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 재생을 걸어 놓은 플레이리스트처럼, 똑같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거듭됐다. 나는 속으로 화를 내다가, 후회하다가,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다가, 다른 방향으로 후회하다가. 이것도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하다가, 부끄러워하다가,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다가,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하다가, 화를 내다가…………… 까무룩 잠들었다. 일어났을 때는 낮 열두 시였다.- P123
. 대화는 예상할 만한 이야기들로 시작됐다. 승윤이 어제 나랑 싸우고 들어왔다고, 이정엽 사장님은 "애들끼리 싸우면서 크는 거지." 정도의 입장인 반면 어머니로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고, 숨은 사정이 있는 듯해서 연락했다고 했다.- P124
나는 승윤이 내게 결정권을 넘겨주었다는 사실, 최소한의 선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P124
어른들이 말하기를 애들은 원래 싸우면서 자란다고들 한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도 있다. 어른들이 옳을 거다. (중략). 그 둘을 이 시점에 분간할 방법은 없고, 그렇다면 지금의 내게 필요한 건 시간이다.-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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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엽 사장님을 만나게 되는 일은 없었다. 승윤에게 내뱉은 말 때문에, 사모님 앞에서 낯을 붉혀야 하는 상황 역시 피했다.- P126
어디에도 가지 않게 된 토요일에, 나는 2학년 1학기 문학 조별과제 자료를 뒤적거리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말리의 일곱 개의 달』을 소개하는 PPT였다.- P126
물론 딴짓을 한다는 선택지도 있었다. 나는 침대에 드러누워서『말리의 일곱 개의 달』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수능이 네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잘하는 짓이다. 집중이 하나도 안 됐다.- P127
솔직히 말하면 나는 광주나 제주에 연고도 없는 애들이 한강의 작품에 나오는 5·18 민주화 운동이나 4.3 사건을 어떻게 자기 역사로 받아들이는지, 그게 정말인지가 항상 의아했다. 아니, 비단 근현대사뿐만이 아니다. 역사 전체가 그렇다.- P127
그러니까 나한테는 다른 사람들이 과거를 자기 세상의 일부로여기는 감각이 미스터리였던 거다. 보통 애들은 숨 쉬듯이 그 일을 하는데, 나는 그게 잘 안 된다. - P128
이런 젠장. 모두 헛생각이다.
나는 싹 관두고 스터디 카페에 가서 공부했다. 방학 내내 그랬다.- P128
삼거리 앞 공원에서 요한을 마주친 건 개학식 전날이었다.- P129
"방해하려던 거 아니니까 하던 거 계속 해라."
"응, 아니...... 나 원래 연속으로 네 개까지만 해. 다섯 개부터는 아직 안 돼."
"그래도 많이 늘었네."
승윤이 갑자기 요한을 붙잡고 턱걸이 강습을 시킨게 작년 말이었으니 그로부터 반 년이 지났다- P129
요한에게는 오늘 날씨나 점심 메뉴를 읊는 것과 똑같은 어조로, 위로가 필요한 종류의 문제를 태연하게 읊으면서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P130
"그거 나 때문일걸. 롤 하다가 싸웠거든. 서로 손절했어."
대뜸 이런 말을 꺼내는 게 현명한 판단인가? 잘은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 멍청한 짓을 너무 많이 한 상태였다.- P131
"둘이 언제 한번 싸울 거 같긴 했어서……………."
"승윤이 형이 너랑 게임할 때는 난리 안쳤냐."
"그냥...... 평소랑 비슷해. 그런데 롤 할 때는 살짝 심하긴 해."
"지랄한다는 뜻이네."- P131
"줄타기를 잘해야지. 선을 반드시 넘어야 할 때만 딱 넘고, 아닐 때는 사리고."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나도 잘 모른다. 모르니까 맨날 싸우고 혼자 다니는 거지."
요한은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툭 떨어트렸다.- P133
요한은 영어 성적 이야기를 꺼냈다. 영어는 녀석이 만점을 노릴 수 있는 유일한 과목이었고, 얼마 없는 자부심이기도 했다. - P134
"나는 내가 필리핀에서만 지냈으면 완전히 달랐을 거라고 생각해. 거기서는 이런 일이 없었거든. 예전엔 나도 공부 잘했어. 반에서 1등 한 적도 있고 친구도 많았어. 거기서는 내가 승윤이 형 포지션이었어. 진짜야. 그래서 더 돌아가고 싶은 건데……. (후략)."- P135
나는 내가 다른 곳에서 태어났더라면 어땠을지 떠올리기가 어려웠다.- P135
"예전에 내가 승윤이 형한테 고소 먹을 뻔했잖아."
