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나 쿠마란 여사님은 스리랑카를 어찌나 싫어하시는지 내가 도서관에서 여행 가이드북이라도 빌려오면 잔소리를 했다. 공부에 도움 될 책은 안 보고 놀 생각만 한다는 거였다. 하지만 홍콩이나 중국 가이드북은 보고서도 아무 말않았던 걸 보면 엄마는 그냥 자기 고향이 싫었던 거다.
(중략).
엄마의 나라는 이제 확실히 한국이다.- P58
스리랑카는 인도 반도 오른편 아래에 자리 잡은 섬나라로, 한때실론(Ceylon)이라고도 불렸다. ‘실론 티‘의 이름이 바로 여기에서 왔다. (중략).
스리랑카 인구의 8할가량은 싱할라족이고 2할은 타밀족이다(물론 이보다 인구수가 더 적은 소수 민족들도 있다).- P60
스리랑카 내전은 1983년 7월 23일에 시작되어 2009년 5월 18일에 끝났다.
정말이지 많은 사람이 죽었다.
나는 스리랑카 내전에 대해 알게 된 후로, 엄마가 고향 이야기를 결코 하지 않으려는 건 그것 때문인가 궁금해하곤 했다. - P61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역사를 잊은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격언에 선뜻 동의할 입장이 못 됐다. 일단 내가 한민족인지 타밀족인지를 확실히 정해야만 역사를 잊든 말든 할 텐데, 나는 둘 사이에서 애매하게 흔들리는 듯했다.- P62
하지만 사실 나는 아직도 진짜 고향이 가지고 싶다. 명절마다 시골집에 들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P64
지방 일반계 남자 고등학교답게 내신 성적은 나 몰라라 하는 그룹과 심화 자습실 출입권이 있는 그룹이 확연히 나뉘었고, 우리 팀은 명백히 후자였다. (중략). 상을 위한 전략적 제휴라고나 할까.- P66
"재밌어 보이긴 하는데 소개하기가 어려울 거 같지 않냐. 한강으로 가자. 4.3이나 5·18 같은 건 우리나라 일이고, 노벨문학상까지 받았잖아. 딱이네."- P66
"일반적으로 공감이 되는데 참신한 주제가 있긴 해? 어차피 한국 소설이면 민주화 운동이거나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이거나, 둘중 하나 아닌가? 조선 시대로까지 가면 너무 멀고."- P67
"(전략). 다문화 아니냐, 다문화, 대학에서 생기부 볼 때 인성도 평가하는데 다문화 관련 내용 있으면 점수 더 줄걸. 나중에 국어한테 세특에 그거 강조해 달라고 하자. (후략)."
윤재민이 ‘세특‘, 즉 세부 사항 및 특기 활동을 조커 카드처럼들먹이더니 열변을 토했다.- P68
입학 사정관들은 학생 생활 기록부를볼 때 성적뿐만 아니라 활동 내역도 함께 고려하는데, 요새는 동아리나 봉사 활동 기록을 잘 보지 않게 된 탓에 교과 세특이 훨씬 중요해졌다고 했다.- P68
"입학 설명회에서 그렇다고 한 걸 왜 나한테 따져. 애당초 세특 평가에 인성 항목 들어가는 거 몰랐어? 알잖아? 공동체 역량, 협업과 소통 능력, 나눔과 배려…………."
"알긴 하는데 지금 그 얘기 나오니까 이상해서 그러지."- P69
원한 대로 결론이 난 것과 별개로 기분이 묘했다. 아버지의 유품처럼 소중한 물건을 중고로 팔아서 오만 원을 챙기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니, 그런 물건이 알람 시계로 쓰이는 광경을 보는 느낌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P69
호기롭게 말을 꺼낸 만큼 조별 과제를 끌고 나가는 건 내 역할이 됐다. (중략). 예나 지금이나 한국에서 찾을 수 있는 자료는 터무니없이 부족했고, 설상가상으로이 일에는 다른 애들의 생기부가 걸려 있었다(도대체 생활 기록부가 뭐길래!).- P70
. 심지어 『말리의 일곱 개의 달』은 동성애자의 삶도 핵심 주제로 다루고 있었다. 하지만 디테일을 완전히 쳐내면 ‘전쟁은 부조리한 비극이며 모든 이의 삶을 희생시킨다‘는 수준의 공허한 이야기만 남았다. - P71
엄마한테 물어보면 뭐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속 시원한 대답은 듣지 못하겠지만, 엄마가 말하지 않으려는 것에는 기사 수 천 줄보다 더 깊은 기억이 숨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P72
"사고가 안 난대도 지금 천만 원, 이천만원 모아서 무슨 소용이래니, 평생 가는 밑천 쌓아야 할 시기에, 응? 수능 등급 한 칸이라도 올려서 좋은 데 가는 게 돈값 하는 거 모르니. 고등학생 때 하는 공부가 삼십 년치 적금이야."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학원에 다니면서 성적이 올랐을지라도 의대 커트라인에는 여전히 못 미쳤다.- P73
"이민을 갈래도 기술이 있고 배운 게 있어야지, 몸만 덜렁 있으면 그걸 어느 나라에서 받아 준대니. 영어를 잘해야 해. 읽고 문제 푸는 것만 잘해서 될 일이 아니라, 스피킹이랑 리스닝 알지?"- P74
"나는 한국이 안 익숙한데, 엄마한테는 스리랑카가 안 익숙한가?"
