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들이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요."
나는 두 사람을 직접 만나 보고 싶어졌다. 나도 모르게 양 입꼬리가 올라간 걸 보면 마음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박은 뭐라 말하기 어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P50
"지금껏 봤던 프리 포스터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들어요."
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너는 정말 생각이 많은 아이다."
생각이 많다는 건 칭찬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다만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 P51
"나는 네가 차별 없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를 바란다."
"사회는 원산지 표시가 분명한 것을 좋아하잖아요."
이깟 농담에 표정이 어두워지다니, 박의 유머 감각은 아무튼 알아줘야 한다.- P51
"적어도 제게는 부모를 고를 선택권이 있잖아요."
......."
"세상에는 그 선택권이 없는 애들도 있죠."
(중략).
"그 애들 중 한 명이 나였지."- P52
"건강은 절대 자신하는 거 아니래요."
"누가 그래?"
"최."
"맞는 말이지만, 최는 너희들을 가장 걱정하지."- P54
대체 누구를 소개받은 건데?
페인트, 즉 부모 면접을 보기 위해 센터에 방문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했다. - P55
감정을 과하게 표현할수록 그들의 속마음은 홀로그램을 뚫고 선명하게 드러났다.- P56
"음! 솔직히 말해서 아이를 좋아한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어요. 개인적인 사정도 좀 있고, 하지만 말이 통할 정도로 다 자란 아이라면 다르지 않을까요?"
홀로그램 속 여자는 평범한 스타일이었다.- P56
어찌되었든 홀로그램으로 만난 프리 포스터 중에서 이들처럼 별 생각 없는 옷차림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솔직하게 떠드는 것 역시 처음이었고,- P57
실적 압박에서 자유로웠다면 박은 절대 이 프리 포스터들에게면접 기회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 P57
내 질문에 아키가 천장을 보았다.
"홀로그램으로 봤을 때는 정말 친절한 사람들 같았어."
사무실에서 나온 후, 아키는 줄곧 한 가지 생각에 잠겨 있었다.- P58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아키가 또랑또랑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형, 그분들 부자래."
벽에 기대어 있던 나는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박이 그래?"
프리 포스터들의 신상을 낱낱이 조사하는 박의 말이라면 믿을만할 것이었다.- P58
"나이가 좀 많은 분들이야."
"얼마나?"
"거의 할아버지 할머니야. 아들이 한 명 있는데 외국에서 살고있대."- P59
"나 대신・・・・・・ 형이 그분들을 만나 볼래?"
아키의 말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지금껏 심각한 얼굴이었던 이유가…………….
(중략).
"형, 삼 년밖에 안 남았잖아. 아니, 정확히는 이 년 하고 몇 개월."- P60
"사실 처음에는 형을 생각했다. 하지만 나로 마음을 바꿨다. 이분들에게 가장 사랑받을 수 있는 아이는 역시 나일 것 같다고."- P61
"그런데 왜 박의 표정이 그렇게 어두워 보였지?"
NC의 아이들은 눈치가 빨랐다. 표정이나 눈빛 하나만으로 쉽게 상대방의 기분을 알아차렸다. 아키 같은 순한 녀석도 그런 걸 보면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 걸까.- P63
"박의 부모님은 걱정이 많을 것 같아. 늘 일에만 매달리는 아들이."
그럴지도, 혹은 아닐지도 몰랐다. 우리는 박의 나이는 커녕 가족 구성원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니까.- P64
아키가 슬쩍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박이 형의 아빠라면 잘 어울릴 것 같아."- P64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들이 일제히 버튼을 눌러 모니터를 내렸다. (중략).
나는 왜 하는 표정으로 노아를 바라보았다.
"너, 센터장이랑 무슨 일 있었냐?"- P65
노아가 심드렁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제 박이랑 최가 싸우는데 네 이름이 나와서."
"싸워?"
"싸웠다기보다 뭐, 최의 일방적인 다다다다."- P66
그런데 잠깐, 두 사람이 싸운 걸 이 녀석은 어떻게 알았을까?- P66
리모스룸(remorse room)은 참회와 반성의 방이다. 생활관 규칙을 어기거나 문제를 일으키거나 폭력을 휘두르면 멀티워치를 압수당하고 리모스룸에서 반성문을 썼다.- P67
아, 결국 그렇게 된 거였구나. 아이들의 체육 시설을 늘리는 대신 자신의 휴식 공간을 없앤다. 박다운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P68
노아는 꿀꺽 침을 삼켰다. 일 분에 한 번, 리모컨으로 보안 버튼을 누를 준비를 하면서.
"그렇게 원칙을 중시하는 분이, 아무 회의도 없이 제 301에게 홀로그램을 멋대로 보여 주는 법이 어디 있어요? 어떻게 기본도 안 돼 있는 프리 포스터들에게 면접 기회를 줄 수 있죠?"- P68
"그 아이가 원한 일입니다."
(중략).
"제누는 영리한 아입니다."- P69
"야, 내 말 듣고 있어? 대체 박이 너한테 누굴 소개해 준 건데?"
