코토는 자신의 교수법을 이렇게 요약한다. "나는 당신에게 내가 가르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야만 한다.³³
33 Jacques Ranciére, The Ignorant Schoolmaster, 1991: [국역본] 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양창렬 옮김(궁리, 2016), p.15.- P41
예속된 지식에 관한 내 세 번째 논지는 다음과 같다. 기념화 작업memorialization을 의심하라.- P42
이 책에서 망각은 영웅적이고 거대한 기억의 논리에 저항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며, 명백한 증거보다 유령성spectrality에, 유산보다는 잃어버린 계보에, 명문화보다는 삭제와 더 관련 있는 새로운 형태의 기억을 촉발시킬 것이다.- P43
저급 이론
고차원적 추상으로 작동하도록 고안된 개념들을, 마치 그 개념들이 더 구체적인 ‘낮은‘ 차원으로 번역되었을 때도 자동적으로 동일한 이론적 효과를 생산한다는 듯이 ‘독파하려고 시도할 때, 우리는 스스로 심각한 오류를 저지르게 된다.
스튜어트 홀, 「인종과 민족성 연구에서의 그람시의 적절성」
(전략). 그렇다면 저급 이론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우리를어디로 데려가는가? 왜 그것을 고급 이론의 타자로 위치시키는 이분법을 뒤엎는 대신 승인하는 듯 보이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P44
저급 이론은 이론이란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향하는 우회로"라는 스튜어트 홀의 유명한 개념에서 내가 추출해낸 사고 모형이다.³⁵
35 Stuart Hall, "Old and New Identities, Old and New Ethnicities," 1991. P.43- P44
저급 이론이란 용어는 그람시가 사상가로서 갖는 적절성에대한 스튜어트 홀의 논평에서 가져온 것이다.- P44
비학술적으로 쓰이든 특정한 비판적 사고의 전통을 약칭하든 고급 이론이라는 용어가 존재하는 한 저급 이론의 장은 암시적으로 존재한다.- P45
그람사는 평생 정당에 관여했으며, 오랫동안 여러 차원에서 정치에 참여했다. 중국에 그는 자신의 정치 성향 때문에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파시스트 정부의 감옥에서 풀려난 직후 사망했다.- P45
홀에 따르면, 그 대신 그람시는 진정으로 ‘열린 마르크스주의를 실천했다고 하는데, 당연히 열린 마르크스주의는 정확히 홀이 「보증 없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옹호한 것이기도 하다.- P46
오늘날 대학에서는 반헤게모니 counterhegemony보다 헤게모니를 생각하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쓴다. - P47
홀은 자신의 직업적 경력의 많은 부분을 개방대학Open University에서 보냈으며, 그람시 덕분에 ‘다양한 차원의 추상 작업‘을 할수 있었다.- P47
그림시와 홀 모두에게 경제주의 단지 설교와 값싼 통찰을 이끌어낼 뿐이며, 생산양식을 지탱할 수도 그것을 바꿀 수도 있는 사회관계에 관한 복합적 이해를 허용하지 않는다.- P48
저급 이론은반헤게모니적 형태의 이론화, 규율되지 않은 지식 생산 영역내 대안들에 관한 이론화의 이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P48
해적 문화
열정적으로 대안을 추구하는 것 말고 또 무엇이 범죄 행위인가?
-디자인 컬렉티브 진, 샤르자드(취리히, 테헤란)
저급 이론에 관한 훌륭한 예시는 17-18세기 자본주의에 대항한 역사를 다룬 피터 라인보와 마커스 레디커의 기념비적 저서 『히드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략).
『히드라』는 모든 대안의 계보학을 통틀어 중심적인 텍스트다. 저자들이 난폭한 무정부 상태라는 여성적 히드라를 굴복시킨 헤라클레스 같은 자본주의 영웅들의 남성적 신화를 거부하고, (후략).- P49
대안적 정치구성체의 역사는 사회관계를 주어진 것으로파악하는 데 이의를 제기하고, 지배의 맥락에서는 반드시 성공적이지는 않더라도 정치적 현재를 위한 논쟁과 불화, 불연속성의 모델을 제시하는 정치 행동의 전통에 접근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P51
거대 기업이 막대한 이윤을 내기 위해 여러 파생 상품을 동반하며 생산하는 장르에서 대안을 찾는다는 생각에 많은 독자가 반대할지도 모르지만, 새로운 형태의 애니메이션, 특히 CGI 기술은 서사의 문을 새롭게 열었고, 유치함, 변혁성, 퀴어성이 예기치 못하게 서로 조우하도록 만들었다. - P52
<몬스터 주식회사>를 욕망과 계급, 학급에 관한 것으로 읽어내는 프리먼은 신자유주의적 대학 개혁에 관한 빌 리딩스의 준열한 고발에 뜻을 함께하며,⁴³ 그 영화가 노동을 뽑아내는 기업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사회적 생산 관계를 매개하기도 하지만 조명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⁴⁴
43 Bill Readings, The University in Ruins, 1997: [국역본] 빌 리딩스, 『폐허의대학』, 윤지관·김영희 옮김(책과함께, 2015).
44 Elizabeth Freeman, "Monsters, Inc.: Notes on the Neoliberal Arts199 Education, 2005, p. 90.- P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