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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들어, 이 친구가 이야기한 건 좋은 영화를 만들자는 거야.
착각하지 말라고. 욕실 장면을 다시 찍자는 이야기가 아냐."
호소카와가 미스즈를 바라보며 못 박듯이 말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제대로 된 영화로 마무리하기 위해서는역시 내가 범인이어야 해."
"무슨 소리! 당신 따위가 사람을 죽일 수나 있어?"
"어머머!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는 것처럼 말하네?"- P167
5장

범인이 너무 많다


1

오 분 휴식을 취한 뒤 다시 회의가 열렸다. 사람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자마자 가장 먼저 손을 든 사람은 여느 때 같으면 나이든 집사처럼 조용히 있을 야부우치였다.- P171
"설마, 그래서 야부우치 씨까지 자신이 범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야부우치는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특별히 다른 분들 의견에 반대할 생각은 아니지만, 열쇠를 보관하던 사람은 야부이입니다. 그러니 범인이 되기에 가장 적합하지 않나요?"- P172
"범죄는 단순할수록 성공하기 쉬운 법입니다. 잔재주를 부리면 쉽게 들통 나기 마련이에요."
특별히 독창적인 의견도 아닌데 왠지 모두를 납득시켜버리는 무게가 그 말투에 담겨 있었다.- P172
"지금은 상대방 추리의 결점을 지적하지 맙시다. -야부이가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일단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면 범행의 동기로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야부우치는 미소 지었지만 눈은 웃지 않는 것 같았다.
"복수겠죠."- P173
"그러면 다쓰미가 뒤쫓고 있는 남자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히사모토가 마무리가 될 질문을 던졌다. 야부우치는 답을 준비해둔 상태였다.
"아마 사기누마 준코의 자살 원인, ・・・・・・ 또 한 가지 원인과 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P174
나는 머릿속으로 완성된 필름을 떠올렸다. 고발하는 다쓰미 앞에서 담담하게 자백하는 야이 노인. 컷백 기법을 이용한 범행 현장은 폭력 묘사를 최대한 억제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래도 충분히 충격적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동기에는 구원이있다.- P175
느닷없이 히사모토에게 호명된 호소카와는 얼굴을 찌푸리며퉁명스럽게 말했다.
"마무리가 별로 산뜻하지 않아요. 아니, 이렇게 전형적인 집사가 범인이라니. 미스터리에서는 가장 낡은 수법 아닌가요? 난 마음에 들지 않는데."
"그, 그래. 너무 뻔하잖아."
미스즈가 덧붙였다. 둘은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P176
히사모토는 누가 또 쓸데없는 소리를 할까 두려운지 빠른 말투로 이야기했다.
"잘 알았습니다. 몇 가지 수수께끼를 잘 풀어낸 시나리오였다고 생각합니다. 호소노 의사, 사기누마 이스즈, 야부이 노인. 이제 이렇게 세 사람이 범인일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게 됐군요."- P177
"....설마, 자네까지 자신이 범인이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닐 테지?"
히사모토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표정에는 이미 체념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다카히로는 소년답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P177
2


"전 추리소설을 별로 읽지 않지만 기본은 알아요. 첫째, 범인 같지 않은 인물이 범인이다. 그렇죠? 그렇다면 바로 저죠. 다들제가 범행을 저지를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범행이 불가능하니까 자기라는 것이다. 분명히 말도 안 되는 논리지만 드라마 만들기라는 측면에서 보면 타당한 의견이다.- P178
설마하면서도 다카히로가 너무 자신 있게 말하는 바람에 나도 기대를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밀실 트럭? 아무리 대단한 트릭이라고 해도 스토리앞부분과의 정합성이 없으면 곤란해."- P179
"이 저택의 문에 달린 잠금장치는 열쇠구멍이 있는 구식이잖아요? 다카오는 그 구멍으로 풍선을 밀어 넣었어요. 바람을 넣는 주둥이 부분은 밖에 남겨두고 밖에서 바람을 불어넣었죠."- P180
"풍선에 미리 형광도료로 악마의 얼굴처럼 무서운 그림을 그렸어요. (중략). 그러고는 패닉 상태에 빠져 비명을 지르며 창밖으로 도망치려다가 추락. 어때요? 대단한 트릭이죠?"
다들 입을 다물었다.- P180
"아, 그래. 그랬구나. 형광도료로 그린 무서운 얼굴이다. 이거지? 형광도료로 그린 무서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창밖으로 떨어졌다. 이런 이야기야?"
"네, 그렇습니다."- P181
왠지 탐정영화라기보다는 앙팡 테리블, 즉 ‘무서운 아이‘가 주제가 돼버린 듯하다. 뒤집어 말하면, 그런 영화라면 다카히로가 생각한 것 같은 프라버빌러티 (확률)의 트릭도 써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탐정영화>에는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P182
"맞아요! 다카오는 윤리관이 부족한 아이였어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그렇게 무관심한 태도도 어딘가 이상하잖아요? 가까이서 지켜본 큰어머니의 죽음도 어떤 영향을 미쳤겠죠."
갈수록 앙팡 테리블이군.- P183
(전략).
"가장 중요한 가능성…………이라면?"
"가장 중요하고, 게다가 가장 그럴듯한 가능성이죠. - 하야시 간호사는 자살한 거예요. 그게 가장 자연스러운 발상 아니겠어요? 어쨌든 방은 밀실 상태였잖아요."- P184
"물론 그건 저도 알아요. 살인이 아니라 사실은 자살이었다는 것만으로는 이야기가 되지 않겠죠. 하지만 사건은 하나만이 아니에요. 행방불명이 한 건, 자살로 보이는 죽음이 한 건. 그게 모두 하야시 간호사가 저지른 살인이었다면 충분히 이야기가 되지 않겠어요?"
호소카와는 불편한지 꿈지럭꿈지럭 엉덩이를 움직였다.- P184
3

