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2 더하기 2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들으니 왠지 짜증이 난다. 피곤하다. 나는 다시 잠에 빠져든다.
(중략). 컴퓨터다. 컴퓨터가 나를 귀찮게 군다. 이젠 더 짜증이 난다.- P10
실험을 해볼 시간이다. 인사나 한번 해볼까.
"안는쎄오?" 내가 말한다.
"틀렸습니다. 2 더하기 2는 무엇입니까?"
무슨 일이지? 알아보고 싶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다.- P10
두 눈이 감겨 있는 것 같다.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 뜨기만 하면 되니까. 눈을 뜨려 노력해 보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P11
LED 조명이 나를 내리쬐고 있다. (중략).
"느... 에에... 엣" 내가 말한다. 이 정도면 될까?
"틀렸습니다. 2 더하기 2는 무엇입니까?"- P12
나는 산소마스크를 끼고 있다. 마스크는 얼굴에 단단히 매여 있으며, 내 머리 뒤쪽으로 돌아가는 호스와 연결되어 있다.
일어날 수 있을까?
아니. 하지만 고개는 약간 움직일 수 있다. 내 몸을 내려다본다.- P12
(전략).
"틀렸습니다. 8의 세제곱근은 무엇입니까?"
하지만 난 틀리지 않았다. 그냥 컴퓨터가 얼마나 똑똑하지 알고 싶었을 뿐. 답은, 그리 똑똑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중략).
나는 후속 질문을 기다리지만 컴퓨터는 만족한 듯하다.
피곤하다. 나는 다시 잠들고 만다.- P13
손가락들을 움직여 본다. 손가락은 내 지시대로 씰룩거린다. 좋다. 이젠 뭔가 될 것 같다.
"손 움직임이 감지되었습니다." 컴퓨터가 말한다. "가만히 계십시오."
(중략).
남은 관은 딱 세 개다. 팔에 꽂힌 링거 줄, 엉덩이로 들어간 관 그리고 소변줄. 특히 뒤의 두 가지는 꼭 제거해 줬으면 하는 시그니처 아이템 같은 것이었지만, 뭐 괜찮다.- P14
나는 침대에 두 손바닥을 대고 밀어본다. 상체가 일으켜진다. 내가 정말 일어나고 있다! (중략). 침대가 아니라 딱딱한 해먹이라고 해야 할까. 기괴하다.- P15
"전신 동작이 감지되었습니다." 컴퓨터가 말한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중략).
그제야 문득 드는 생각은,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내가 뭘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P16
나는 다시 깨어난다. 로봇 팔 하나가 내 얼굴에 닿아 있다. 무슨 짓이야?
(중략).
"의식이 감지되었습니다." 컴퓨터가 말한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중략).
나는 백인 남성이고, 영어를 쓴다. 어디 찍어보자. "조⋯⋯존?"
"틀렸습니다. 세 번째 시도.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P17
그리고 소변줄이 뽑히면서 상처가 났다. 바닥에 작은 핏줄기가 그어져 있다. 저 빨갛고 가느다란 선은...- P18
(전략).
방금 건 대체 뭐였지?
갑자기 그 모든 게 기억났다. 그 장면은, 아무 경고도 없이 머릿속에떠올랐다.
나 자신에 대해 알게 된 건 별로 없었다. 나는 샌프란시스코에 산다.
그건 기억이 난다. 아침 식사를 챙겨먹는 것도 좋아한다. 그리고 예전에는 천문학계에 발을 담그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P21
이제는 동료 환자들을 살펴볼 차례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왜 여기 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혼자는 아니다. 근데 저 사람들이 죽어 있네.- P21
핼러윈 장식처럼 보이지. 두 사람 다 나와 친한 사이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혹시 친했다면, 그 사실이 기억나지 않았으면 좋겠고,
(중략). 아무리 여기가 격리 구역이라 해도 죽은 사람은 치워줘야 하지 않을까? 뭐가 잘못됐는지는 모르지만 단단히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P22
혹시 저 해치까지 갈 수 있을까?