엄마의 새까맣고 깊은 눈이 나를 빤히 들여다봤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우리 둘 다 아주 오랫동안, 아무 말도 없이 그러고만 있었다.- P75
결국 엄마가 고개를 휙 돌렸다. 한숨 같은 말들이 들려왔다.
"몇 번을 말해야 알겠어? 아주 끔찍하다, 응? 돈만 잘 벌면 되는나라에서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공부가 힘들다면 그나마 이해가 간다. 도대체 뭐가 어렵고 힘들다는 거니. 뭐가 어려워서 엄마한테 이래 들어가서 공부나 해, 공부나 빨리."- P76
『말리의 일곱 개의 달』은 원래 ‘악마의 춤‘이라는 제목이었고훨씬 난해했다고 한다. (중략). 스리랑카 현대사를 모르고 힌두의 신들이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문턱을 낮췄다는 거였다. 아쉬운 쪽이 양보하게 되는 건 만국 공통인 모양이다. 재미는 중요하다. - P77
말인즉슨 해방 호랑이 반군의 프라바카란 사령관은, 인간 흉기로 유명한 나치 장교인 오토 스코르체니나 성격은 나쁘지만 끝내주게 잘 싸운 미국 사령관 조지 패튼 같은 사람들처럼 얄궂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 P78
이런 젠장, 나는 열일곱 살이다…………. 열일곱은 전쟁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지는 나이 아닌가?
때때로 내가 엄마의 아픈 기억을 배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이게 그토록 심각해질 문제인가 싶기도 했다.- P79
(전략).
하여간 다른 팀원들의 생활기록부에 타국과 ‘우리‘가, 내 생활기록부에 타국과 ‘한국‘이 짝지어진 데에는 별다른 의도가 없을 것이다. 문장을 만들려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 교사는 최선을 다한 거다.- P80
내가 생각하기에 어딘가에 온전히 소속된다는 것은 캐리커처에 갇히지 않을 권리를 가지는 것이다. 놀이공원이나 특색 있는 카페에서 흔히 보이는, 익살스러운 그림이 있잖은가.- P81
학교에서 나를 사령관이라 부르지 않는 사람은 승윤이 유일했는데, 그게 다행인지 아닌지는 판단이 안 선다. (중략). "야, 반군 새끼야, 빨리 탑 오라고!" 나는 승윤이 차라리 평범한 욕을 하길 바랐다.- P83
사랑이나 돈은 늦게 올 수도 있지만, 정글은 늦게 오면 안 된다.
탑 여러분! 지는 건 여러분의 잘못이 아닙니다. 정글 잘못입니다.
탑 프로게이머들의 명언이다. 그리고 승윤이 가장 좋아하는 명언이기도 하다.- P84
"게임을 이기려고 하냐, 즐기려고 하는 거지. 너도 스트레스 받지 말고 하고 싶은 거 재미있게 해."
"난 이겨야 재밌다. 진지하게, 내가 판마다 1.5인분 하고 있으니까 겨우 이기는 거지, 나까지 형처럼 하면 승률이 어떻게 되겠어."
"그러면 니즈가 딱딱 맞네. 나는 재미있는 거 하고, 너는 게임 이기고 하던 대로 하면 되는 거 인정?"- P85
게임 때문에 학원 혜택이 끊길 리는 없겠지만 사람 심리라는게 그렇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즐기는 척했다.- P86
물론 그건 자기 합리화다. 나도 안다. 2학년 말에 이르러 나는나를 사령관님이라 부르는 애들과 약간 친해졌고, 승윤과는 묘하게 서먹해졌다.- P86
고3을 목전에 둔 11월이었다. (중략).
사람들이 말하기를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은 살인적인 공부량에 짓눌린다지만, 내가 보기에는 꽤 많은 학생들이 책만 펼쳐 놓은 상태로 딴짓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 P87
스터디 카페에서 승윤을 만났는데, 점심 먹으러 가기 전에 한 판만 하자며 PC방에 들어섰다가 요한을 마주친 상황이었다. (중략). 그 대안으로 고른 게 ‘발로란트‘였다.- P87
요한이 우물거렸다.
"그냥이 뭐야, 그냥이.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롤에서만 그런게 아니라, 평소에도 보면 말하는 게 항상 답답하고 그래. 왜지?
자신감이 부족해서 그런가? 발로란트는 남 가르칠 만큼 잘하는데다른 건 딱히 그 정도는 아니라서?"
"응. 자신감이 부족해서………………"- P88
나한테는 나대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일단 첫째, 나는 아침 아홉 시 삼십 분에 스터디 카페에 도착했다. 둘째, 지금은 밤 아홉 시 사십 분이고 휴대폰을 보니 엄마의 부재중 전화가 다섯 통이나 찍혀 있었다. 그걸 보고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P89
"야, 너 턱걸이 연속으로 몇 개까지 되냐?"