예전에는 한국이 싫고 잘해 보라며 등만 떠미는 부모님도 싫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했다. 집에 틀어박혀 컴퓨터만 하는 동안 화나는 마음을 인터넷에 풀었다는 거였다. - P136
속으로 오래도록 다듬어 온 고민 같아서, 듣는 나도 양심이 찔렸다. PC방 엘리베이터 앞에서 승윤의 어머니를 들먹인 일은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비열한 짓이었다.- P137
이왕 기회가 닿았으니 요한에게 고해성사라도 해볼까?
하지만 승윤에게 사과하지 않는다면 자기 위안에 불과했고, 요한은 승윤의 집안 사정을 모를 거였다.- P137
‘예전에, 나 신경써준 거 알아. 고마워. 이거 진심이야."
요한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우물거렸다.- P138
"존엄이라든지 자존감 같은 거 있잖아. 위클래스 같은 데서는 싫은 건 싫다고 말해야 한다고, 자기 자신이 소중하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쉽게 말하지만 사실은 그게 전혀 아니라는 거 너도 알 거야. (후략)."- P139
"세상 분위기라는 게 바로 바뀌긴 어렵지. (중략).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무슨 일을 하든 자기 밥만 잘 벌어먹고 살면 부끄러울 거 하나 없다더라."- P140
나는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뭐 준비하는 거야?"
(중략).
"사실 그게 좀 그래서…………."
"응? 혹시 범죄는 아니지?"
요한은 화들짝 놀라서 손사래 쳤다.- P141
따로 공부한다는 게, 기술이나 자격증이 아니라 타갈로그어였던 건가?- P142
"차라리 영어 부업을 찾아봐라. 너 영어는 잘하잖아."
"요새 간단한 번역은 인공 지능이 다 해 줘서, 부업이 하나도 없대. 프로 번역가들도 일감 끊기는 수준이라잖아. 하지만 인공 지능은 상하차를 대신해 줄 수 없죠. 최후의 승리자는 상하차다."- P143
예전에, 요한에게 가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해 주려고 했던적이 있었다. 그때도 녀석은 필리핀으로 돌아가기 위해 돈을 벌고 싶어 했고, 엄마는 오래 일할 주방 보조 한 명을 구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둘을 연결해 주면 딱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한은 길게 고민하지도 않고 거절했다.- P144
가게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진지한 토론에 착수했다. 주제는 이랬다. 공부를 못하고 전문 기술도 없는 사람이 일자리를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 생각에는 운전면허부터 따야 했다.- P144
집게차란 ‘너클 크레인(Knuckle Crane)‘ 차량의 별명인데, 거대한 인형 뽑기 기계 팔이 추가된 트럭이다. 기계 팔로 산업 폐기물과 대형 쓰레기 들을 그러모아서 트레일러에 담고, 처리장과 고물상을 오가는 게 집게차 기사들의 일이다.- P146
나는 머뭇거리다가 그냥 말해 버렸다.
"승윤이 형한테 들었어. 그 형 아버지가 재활용 업체 운영하시잖아. 청죽면 쪽에 있는 거."
"어, 잠깐만, 나이스 타이밍. 저번부터 궁금했는데 김주현 얼굴 보기가 하도 어려워서, 이제 겨우 물어보네 둘이 싸웠지?"
"알고 있었네?"- P146
"생각해 보니 지금 타이밍이 되게 절묘하네. 안 그래도 거기 배달 가는 중이었는데."
"거기? 거기가 어딘데?"
"청죽면에 있는 그거. 사람들이 여기서 많이 주문하는데, 몰랐어? 배달 가면 가끔 사장님 계시는데, 내 얼굴도 아셔. 저번엔 승윤이 친구 왔냐고 하시더라."
놀라우면서도 놀랍지 않은 소식이었다.- P147
애들인데 사장님도 좋게 봐 주시겠지.
고등학생의 비열한 점은, 자기 좋을 때는 어른이고 찔리는 구석이 있을 때는 애 행세를 할 수 있는 나이라는 거다.- P148
(전략).