쩌렁쩌렁한 노아의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선택이 박을 난처하게 만든 것 같았다. - P69
"그런데 최 말이야, 박을 되게 싫어하는 것 같아. 우리한테는 한없이 너그러운데 유독 박에게만 쌀쌀맞잖아. 왜 지난번에 식당에서, 너도 봤지?"- P70
최가 우리에게 너그러운 건, 우리는 보호받아야 하는 미성년자이고 그녀의 역할이 바로 그 보호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에게 박은 함께 일하는 동료이자 상사였다. 아무리 그가 센터장이라 한들, 최는 성격상 할 말도 못한 채 가만히 눈치만 보고있을 사람이 아니다.- P71
ID 카드의 넘버
헬퍼가 테이블 위에 커피 두 잔을 놓았다. 최가 의자를 가까이 당겨 앉았다. 창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P73
"저 곧 부모 면접 본다는 말, 들으셨죠?"
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커피 잔으로 시선을 내렸다.
"사람들은 왜 아기를 안 낳으려고 하는 걸까요?"
예상치 못한 질문인 듯 최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P74
최는 말없이 내 말을 곱씹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니, 표정으로 묻고 있었다.
"아이는 부모의 필요에 의해 태어난 존재들 같아요."- P76
"예를 들어, 어떤 사랑요?"
(중략).
"이게 다 너를 위해서야, 하면서 사랑을 가장한 억압과 통제 같은거요?"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 P76
"제누 301."
(중략).
"면접 시에 내가 가장 강조하는 게 뭐였지?"
"프리 포스터에 대한 예의요."
가디는 늘 상대에 대한 예의와 배려를 강조했다.- P78
나는 박의 암갈색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오늘만큼은, 예의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 P78
만에 하나 오늘 내가 페인트 도중에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면, 규칙을 어기고 프리 포스터들을 불쾌하게 만든다면, 그 사실이 즉시 본부에 알려질 것은 뻔한 일이었다.- P79
"나는 서하나 이쪽은 이해오름."
여자가 먼저 이름을 말했다.
"제 301입니다."- P80
"일월에 센터에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재뉴어리(January)의 앞글자를 따서 남자는 제누, 여자는 제니가 됩니다. 숫자는 저만의 고유번호입니다."- P81
‘아니다 싶을 땐 면접을 중지해 주세요.‘
어떤 경우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박이었지만, 살다 보면 침착함보다 빠른 판단력이 더 유용한 경우가 있다. 이 자리가 그렇다면 그 적임자로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생각이 탄력적인 최가 적격일 것이다.- P82
눈으로 서늘한 빛을 쏘아대던 최가 애써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간략하게나마 두 분의 소개를 하셔야 합니다. 왜 NC를 찾아왔는지, 그 배경도 들려주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중략).
두 사람이 아옹다옹하자 최가 큼큼 기침을 했다. 아무래도 최는 오늘 꽤나 많은 큼큼 소리를 낼 것 같았다.- P83
"그런데 우리는 둘 다 일 년 전에 일을 그만뒀어."
(중략).
"하나는 자기 글을 쓰려고 했고, 나는 내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P84
"첫 면접은 간단히 인사만 나누는 자리입니다. 얼굴만 보는 것으로 끝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은 아무래도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 대답은 다음번 인터뷰 때 천천히 하셔도 될 것 같네요. 좀 더 심사숙고하신 다음에 말이죠."
최가 강한 어조로 말을 마쳤고 몸을 일으켰다. 첫 면접을 이런식으로 중단한 적은 없었다. 짧아도 너무 짧았다.- P84
"다음 인터뷰는 언제 할까요?"
그리 놀라운 질문도 아닌데, 두 사람 모두 얼어붙었다.- P85
최가 이건 아니라는 듯 말을 잘랐다.
"다음 인터뷰 잡아 주세요. 그럼, 감사합니다."- P86
멀티워치로 게임을 하고 있는데, 문밖에서 벨이 울렸다.
"누가 왔나 봐."
아키의 말에 나는 보안, 하고 말했다. 문이 유리처럼 투명해졌다.
"어, 가디다."- P86
분위기가 묘해졌다는 걸 아키도 느낀 모양이었다. 눈치가 빠른 녀석이니, 박이 내게 뭔가 할 말이 있어서 왔다는 사실을 알아챘겠지.- P90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지?"
물론이다. 박이 문밖에 서 있는 모습을 본 순간 예상하고 있었다.
"전혀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이다."
박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낮고 차분했다. - P90
"가디, 우리는 아기가 아니에요. 열세 살부터 부모를 선택할 수있다는 게 무얼 뜻하는지 아시잖아요."
"......"
"아무리 부모라도 아닌 건 아니다. 틀린 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나이라는 거죠. 우리를 지금까지 쭉 그렇게 교육시킨 건 바로가디 아니었나요?"- P92
"저는 쫙 빼입은 정장에 준비된 인사말을 외듯이 내뱉는 사람들을 원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말할 때 아, 그래? 그럼 다른 걸 해 볼까? 말할 수 있는 부모를 원한다고요."- P93
어른이라고 다
어른스러울 필요 있나요
페인트를 마친 아키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부루퉁한 얼굴로 벌컥 문을 열더니 침대에 걸터앉아 한껏 두 볼을 부풀렸다.- P95
"아니, 딱 오 분만 더 얘기하겠다는데 그걸 칼같이 자르는 경우가 어디 있어? 그뿐인 줄 알아? 안아 보겠다는 것도 아니고 악수만 하겠다는데, 고작 손 한 번만 잡아 보겠다는데 신체 접촉은 안 됩니다,라니. 아우! 어떻게 사람이 작은 틈 하나가 없지!"
헛웃음이 나왔다. 아, 이 꼬맹이 녀석!- P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