나는 한 걸음을 디뎌본다. 그리고 또 한 걸음. 그런 다음 바닥에 주저앉는다.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나는 쉬어야 한다.
이렇게 근육이 잘 발달돼 있는데 왜 이토록 힘이 없는 걸까? 아니,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면 애초에 왜 근육이 탄탄한 걸까?- P22
나는 머리를 더듬어본다. 혹도, 흉터도, 붕대도 없다. 신체의 나머지 부분도 꽤 멀쩡해 보인다. 멀쩡한 것 이상이다. 나는 근육맨이다.
꾸벅꾸벅 졸고 싶지만 참는다.
다시 시도해 볼 때다. 나는 바닥을 짚고 일어난다. 웨이트트레이닝이라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더 쉽다. 내 몸은 점점 회복되고 있다(그런 거였으면 좋겠다).- P23
나는 결국 사다리에 다다른다. 나는 앞으로 휘청하며 사다리의 가로대를 잡는다. (중략).
10피트짜리 사다리라니.
생각이 영국식 단위로 떠오른다. 이게 한 가지 실마리다. 나는 아마 미국인일 것이다. 영국인이거나 캐나다인일지도 모른다. 캐나다인들은 짧은 거리를 잴 때 피트와 인치를 사용하니까.- P23
나 자신에게 묻는다. LA부터 뉴욕까지의 거리는? 당장 떠오르는 대답은 3,000마일이라는 것이다. 캐나다 사람이라면 킬로미터를 썼을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영국인이거나 미국인이다. 아니면 라이베리아 출신이든지.
라이베리아에서 영국식 단위를 쓴다는 건 아는데 내 이름은 모르다니 짜증나네.- P24
"드십시오"
내 가슴에 치약 튜브가 놓여 있다.
(중략).
나는 튜브를 들어올린다. 흰색이고 검은 글자가 적혀 있다. ‘1일차, 1식.‘
(중략).
나는 뚜껑을 돌려 연다. 뭔가 맛있는 냄새가 난다. (중략).
세상에 끝내준다! 너무 맛있다! 진하지만 너무 느끼하지는 않은 그레이비 소스 같다. 나는 내용물을 입에 직접 더 짜 넣고 맛을 본다. 장담하는데, 섹스보다 이게 나을 거다.- P25
(전략).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난 의사인가?- P26
"자체 보행이 감지되었습니다." 컴퓨터가 말한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혼수에서 깨어난 혼수투스 황제다. 짐의 앞에 무릎을 꿇으라."
"틀렸습니다."
이제는 사다리 위에 뭐가 있는지 확인할 차례다.- P27
나는 새로운 공간으로 손을 뻗고 바닥 위로 몸을 끌어올린다. 내가 들어가자마자 탁 하며 불이 들어온다. 아마 컴퓨터가 한 일이겠지.
그 공간은 내가 떠나온 공간과 크기도, 모양도 같아 보인다. 이번에도 둥근 방이다.
보아하니 실험대처럼 생긴 커다란 탁자 하나가 바닥에 설치돼 있다. 근처에는 실험실용 의자가 세 개 있다.- P28
나는 장비가 잘 갖추어진 실험실에 있다. 대체 언제부터 격리 병동의 환자들을 실험실에 들어가게 해줬다고? 게다가 여기는 의학 실험실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대체 무슨 쌍쌍바 같은 상황이람?
쌍쌍바라고? 진짜? 난 어린 자식이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욕을 절대 안 쓰는 독실한 신자이든지.- P28
나는 벽을 따라 놓여 있는 더 큰 장비들을 살펴본다. 주사형 전자현미경, 서브밀리미터 3D프린터, 11축 밀링머신(커터를 회전시켜 공작물을절삭하는 공작 기계-옮긴이), 레이저 간섭 관측기, 1세제곱미터짜리 진공실.. 나는 이 모든 것의 정체를 알고 있다. 사용 방법까지도나, 과학자구나! 이제야 좀 알겠네. 내가 과학을 써야 할 시간인 거야 좋아, 천재 두뇌씨. 뭐라도 생각해 보라고!- P29
나는 사다리의 가로대에 불편하게 자세를 잡고 해치 손잡이를 밀어본다. 꿈쩍도 안 한다.