질문이 날아든 건 소공원을 낀 삼거리에서였다. 보통은 이 자리에서 요한은 왼쪽으로, 승윤은 오른쪽으로, 나는 직진하며 헤어진다.- P90
그런데 이제 보니 나는 미끼였던 모양이다. 승윤은 턱걸이를 몇 개나 하냐며 요한에게 질문을 던졌다. 녀석은 난색을 표했다.
"아마 한 개도 안 될걸 난 운동 거의 안 해서......."
"야, 말 잘했다. 처음에는 누구든지 간에 0개부터 시작하는 거아니겠냐. 십 분 안에 생초보 탈출시켜 줄 테니까 와 봐. 넌 이거 여기서 안 배우면 돈 내고 배워야 돼, 김주현, 장갑 토스."- P92
엄마 목소리에 잔뜩 날이 서 있었다.
"게임이 문제가 아니야. 아침 아홉 시에 나간 애가 밤 열시까지 그러고 있는 게, 그게 곧 고3 올라가는 애가 할 짓이니, 응? 머리도 쉬일 겸 한두 판 하는 건 엄마도 이해하는데 열세 시간씩 컴퓨터 앞에 앉아서 연락도 안 받고 뭐하자는 거야."- P93
해명을 하더라도 얼굴을 보고 해야 할 모양이었다. 사실 해명한다고 해서 풀릴 문제가 아니었다. 사정을 솔직히 털어놓더라도
"그러면 네가 딱 끊어야지. 승윤이 형한테 가서 게임 접었다고 그래."라는 대답만 들을 게 뻔했다.- P94
"봐라, 하니까 되잖아. 한 번만 더 해 보자."
요한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는 게 멀리서도 느껴졌다. 두 번째 시도까지 성공하려는 순간 손힘이 풀리며 녀석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P95
무슨 변덕인가 싶던 찰나 승윤이 관객을 의식하는 배우처럼 나를 힐끔 바라보았다. 기분 탓일까? 요한을 왼쪽 길로 먼저 보낸 뒤 함께 벤치에 앉자마자 그 눈짓의 정체가 분명해졌다.- P95
"와, 뭐지. 형이 이러니까 낯설다. 뭐 잘못 먹었나."
"하여간 사과를 해도 곧이곧대로 듣는 법이 없어. 성격 어지간해. 사회성이라는 게 없어."
"형 성격도 만만찮은 거 알지?"- P97
"통화하는 거 대충 듣긴 했어."
"난 게임 진짜 접어야겠다. 앞으로는 형이 불러도 안 할란다."
"뭐, 이제 서로 고3 생활 시작이니까……… 나도 줄여야지."
승윤은 선뜻 고개를 끄덕이더니 스트레칭하듯 깍지 낀 손을 앞으로 쭉 뻗었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P98
곧 승윤이 운을 뗐다.
"그나저나 3학년 수요 조사 등록했냐."
(중략).
"야, 오늘이 조사 마지막 날인데 그걸 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루고 있네. 지금이 이미 오늘 밤이야. 시간 봐라. 열 시 이십오분."- P98
3학년 수요 조사란 문자 그대로, 내년에 특정 과목을 수강할 학생이 몇 명일지 알아보기 위해 학교 차원에서 진행하는 설문이었다.- P99
"아니, 내신 버리는 것까지도 이해가 되는데 왜 세계지리냐고. 어차피 그것도 개설 거의 안 되는 과목 아니야? 작년엔 열렸던가?"
나는 구구절절한 설명을 늘어놓고 싶지 않아서 망설였다.- P100
나는 괜찮은 대학을 나와서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취직하는 삶을 상상했지만 꿈꾸지는 않았다. 그런 미래는 식당 앞에 설치된 음식 모형 같았다.- P100
구현동에서는 큰 문제가 없다. 그곳 사람들은 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정확히 구분하진 못할지라도 파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이나 말레이시아 같은 나라 이름은 많이 알고, 나한테는 "부모님이 파키스탄에서 오셨냐?"라며 묻는다. - P101
반면 대치동에서는 사람들이 나를 힐끔힐끔 바라보지만, 그러면서도 너는 누구냐고는 결코 묻지 않는다. 묻지조차 않는단 말이다.- P101
이왕 꿈을 꾼다면 거창하고 엉뚱스러운 게 좋으리라고도 느꼈다. ‘스리랑카 문화 연구자‘라거나 ‘세계 분쟁 전문 탐사보도사진기자‘ 같은 것 말이다. 이과 적성을 살린다면 이론물리학자도 괜찮을 테다. 앞의 둘과는 마땅한 공통분모가 없는 직업이지만, 생계유지가 어렵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니까.- P102
아하, 이게 핵심이었군.
나는 승윤이 수요 조사 마지막 날에야 이런 부탁을 건네는 까닭을 헤아려 봤다. (중략).
"그러면 화학 누구누구 듣게 되는데?"- P103
"요한은 어차피 대학 갈 생각 없어 보인다만, 정노아도 화학 듣는다니 신기하네. 기본적으로 문과 아닌가."- P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