이렇게 제1회 ‘범인 맞히기 회의‘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로 끝났다. 각자 내일까지 의견을 정리해 오기로 한다는 숙제를 안은 채 잠깐 의논하면 결정될 정도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건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혼란스러웠다.- P186
(전략).
괜히 전화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부러 한숨을 푹 내쉬며 일걱정이나 하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범인이다.- P189
여기서 마칠까 생각했지만 내친김에 모두 적어두기로 했다.

하야시 간호사 자살설

밀실이라며 소란을 떨어놓고 사실은 그냥 뛰어내려 자살한 것이라고 마무리하면 맥이 빠질 수밖에 없다. 다만 사기누마 준코의 자살이 사실은 타살이고, 살인으로 보이는 하야시의 죽음은 그냥 자살이란 구도 자체는 재미있을 수도 있다. (흐략).- P191
여기서 잠깐 재미있는 가능성을 생각해봤다. 다쓰미가 들은 비명이 혹시 이스즈가 지른 비명이었다면? 물론 실제로 그 비명은 모리 미키, 즉 하야시 간호사가 지른 것이지만, 관객은 그걸알 길이 없을 것이다.- P192
나는 노트를 다시 쭉 훑어보고, 역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모두 이 안에 있다는 확신을 품었다. 하지만 과연 어느 것일까? 어느 경우가 가장 재미있을까? 임팩트 있는 가능성은? 정합성은?- P193
인스턴트커피를 후룩거리면서 시나리오를 다시 읽던 나는 머릿속으로 러시 상영 때 봤던 영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P194
4

"전화 연결이 안 된다고?"
호소노가 뒤돌아보며 야부이에게 야단치듯 물었다.- P194
다쓰미는 그렇게 말하고 곧바로 응접실에서 나가려고 했지만 입구에 있던 야부이 노인은 비켜서주지 않았다.
"사모님은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다쓰미가 츠츠 혀를 차며 언성을 높였다.
"또 그 소리예요? 사람이 죽었잖습니까. 그런 핑계는 통하지않아요."- P197
"사, 사기누마 씨를 봤단 말인가?"
"아뇨, 야이 씨가 그분 방문을 잠그는 걸 봤죠. 밖에서 말입니다. 밖에서 문을 잠그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P197
다쓰미는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고발하듯 내뱉었다.
"혹시 사기누마 준코 씨가 여기 없는 거 아닙니까?"
"없다니 ・・・・・・ 대체 무슨 뜻이지? 여기가 사기누마 준코 씨 집인데 아니라고 우길 작정인가?"
파랗게 질린 호소노 의사가 언성을 높였다. 다쓰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죠. 저는 저 침실에 지금 사기누마 준코 씨가 없는것이 아니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P198
호소노는 시체를 흘끔 내려다보고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관계가 있다마다요. 그분이 방에 진짜 있다면 바로 옆방에서 난 비명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고, 들었다면 당연히 무슨 일인가 싶어 밖으로 나오거나 사람을 불렀을 겁니다. 그분은 왜 그러지 않았을까요?"- P199
5

(전략).
얼굴은 아주 잠깐 보였지만 뒷모습과 걸음걸이만 봐도 충분했다.
작은 머리통에 벗어지지는 않았어도 두피가 들여다보일 듯이 성긴 머리카락, 더부룩하게 엉클어진 머리. 곰 같은 등짝. 야구 글러브처럼 큼직한 손(그 손으로 탁 치면 무척 아프다). 짧고 굵은 다리. 고릴라 같은 걸음걸이. 틀림없다. 우라질 오야나기 도시조다!- P200
경찰? 적당히 둘러대서 감독을 붙잡아두게 할 순 없을까? ‘지난번에 제 가방을 날치기한 남자가 우연히 텔레비전에 나왔습니다.‘ 그러면 어떨까? 법적으로 문제가 될까?- P201
나는 쭈뼛쭈뼛 호텔 입구로 들어가려고 했다.
"야, 너 어디 가냐?"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제복경찰이 나를 불러 세웠다. 내가 아무리 번듯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다짜고짜 ‘야, 너‘라는 소리를 들으니 발끈했다.- P202
살찐 호텔 직원이 물었다.
"마키노 마사히로…………… 이런 이름을 쓸 텐데요."
직원은 숙박부를 뒤적이더니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 분은 투숙하지 않았는데요."
"어쩌면 가짜 이름으로…………… 아뇨, 다른 이름을 썼을지도 몰라요. 미조구치 겐지¹같은 이름으로・・・・・・ 어쨌든 이게 그 사람사진입니다. 묵고 있죠?"