"해치의 잠금을 해제하려면 이름을 말하세요." 컴퓨터가 말한다.- P29
나는 근처의 시험관을 잡고 허공에 던져본다. 시험관은 당연히 위로올라갔다가 내려온다. 하지만 왠지 신경에 거슬린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물체가 떨어지는 모습이 왠지 거슬린다. 이유를 알고 싶다.
뭘 가지고 알아보면 될까? 나는 실험실 하나를 통째로 가지고 있고, 그 실험실을 사용할 줄 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건? - P31
일종의 ‘배터리 내장형‘ 장난감 같은 것이다. 주인이 최초로 사용하기 전에 배터리가 닳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작은 플라스틱 조각을 넣어두는 방식. 좋다. 이건 신상 중의 신상 스톱워치다. 그것뿐만 아니라이 실험실의 모든 것이 신상으로 보인다. - P32
숫자를 계산해 보고 얻은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방은 중력이 너무 크다. 원래 지구의 중력가속도는 9.8m/s²이어야 하는데, 이 방의 중력가속도는 15m/s²이다. 낙하하는 물체가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가 그것이다. 너무 빨리 떨어지니까- P33
02
좋다, 심호흡하시고.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는 말자. 그래, 중력이 너무 높다.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말이 되는‘ 답을 생각해 내자.- P34
대체 병실과 실험실이 들어 있는 커다란 원심분리기를 왜 만든단 말인가? 모르겠다. 그게 가능하긴 한 일인가? 그 원심분리기는 반경이 얼마나 돼야 하나? 얼마나 빠르게 돌아야 하나?- P34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컴퓨터가 묻는다.
나는 이불 토가를 내려다본다. "나는 진자를 연구하는 위대한 철학자 진자누스다!"
"틀렸습니다."
나는 천장 근처의 로봇 팔 중 하나에 진자를 매단다. 잠깐은 팔이 가만히 있어주면 좋겠다.- P36
내게는 펜이 있지만 종이는 없다. 괜찮다. 벽이 있으니까. ‘벽에 낙서를 휘갈기는 미친 죄수‘ 같은 행동을 수없이 반복한 후, 나는 답을 얻는다.- P37
그러니까 나는 원심분리기 안에 있는 게 아니다. 지구에 있는 것도아니고다른 행성일까? 하지만 태양계에 이렇게까지 중력이 큰 행성이나 위성, 소행성은 없다.- P38
(전략).
나는 눈을 깜빡인다. 또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게 사실이었을까? 아니면 허무맹랑한 멸망 이론에 정신이 팔린사람과 이야기하던 기억이 아무렇게나 떠올랐을 뿐일까?
아니, 기억은 진짜다. 그 생각만 해도 겁이 난다. 갑작스러운 공포가 아니다. 머릿속 한편에 지정석을 차지하고 있는, 익숙하고 편안한 공포다. 나는 오랫동안 그 공포를 느껴왔다.- P42
모든 것이 맞아 들어가기 시작한다. 우리는 아픈 게 아니었다. 우리는 가사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이 침대들은 영화에 나오는 마법 같은 ‘냉동실‘이 아니었다.- P44
뭘 먹을 기분은 아니지만 튜브를 보자마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중략).
나는 튜브를 열어 질척거리는 것을 입에 짜 넣는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맛있다. 채소 맛이조금 들어간 닭고기 같다. (중략).
"물?" 나는 입에 음식을 가득 문 채 우물우물 말한다.
천장판이 다시 열린다. (중략). 반짝이는 통에 적힌 글자는 ‘생수‘다. 나는 뚜껑을 돌려 연다. 아니나 다를까, 안에는 물이 들어 있다.- P45
"변기?" 내가 말한다.
벽의 판이 휙 돌아가며 금속으로 된 변기 겸용 의자가 나온다. 변기는 바로 그 벽에 붙어 있다. 교도소의 변기처럼. 나는 변기를 더 자세히 살펴본다. 버튼이며 이것저것 달려 있다. 변기의 둥근 부분에 진공파이프가 있는 것 같다. 중력이 있는 상태에서 쓸 수 있도록 개조한 무중력용 변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P46
(전략).
