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브리얼은 마을에 도착한 뒤로 사람들과 어울리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를 탓할 수는 없었다. 평생 집을 떠나 살았고 이곳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말을 달고 살았으니까.- P154
"지미, 그만해. 술집은 누구든 올 수 있는 곳이야." 프랭크가 끼어들었다.
게이브리얼은 프랭크를 향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하지만 둘이 무언의 이해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지미의 화를 돋우었다. 날이 선 상태라 화가 커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P155
"아니, 내 잘못이야. 여기 온 게 잘못이었어. 난 아무것도 모르고・・・・・・ " 게이브리얼이 말했다.
그는 뭘 몰랐다는 건지 말하지 않았다. 나는 남편의 시선이 느껴지는 가운데 술집에서 나가는 게이브리얼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P156
재판
오늘 증인으로 출석한 사람은 앤디, 아니 검사가 부른 이름에 따르면 모리스 경사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그를 친구로 여겼다. 하지만 총격이 발생한 그날 밤, 모든 것이 달라졌다.- P156
"모리스 경사님, 총격 사건이 발생한 밤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존슨 가족과의 관계를 묻고 싶군요. 두 형제와 친구사이였다고 알고 있는데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입니까?"
앤디는 머뭇거렸다. 우리 가족과 거리를 두기에 가장 좋은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P157
"그 당시에는 안 들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목장에서는 사고가 꽤 흔합니다."
(중략).
"네, 그랬습니다. 사실 관계가 맞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이 일을 20년 동안 하다 보면 거짓말을 본능적으로 알게 됩니다."
이제 앤디는 피고인을 보았다. "24시간 내로 살인 사건 수사를맡게 되리라는 걸 알았습니다."- P158
과거
존슨 집안의 남자들을 사람답게 만드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바비의 탄생이었다.- P158
미친가장 놀라운 사실은 데이비드가 바비에게 완전히 푹 빠졌다는 것이었다. 프랭크와 지미는 어린 시절에 데이비드가 하루 종일 목장에서 일하느라 옆에 없었다고 늘 말했다.- P159
(전략).
그러면 데이비드는 잔뜩 신이 나서 나를 보며 말했다. "얘 좀봐."
바비는 데이비드를 사람답게 만들었다. 이 뻣뻣하고 말 없는 목장 주인은 소리 내 웃고 노래하고 미소 짓는 사람이 되었다.- P160
바비가 태어난 지 몇 주가 지났을 때, 나는 낡은 담요를 접어만든 아기띠로 바비를 안고 목장 여기저기를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직접 걸어보니 광활하고 끝이 없는 것만 같았다. - P160
데이비드의 눈을 통해 블레이클리 목장은 내게 살아 숨 쉬는곳이 되었다.
데이비드는 바비가 돌이 되기 전부터 아이를 트랙터에 태우고목장을 돌아다녔다.- P161
데이비드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손주를 적당히 감싼 채 운전했다. 나는 혼자 보낼 시간이 생겨서 좋았지만 한 시간쯤 뒤에 둘 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마당에 나타날 때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P162
1968년
나는 바비가 주방 바닥에 책상다리로 앉아서 어미 잃은 양에게 젖병으로 젖을 먹이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가장 좋아했다. 이 사진을 하도 자주 봐서 이제는 바비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그 모습이 떠올랐다.- P163
나는 가방을 가지고 마당으로 나가서 흔들며 부스러기 하나까지 모두 털어냈다. 사진이 없었다. 나는 당황에서 울부 짖었다.
(중략).
"사진이 없어졌어."
"그럴 리가"- P164
사진은 내게 일종의 부적이자 바비가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물건이었다.- P164
문을 열어보니 게이브리얼과 레오였다. 머릿속에 걱정이 가득해서 예의를 갖추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했다. "어서 와 들어올래?"
예상대로 게이브리얼은 고개를 저었다. 술집에서 지미가 난동부린 뒤로, 별 뜻 없는 행동이었다고, 그저 술김에 한 바보 같은행동이었다고 게이브리얼을 이해시키려 했지만, 그는 내 말을 믿지 않는 듯했다.- P165
레오는 한 손을 불쑥 앞으로 내밀더니 손바닥을 폈다. 작은 가죽 사진 케이스가 나타났다. "내가 아줌마 가방에서 꺼냈어요"- P165
나는 게이브리얼이 더 이상 이 일로 레오를 혼낼 것 같지 않아서 다행스러웠다. 레오에게 더 창피를 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레오가 외쳤다. "내가 그랬어요! 내가 훔쳤다고요. 갖고싶었어요. 바비를 보는 게 좋아서요."