5장

1. 미조구치 겐지, 溝口健二, 1898~1956.
- P329
"네, 투숙하셨습니다. 존함은...... 야마나카 사다오시군요."
그렇구나. 야마나카 사다오. 과연 그 감독 이름을 썼구나. 마키노 마사히로는 같은 촬영소를 쓰는 감독이다.

2. 야마나카 사다오, 山中貞雄, 1909-1938.- P203
"네. 이분은 직접 숙소를 구하겠다고 하시면서 손님이 오시기직전에 나가셨습니다."
그런 소릴 왜 이제 하는 건가! 속으로 버럭 소리쳤지만 겉으로는 방긋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하고 호텔에서 뛰어나왔다.- P204
6장

시나리오 콘테스트


1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는 보고를 하기는 내키지 않았지만 히사모토에게만은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일의 전말을 이야기했다.
"텔레비전에 자기 모습이 비친 걸 눈치채고 도망친 거로군. 뭐. 그게 너 때문은 아니지."- P209
오늘은 회의를 통해 의견을 결정해야만 한다.
하지만 뭔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는 느낌이 회의하는 내내 가시지 않았다.- P210
2

"어제는 연기자들만 발언했으니 오늘은 우선 스태프의 의견을 중심으로 들어보고 싶군요. 그럼 먼저 연출부부터 하겠습니다. 어이, 서드."
가장 만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뜸 나를 지목했다.- P210
"좋긴 뭐가 좋아! 그 비명은 하야시 간호사가 지른거야. 이스즈 목소리가 아니라니까."
"아니, 호소카와 씨. 소리를 듣고 그게 모리라는 걸 알아? 여자비명은 누구 목소리인지 알 수가 없어."
"알고 모르고 문제가 아니잖아? 그 목소리가 이스즈-당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어 그 사실을 뒤엎는 결말은 만들어낼 수 없어."- P211
"하지만 성문이라는 것도 있잖아? 목소리에도 지문처럼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특성이 있어."
"물론 그렇죠. 하지만 그건 장비가 있어야만 알 수 있어요. 관객이 장비를 갖고 들어와 이스즈의 목소리이기 때문에 말이 안된다고 주장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결국 호소카와도 항복했다.- P212
호소카와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전원 공범이라니, 그러면 의미가 없어. 그래야만 가능한 범죄도 아니고, 역시 이건 단독 범행이라야 해."
야부우치도 같은 의견인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P213
"저, 저는 야부이가 범인인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사기누마 준코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는 동기로 관객을 울릴 수도 있겠죠."
스도에게 좋은 영화란 ‘눈물이 나오는 영화이고 ‘눈물이 나오지 않는 영화‘는 좋지 않은 영화다- P214
호소카와가 연기자를 대표하기라도 하듯 말했다.
"지금 단계에서 한 가지로 좁히는 건 성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몇 가지 후보를 남겨두고 그것들을 좀 더 구체화해보는 겁니다. 병행해서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만드는 것도 좋을지 모르겠군요. 어느 것으로 하느냐는 그 다음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P215
호소카와의 의견은 옳았다. 세트도 이미 만들어져 있고, 스태프나 연기자도 충분할 정도로 작품에 녹아든 상태다. 정확한 지침만 있으면 촬영 자체는 단숨에 끝날 것이다.- P216
"다른 의견 있는 분, 계십니까?"
히사모토가 묻자 야부우치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한 가지 물읍시다. 그 시나리오 콘테스트는 대사나 장면이 멋지다는 이유로 우열을 가리진 않겠죠? 이번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스토리일 테니까…………"- P217
히사모토가 덧붙였다.
"물론 혼자서 써도 괜찮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써도 상관없습니다. 최종 시나리오는 각 파트의 감독과 의논해서 결정하겠습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이만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P217
나는 스스로를 위로하듯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위화감은 대체 뭐지?- P218
3

(전략).
미즈노가 이렇게 쓸데없는 참견을 즐기는 녀석인지 몰랐다.
"내가 몇 번을 얘기해! 화해고 뭐고 우린 애초에 다투지 않았다니까. 미나코 혼자 뭔가 오해하고 화내는 것뿐이라고. 어제 내가 미나코에게 전화까지 했다니까."- P219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상황과 딱 맞는 영화는 바로 떠올랐다. <개선문>,⁴ 여배우는 물론 잉그리드 버그먼이다.



6장


4. 개선문, Arch Of Triumph, 1948.-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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