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이 책은 400년 가까이 수학자들을 괴롭혀 왔던 한 난제를 다루고있다. 1611년 독일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1571~1630)는 공을 가장 조밀하게 쌓는 방식은 청과물 상인이 오렌지나 토마토를 쌓을 때 쓰는 방식과 동일하다는 추측을 내놓았다.- P9
내가 케플러의 추측을 처음 알게 된 때는 1968년이었다. 당시 나는 스위스 국립공과대학 수학과 1학년이었다. 그 당시 한 기하학교수가 여담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공을 가장 밀도 높게 쌓으려면 각각의 공이 12개의 공에 의해 둘러싸이도록 하는 배열이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그 교수는 케플러가 최초로 이런 추측을 내놓았다고 말했으며, 이것은 그 유명한 페르마의 정리와 더불어 가장 오랫동안 풀리지 않고 있는 수학의 난제라고도 했다- P10
이 책은 과학 및 과학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씌어졌다. 따라서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수학 외에 별도의 수학 지식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P11
대강의 줄거리만을 원하는 독자라면 난해한 수학이 나오는 부분은 건너뛰어도 무방하다. 그런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읽지 않아도 큰 무리가 없는 부분은 별도의 활자체를 사용했다. - P12
나는 예루살렘에 있는 히브리 대학의 수학도서관, 하만 과학도서관, 과학사 및 과학철학 도서관에서 상당량의 귀중한 자료를 얻을수 있었다. 취리히 국립공과대학 도서관에서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논문들도 구할 수 있었다. 또 이스라엘 원자력 에너지 연구소에서도 입수하기 어려운 논문을 한 편 보내주었다. 이들 기관에 감사를 드린다.- P12
1장
포탄과 멜론
영국 귀족이자 항해 전문가인 월터 랠리 Sir Walter Raleigh(1552~1618)은 새로운 지적 영역을 개척한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의 학문적 업적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P17
선구적 사상가로서의 면모가 제대로 평가되고 있지는 못하지만해리엇의 과학적 업적은 매우 다양하다. (중략). 그의 과학적 발견 대부분은 사망 후 10년이 지난 시점인 1631년 출간된 그의 주저(해석학적 방법론의 적용을 통한 대수방정식의 해Artis analyticae precisad Aequationes Algebraicas Resolvender)에 담겨 있다.- P18
월터 경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해리엇은 특정한 모양의 수레에 몇 개의 포탄이 쌓여 있는지를 계산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표를 하나 만들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해리엇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특정 형태로 쌓여 있는 포탄의 개수를 계산하는 공식을 고안해 냈을 뿐만 아니라, 배에 포탄을 최대한실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P19
포탄은 비록 3차원 물체이지만 그보다 낮은 차원에서도 동일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먼저 1차원과 2차원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중략). 1차원에서 공간은 단순히 직선이 된다. 2차원에서는 공간은 평면이 된다.- P19
그런데 특별히 3차원에서 멈출 이유가 있을까? 사실 수학자들-이들은 확실한 증명을 내놓기 전까지는 어떤 것도 믿지 않으려 하는 족속이다-은 눈으로 볼 수 없는 대상이라고 해도 그것을 정의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수학자들은 선분이나 원, 그리고 공을 정의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고차원 구를 정의한다.- P20
다시 본래의 문제로 돌아가서 쌓아놓은 물체의 밀도란 무엇을 뜻하는지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무한한 공간에 무수히 많은 구를 쌓아놓을 수 있는데 어떻게 밀도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 P20
비교를 위해 동전을 정사각형 형태로 배열했을 때의 밀도를 알아보도록 하자. 이 경우에는 동전이 평면을 채우는 비율이 79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 (정확한 계산은 부록 참조) 따라서 2차원에서는 정사각형 배열이 정육각형 배열에 비해 매우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평면이 무한 평면이 아닐 때에는 정육각형 배열이 반드시 정사각형 배열보다 효율적인 배열이라는 보장은 없다. - P22
하지만 이 책의 주제인 케플러의 추측은 경계가 없는 공간, 즉 무한 공간일 때를 가정하고 있다.