레오의 말을 이해한 프랭크는 충격에 휩싸인 표정이었다.- P166
"그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이런 상황이 생길 줄 알았잖아. 그런데도 당신은 안 하는 게 좋겠다는 내 말을 듣지 않았지. 도대체 이 일이 어떻게 끝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P167
과거
온 마을 사람들이 몇 달 동안 수군댄 결혼식이 바비의 세 번째 생일에 열렸다. 참나무 아래에서 우리 가족만의 조촐한 소풍을 준비하는데 승합차 여러 대가 메도랜즈에 짐을 내리고 있었다.- P167
결혼식 준비를 위해 청소, 정원 관리, 세탁을 담당할 마을 사람들 몇 명이 추가로 고용되었다. 세세하게 신경 써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초대한 하객은 300명이었다. 할리우드 스타는 물론이고 영국 귀족, 소설가, 음악가, 정치인도 있었다.- P168
바비는 생일이라 특별히 소젖 짜러 가는 두 남자를 따라가도 된다고 허락받았다. 체격이 작은 바비는 방해가 될 뿐이었지만, 프랭크와 지미는 바비가 소젖을 짜려고 낑낑대다가 실패하는 동안 언제나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래서 바비가 따라가면 시간이 훨씬 오래 걸렸다.- P169
가족들이 소풍 장소로 모이려면 아직 몇 시간 더 있어야 했다. 게이브리얼의 결혼식 때문에 들려오는 소리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초 단위로 알고 있었다.- P171
‘바비, 마을 결혼식 몰래 구경하고 싶지 않니?"
"진짜 스파이처럼요?"
"응. 묘지에 있는 큰 나무 뒤에 숨어서 말이야"
"솔직히 그러고 싶어요."
‘솔직히‘는 바비가 최근에 배운 말인데, 이 말을 쓴다는 건 상당히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었다.- P171
몸에 딱 맞는 검은색 정장에 흰색 셔츠를 입고 검은색 넥타이까지 말쑥하게 차려입은 공식 사진사가 다급히 앞으로 나와 첫번째 사진을 찍었다. (중략). 사진사의 또렷한 상류층 억양이 우리에게까지 들렸다.- P172
나는 루이자가 고개를 돌려 게이브리얼에게 뭐라고 말하는 걸 지켜보았다. 게이브리얼이 그 말을 들으려고 몸을 가까이 기울이는 것도, 루이자의 뺨에 입 맞추는 것도.- P174
루이자의 어머니 모이라는 내가 마지막으로 본 날 이후로 전혀 나이 들지 않은 모습으로 교회에서 나왔다.- P174
나는 바비를 끌어안았다. "오늘은 네 생일이니까 선물은 다 네 것이라는 거 알아. 그런데 엄마가 가장 좋은 선물을 받았구나."- P175
1968년
바비의 사진에 관해 레오에게 굳이 다시 이야기하지 않았다. 사실 나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P175
집에 가려는데 게이브리얼이 주방에 들어왔다. 그가 오후 내내 일하는 바람에 사진 사건 이후로 처음 마주쳤다.
"우리 얘기 좀 해야 하지 않아? 와인 한 잔 마실래?" 게이브리얼은 식탁에서 숙제하고 있던 레오를 흘끗 보았다. "서재로 갈771?"
권유라기보다 명령에 가까운 말에, 그를 따라 복도를 걸어가던 나는 문득 찌르는 듯한 불안을 느꼈다. - P176
소파 앞 탁자에는 화이트 와인 한 병과 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내가 뭐라고 할 줄 알고 자신감이 넘치네." 내 말에 게이브리얼은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싫다고 하면 나 혼자서라도 마실까 했지."- P176
"바비를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게이브리얼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말이 안긴 고통 때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앞으로의 내 삶은 내 아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겠지.