"각도 이상." 컴퓨터가 말한다.
‘젠장!" 내가 말한다. "거의 알아냈다고! 내가 누군지 거의 기억해냈단 말이야!"
"각도 이상." 컴퓨터가 다시 말한다.
나는 책상다리를 풀고 일어선다.- P51
나는 애들을 좋아한다. 흠, 그냥 느낌이지만 나는 애들이 좋다. 애들은 멋지다. 같이 어울리는 것도 재미있다.
그러니까 나는 30대의 남성으로 작은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아이는 없지만 아이들을 아주 많이 좋아한다. 마음에 안 들지만 내 생각엔 선생님이구나! 나는 학교 선생님이야! 이제 기억난다!
이런 세상에 내가 선생이라니.- P53
(전략).
"라일랜드 그레이스?" 웬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든다. 그녀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여성은 40대 중반으로 보였으며, 좋은 맞춤 정장을 입고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어, 맞는데요." 내가 말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P57
"무기명 비밀투표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설명하자면 복잡합니다. 그레이스 씨가 쓰신 과학 논문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만."- P58
스트라트는 서류 가방에서 파일을 하나 꺼냈다.
그녀는 파일을 펼치더니 첫 번째 페이지를 읽었다. "물 기반 이론에 관한 분석과 진화 모델 예측에 관한 재평가." 스트라트가 눈을 들고 나를 보았다. "그레이스 씨가 이 논문을 쓰셨죠?"- P58
스트라트는 파일을 다시 서류 가방에 집어넣었다. "아크라이트 탐사선과 페트로바선에 대해서는 아실 것 같은데요."
"모르면 무척 형편없는 과학 선생이겠죠."
"그 ‘점‘들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스트라트가 물었다.- P60
(전략)
"이건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스트라트가 내 등에 대고 말했다.
"제가 보기엔 선택 사항입니다만!" 나는 작별의 뜻으로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떴다.
그래, 뭐. 선택 사항이 아니었다.
아파트로 돌아갔는데, 우리 집 현관에 이르기도 전에 잘 차려입은남성 네 명이 나를 둘러쌌다. 그들은 내게 FBI 배지를 보여주고,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던 검은 SUV 세 대 중 한 대에 나를 몰아넣었다.- P61
스트라트가 말을 이었다. "외계 생물 추정학은 작은 분야입니다. 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전 세계에 겨우 500명 정도밖에 없죠. 그리고 옥스퍼드 교수들부터 도쿄대 연구자들에 이르기까지 제가 이야기를나눠 본 모든 과학자들은, 박사님이 갑자기 학계를 떠나지만 않았더라면 이 분야의 지도자가 되었으리라고 생각하는 듯했습니다."- P63
나는 손을 들었다. "잠깐만요, 러시아, 캐나다, 미국이 전부 당신 지시에 따른다는 겁니까?"
"네. 토 달지 않고 따릅니다."
"이거 전부 장난입니까?"
"새로운 실험실에 익숙해지세요, 그레이스 박사님. 저는 다른 처리할 일이 있어서"
스트라트는 다른 말없이 문밖으로 나갔다.- P64
지난번과 똑같이, 내가 손잡이에 손을 대자마자 컴퓨터가 말한다.
"해치의 잠금을 해제하려면, 이름을 말하세요."
"라일랜드 그레이스." 나는 우쭐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라일랜드 그레이스 박사"- P65
나는 빨간색 경계선이 깜빡이는 화면을 발견한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그쪽으로 몸을 숙인다.
각도 이상: 상대적 이동 오류
예상 속도: 11,423kps
측정 속도: 11,872kps
상태: 경로 자동 수정 중. 추가 조치 불필요- P66
흠, 초속 1만 1,872킬로미터라.
속도란 상대적인 것이다. 두 사물을 비교하는 게 아니라면 속도라는개념은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 고속도로의 자동차는 땅에 비교했을 때 시속 70마일로 운동하는 것이다.- P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