어쨌든 무한 평면일 때 정육각형 배열이 정사각형 배열에 비해 밀도가 높다는 사실은 알게 되었다.- P22
정육각형 배열이 최적의 배열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증명이 요구된다. 하지만 그것을 증명하는과정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겨우 만족할 만한 증명이 나온 것은1940년이 되어서였다. - P23
무게는 같지만 하나는 정육면체 모양을 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둥근 모양을 하고 있는 2개의 멜론을 비교했을 때, 둥근 모양의 멜론 표면적이 20퍼센트 가까이 적다. 결국 멜론은 수분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둥근 모양으로 진화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최소 표면적 문제 역시 그 해결에 천 년이나 소요된 난제였다. 아르키메데스는 이미 그 답이 둥근 모양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1894년이 되어서야 헤르만 아만두스 슈바르츠Hermann AmandusSchwarz(1843~1921)에 의해 엄밀하게 증명되었다.- P24
과일 쌓기 문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상품 진열 방식 가운데 하나는 상자 안에 되는 대로 쌓아 올리는 것이다. (중략). 아무렇게나 쌓으면 평균적으로 상자의 공간을 55~60퍼센트만 활용하게 된다. (중략). 짓이겨지는 경우가 없다고 가정했을 때 이렇게 하면 대략 64퍼센트의 공간을 사용하게 된다.- P25
좀더 깔끔한 방법은 정육면체를 쌓듯이 열과 행을 맞추어 가지런히 배열해 놓은 다음 그 위에 조심스럽게 다음 번 켜를 올리는 것이다. (중략). 안정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손님이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져 내릴 위험이 있다. (후략).⁴
4) 반면에 물리학자들은 안정성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퍼 백Per Bak의 책 <자연의이치 How Nature Works》 (코페르니쿠스 출판사, 뉴욕, 1996년)에서 모래 더미의 안정성에 대해 다루고 있는 부분을 참조하기 바란다.- P25
현명한 상인은 그보다 더 나은 방식을 택한다. 사실 전 세계 거의 모든 상점에서 이와 같은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먼저 테이블 한쪽에 과일을 가지런히 늘어놓는다. 앞에서 보았지만 이 방법은 1차원에서 밀도를 가장 높게 하는 배열 방식이다. 그 다음 줄에서는 첫번째 줄 멜론 바로 옆에 놓지 않고 대신 두 멜론 사이에 난 공간에 위치하도록 놓는다. 이를 수학적 용어를 빌려 표현하면, "멜론 반개만큼 전치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P26
2장에서 보겠지만 ‘육방 밀집 쌓기 Hexagonal ClosePacking (HCP)‘란 이름으로 불리는 이 방식의 밀도는 놀랍게도 74.05퍼센트에 달한다. 그러나 이 방식도 단지 좀더 나은 것에 그치지 않는다. 실은 멜론을 쌓는 방법 가운데 최적의 것이 바로 이 육방 밀집 쌓기이다. 다시 말해서 밀도가 가장 높은 쌓기 방식인 것이다.- P27
이 점은 상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었지만 유독 수학자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수학자들이 이를 참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387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P27
이 시점에서 구 쌓기와 관련된 흥미롭고도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중략). 1883년 결정학 Crystallography을 연구하던 윌리엄 발로 William Barlow(1845~1934)는 멜론을 쌓는 최적의 방법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 P27
(전략).
차이는 멜론 4개마다 오목한 곳 하나가 생긴다는 점이다.(HCP 쌓기에서는 멜론 3개마다 오목한 곳 하나씩이 만들어진다.) 이제 오목한 곳마다 멜론을 올려놓아 두 번째 켜를 만든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 얻는 배열을 ‘면심 입방 쌓기 Face-Centered Cubic Packing(FCC)‘라 부른다.- P28
20년이 지난 후 아마추어 과학자 발로는 또다시 획기적인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1907년 그의 동료 윌리엄 잭슨 포프WilliamJackson Pope (이 사람은 훗날 맨체스터 대학 화학과 교수가 된다)와 공동으로 《화학학회 저널Journal of the Chemical Society)에 논문을 실었다. 이 논문에서 두 사람은 멜론을 쌓는 최적의 방법이 두 가지만이 아니라 실은 무수히 많다는 점을 보여주었다.(그들은 멜론보다는 원자에 더 관심이 많았다.)- P29
그런데 이들 배열 모두 74.05 퍼센트의 밀도를 지니게 된다! 해리엇과 케플러가 이 사실을 알면 분명 놀라지 않았을까?- P29
무수히 많은 이들 배열 방식은 밀도 이외에도 다른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중략). 즉, 각각의 구가 12개의 다른 구와 맞닿도록 배열한다고 해서 반드시 최적의밀도를 갖는 배열이 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구 하나하나가 다른 12개의 구와 맞닿아 있지만 최적의 밀도를 갖지 않는 배열들이 존재한다. 이런 배열 가운데 소위 ‘더티 더즌Dirty Dozen‘이란 것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 P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