"바비는 어떤 아이였어?"- P178
우리의 우정이 달라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아주 서서히 달라져서 처음에는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초저녁에 함께 와인을 마시던 그 순간. 매일 저녁 한 시간씩 내가 죽은 아들 이야기를 하면 게이브리얼은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듣는 듯이 귀를기울였다. 그동안 나는 바비의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P179
집으로 걸어갈 때면 바비가 내 곁에 있었을 때의 추억이, 다디달던 9년이 모두 생생하게 떠올랐다.- P179
과거
우리 아들은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부모, 삼촌, 할아버지와 함께 밖에서 시간 보내는 걸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던 시골 소년이었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될 때까지의 이 눈부신 시간을 나는 충분히 감사하며 누렸을까?- P180
얼마 지나지 않아 바비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셔츠와 넥타이 차림에 끈을 묶는 반짝이는 구두를 신은 바비는 내 자식 같아 보이지 않았다.- P181
이렇게 우리 둘이 마주 보지 않고 같은 방향을 보며 친밀해진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데이비드가 이런 걸 물어봤는지도 모르겠다. "조만간 둘째를 가질 생각이니? 이제 바비도 학교에 갔잖니."
나는 그 질문에 깜짝 놀랐다. 지금껏 시아버지에게 들은 질문 중에 가장 사적이었기 때문이다. "벌써 저랑 같이 일하기 싫어서 그러세요?" 나는 그를 놀리듯 되물었다.- P182
둘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아기를 간절히 원했다. - P183
며칠 뒤, 프랭크가 데이비드와 이야기를 나눈 것이 분명해졌다. 프랭크는 침대에 누워서 물었다. "당신, 피임하고 있어?"
프랭크가 이런 걸 묻는 일은 드물었다.- P183
우리는 거의 매일 밤 예외 없이 사랑을 나누었다. 프랭크는 그러면 하루의 근심을 잊고 머리가 맑아지며 잠을 잘 잘 수 있다고했다. 나는 사랑을 나눌 때 프랭크와 가장 친밀감을 느꼈다. 하루중 이 시간에만 느낄 수 있는 그런 친밀감이었다.
(중략).
"당신은 우리가 아기를 또 가지면 좋겠어?"- P184
오늘 밖에 사랑을 나눌 때는 뭔가 달랐다. 우선, 우리는 단 한별도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프랭크는 내 안으로 아주 깊속이 밀고 들어오더니 움직이지 않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P185
1968년
메도랜즈 정원에 레오와 함께 있는데 검은색 택시가 덜컹대며 진입로에 들어섰다. 도시의 외딴 시골 마을인 이곳에서는 흔치 않은 광경이었기에 우리는 나란히 서서 누가 왔는지 지켜보았다.
"런던에서 온 택시일까요?" 레오가 물었다.
"백만장자가 아니고서야 택시비를 감당할 수 없을걸."- P186
그날 저녁, 프랭크와 저녁을 먹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중략).
"내일 아침 일찍 레오와 런던에 갈 예정이라 당신을 다시 볼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요. 혹시,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술집에서 잠깐 만나서 술 한잔할래요?"- P188
여름 들어 내가 메도랜즈에서 돌아오는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가끔은 술 냄새가 났기 때문에 뭔가 달라졌다는 걸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결혼 생활은 내리막길에 접어들었고, 나는 이를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너무 잘 알았다. 문제는 그렇게 하고 싶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P188
술집에 가니 루이자가 먼저 와 있었다. (중략).
"진, 괜찮아요?" 루이자는 한 잔을 내 쪽으로 밀며 물었다. 따뜻하고 숨김없는 미소였다. 그녀는 나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P189
"베스, 솔직히 레오와 떨어져 사는 게 정말 힘들어요. ‘더는 못 하겠어‘라는 생각이 계속 들어요. 레오가 나와 같이 미국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P190
루이자는 말을 끊었다. (중략).
"베스, 당신은 좋은 사람이군요. 레오 곁에 당신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P191
나는 잔을 집어 들고 진을 크게 한 모금 마셨다. 테사 울프 에기를 꺼내는 게 아니었다. 그녀의 경멸 어린 말투가 어제 들은 듯이 생생했다. "게이브리얼 같은 남자들은 대부분 너 같은 여자로는 만족 못 해."- P192
나는 탁자를 내려다보며 마음을 잡으려 애썼다. 방금 들은 말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오래전, 오직 한 가지를 알고 싶어 하던 시절이 있었다.- P193
루이자는 잠시 내 손을 잡았다. 그녀의 다이아몬드 약혼반지는 모욕적일 정도로 컸다. "아직 늦지 않았어요."
루이자는 이어지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직 늦지 않았어요. 당신과 게이브리얼 말이에요.- P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