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우미
01
"히로미, 신경과에 한번 가 보는 게 어떻겠니?"
퇴근길에 들른 카페에서, 같은 기획사 도우미 아츠코가 한참 망설이던 끝에 그렇게 말했다.- P9
지난달부터 몸이 불편했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고, 밤에는 잠을 못 잤다. 숨쉬기도 힘들었다. 가슴이 찌릿찌릿 아플 때도 있었다.
원인은 잘 알고 있다. 누군가가 뒤를 밟기 때문이다.- P10
그 색골 놈 때문이야. 지가 뭔데 내 허리에 손을 둘러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데, 대각선 방향에서 께름칙한 시선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그러나 바라보는 사람은 없었다.- P10
스토커를 담당하는 여경이 상대의 인상을 물었다.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원래 스토커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선을 느낍니다."
"어디서든 늘 나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30분을 설명하자, 여경과 아츠코는 당혹스런 표정을지었다. 여경은, 상대를 목격한 다음에 오세요, 하고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아츠코는 생각에 잠겼다.- P11
그 후에도 아츠코에게 몇 번에 걸쳐 현 상황을 설명했다. 아츠코는 응응, 하고 대화에 응해 주긴 했지만,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히로미의 건강에 대해 걱정했다.
아무래도 정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P12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이라부 종합병원‘ 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P12
이라부 종합병원의 신경과는 지하에 있었다.
아침에 거울 앞에 서서 피부가 거칠어진 것을 보고서야 결심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일에 지장을 주고 말 것이다. 겉모습은 히로미의 생명줄이다.- P13
"스물네 살에 직업은 탤런트 겸 모델, 정확히 무슨 일을 해?"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어시스턴트도 하고, 잡지 모델도 해요."
사실 일의 태반은 이벤트 도우미지만, 예전에는 그런 일도 했었다.- P14
"주사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놈으로, 한 방 놔줄게."
•증상 같은 거, 안 들어도 돼요?"
"그런 건 나중에 어~이, 마유미짱."- P14
주사를 맞고, 다시 이라부와 마주하고 앉았다. 아까보다 거리가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중략).
"나도 독신이지, 우후후후."
(중략).
"이 병원의 후계자야. 자가용은 포르셰, B형에 천칭자리."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야. 당신이 왜 자기소개를 하고 그래?- P15
"히로미짱은 왜 불면증에 걸렸을까?"
갑자기 왜 ‘짱‘ 이야. 히로미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P16
다시 한 번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요컨대 그 스토커는 하이힐을 신고, 완벽하게 화장을 한 스크린 속의 여배우에 대해 망상을 품었던 거야. 그러니까 실물을 보고 낙담한 거고. 히로미짱도 맨얼굴로 나가 보지 그래."
이라부를 다시 보았다. 그렇게 멍청이는 아닌 것 같았다.- P17
"자, 그럼 한동안 통원 치료를 받도록 해. 컨디션을 조절해주는 주사를 놓아 줄 테니까."
이라부는 다시 잇몸을 드러내 보였다. 이런 데서 통원 치료를 받아? 그러나 예, 하고 대답했다.
음침한 의사 같지만, 혼자서 고민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P18
2
다음날은 국제전시장에서 열리는 게임 쇼에 도우미로 나갔다. 계약한 메이커의 부스에서 팸플릿을 나누어 주고 상품에 대해 설명하는 일이다.- P19
히로미는 상품 옆에 서서 고객들에게 웃음을 던진다. (중략).
"히로미."
아츠코가 낮은 목소리로 다가왔다.
"주오 텔레비전의 <투모로>가 와 있어."
"거짓말"
히로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주오 텔레비전의 <투모로〉는시청률이 가장 높은 심야 정보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보물섬>도."
<보물섬>은 젊은 남자들에게 인기를 끄는 사진 잡지다.- P20
그러나 싫은 것만은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사진을 좋아했다.
파스너의 효과 때문인지, 카메라 렌즈가 히로미 쪽으로 집중되었다.
플래시가 연속으로 터졌다. 셔터 누르는 소리, 소리남에게 주목받을 때의 쾌감이 히로미의 가슴속을 가득 채웠다. - P21
잠시 후, 카메라 렌즈가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 본다. 같은 사무실에 소속된 19세의 에미린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플래시 세례를 받고 있다.
뭐야, 데뷔도 안 한 주제에 예명부터 지었어! 너, 가슴에 껌붙였니?- P21
당연히 내가 이기지, 전문대생의 아르바이트와는 격이 달라.
5년의 커리어를 자랑한다.- P22
수염 난 카메라맨이 도우미들을 둘러보았다. (중략).
아츠코는 지명받지 못했다. 불쌍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츠코는 아마도 평범한 주부가 될 것이다. 성격은 좋지만 화려하지는 못하다.
"자, 웃어!"- P22
카메라맨의 손가락이 한층 더 바쁘게 셔터를 눌러댄다.
촬영이 끝나자 기자가 다가왔다.
"이름과 나이, 쓰리 사이즈를 좀 가르쳐 줘."
가벼운 어투로 물어 온다.
히로미는 나이를 두 살 속이고, 쓰리 사이즈는 상하를 살짝늘리는 대신 가운데를 조금 줄여서 말했다.- P23
<투모로> 팀이 나타났을 때, 히로미는 가슴의 파스너를 2센티미터나 더 내렸다.
이벤트는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격렬한비트의 BGM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히로미는 가슴을 흔들며 춤을 추어 보였다.- P24
어느새 서로 밀치고 당기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결국 히로미는 중심에서 밀려났다. 이 여자들, 왜 이렇게 천박해!
나도 질 수야 없지. 히로미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슴의 파스너를 1센티미터 더 내리고, 여자들 틈으로 뛰어들었다.
문득 스테이지 아래를 내려다보니, 중년 사원 하나가 입을 헤벌쭉 벌리고 있었다.- P25
자신의 원룸으로 돌아온 것은 11시가 넘어서였다. 히로미는샤워를 하고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오늘 쇼가 방영되는지 체크하기 위해서였다.
(중략).
배달을 시키려면 호텔 레스토랑 정도는 돼야지. 도우미들은 모두 불만스러워 했다.- P25
"약을 먹어도 잠이 안 온단 말이지."
이날 이라부는 머리에 기름을 발랐다. 이발을 한 듯, 지난번 같은 그런 불결한 느낌은 안 들었다. 가운도 풀을 먹여 다려 입었다.
"아, 좀 약한 놈이었으니까. 오늘은 좀 더 센 놈으로 줄게."- P27
오늘도 화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스커트는 미니로 골랐다.
오후부터 큰 대리점에서 다음 일과 관련된 미팅이 열린다. 다른 도우미들은 화려하게 꾸미고 나타날 것이다. 자기 혼자 화장도 안 하고 후줄근한 차림으로 갈 수야 없지 않은가.
"여전히 누군가가 미행하고 있어?"
"그래요. 아침에 집을 나설 때부터 시작되는걸요."- P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