그런 식으로 끝마치고 보니 기도라기보다는 다짐 같은 게 됐다.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제게 이정엽 사장님을 만나 뵐 용기와 승윤이 형에게 사과할 용기를 주십시오. 딱 제가 잘못한 부분까지만요.- P151
기도가 무색하게도 나는 고물상에 들어가지 못했다. 승윤 어머니께 전해 듣기로는 이정엽 사장님께서는 초지일관 "싸우면서 자라는 거지 뭐." 하는 태도를 고수하셨다는데, 그 호쾌함이 뜻밖의 불안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P151
장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입장을 솔직히 밝혔을 때 승윤의 반응이 어떨지는 전혀 계산이 안 됐다.
"안 들어갈 거야?"
"어. 사장님 만나도 나왔다고는 하지 마."- P152
저 안에서는 아직도 누군가가 일하고 있는가 보다. 그 사람의 발밑에는 예전에 승윤이 자랑했던 그 먼지들이 내려앉아 있을까? 먼지처럼 곱게 갈린 금과 은과 구리가…………. 나는 마대자루 더미를 힐끔 봤고, 거기 담긴 고철들이 금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생경한 느낌을 받았다. - P153
"주현이, 오랜만이다!"
"아, 안녕하세요, 사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중략).
"그래, 그 부분은 잘 생각했다. 나한테 죄송할 게 아니라 싸운 녀석들끼리 화해를 해야지. 타라!"- P154
사장님은 큰 소리로 웃었다.
"나는 말이다, 꿈이 돈보다 중요하다는 말은 안 해. 나부터가 돈만지고 사는 사람이고, 인간은 돈이 없으면 비루해지고 비겁해지기가 너무 쉽거든. (중략). 무슨 말인지 아나?"- P155
"그런데 꿈을 아예 버리고 돈만 쫓으면 말이야, 인간이 영 볼품이 없어져. 그래서 그거는 네가 균형을 잘 잡아야 하는 거야. (후략)."- P155
"셋이서 승윤이 얘기를 했구먼?"
나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형이랑 싸운 건 제 잘못도 있긴 한데요......."- P156
나는 사장님이 저녁 식사 자리에서 동남아 사람들의 성실성을 칭찬할 때 내심 언짢아졌던 순간을 기억했다. 추측건대 사장님은 여전히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할 테고, 연장 근무와 초과 근무가 요즘 사람들한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를터였다. - P156
나는 그 사실에 감사했고, 사장님이 지금껏 베푼 호의에 다시금 고마워했지만, (중략).
승윤 생각이 났다. 나는 승윤과 진짜 결판을 내러 가고 있었다.- P157
"저번 일 관련해서 사과하러 왔어."
"사과하긴 뭘 사과해, 그때 이미 할 말 다 해 놓은 새끼가 지금도 별로 안 미안하지?"
"미안한 부분은 미안하고, 안 미안한 부분은 안 미안하고 그렇지."
"어, 바로 이런 태도, 미안한 부분은 뭔데?"- P157
"싸우다가 형 엄마 들먹인 거랑, 게임할 때 일부러 욕먹이게 플레이한 거. 그거 두 개. 그중에서도 특히 앞에 거.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
승윤은 나를 빤히 노려보기만 했다. 이런 식의 사과는 받고 싶지 않아서, 자신도 사과하지 않으려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미안하지 않은 걸 미안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P158
"됐다, 인마. 나도 6월 모의고사 얘기는 화가 나서, 감정이 격해져서 툭 튀어나온 소리지 니가 진짜로 그걸 계산해서 들이받은 거라고는 생각 안 했어. 넌 어차피 계산을 해도 실행할 능력이 안되는 놈 아니냐. (후략)."- P159
"여기서 딱 끝내고, 다 묻고, 쌤쌤인 셈 치자. 완전 리셋하는거야."
"어."
"그러면 수능 잘 쳐라."
"형도 수능 잘 쳐라."- P159
승윤은 내게 아직도 그 일을 기억하느냐고 물었지만, 사실은 승윤이야말로 더 오래 기억했을 것이다. 기억은 정말로 이상한 작업이다. 현재의 시선으로 과거를 곧장 바라보고, 거기에서 본 것들로 다시 미래를 만들어 나간다는 점에서 그렇다.- P160
아니, 나는 사장님처럼 나이 들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이 될까…………….
먼 미래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나는 아직 나라서, 그냥 집까지 쭉 달렸다.- P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