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카와는 잠깐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고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잘 들어. 어쩌면 내가 살인범일지도 모르잖아. 그렇다면 대체 어떤 동기로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는가,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 연기할 준비를 할 수 있잖아? 대본을 받자마자 무시무시한범인의 모습을 연기하라고 하면 그건 무리지."
호소카와는 자신이 마치 대단한 배우나 된 것처럼 말했다.- P75
대꾸하려는 호소카와 옆에서 하스미가 툭 내뱉었다.
"......난 이 영화에 걸었어."- P75
미스즈는 하스미가 아니라 마치 자신에게 화를 내듯 단숨에 퍼부었다.
하스미는 당황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런 뜻이 아냐 난 이 영화에 돈을 투자했다는 얘기를 하고있는 거야."- P76
호소카와는 몹시 불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 난 오십만 엔이지만 자넨 용케 백만 엔이나 투자했군."
"...... 아버지에게 빌렸어. 갚지 못하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조건으로."
아아, 오오. 주위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P77
모리 미키가 싸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 저는 말단이라서요. 그런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감독님이 설마 여러분에게 영화에 출연시켜줄 테니까 돈을 내라고 했단 말입니까?"- P78
히사모토의 대답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연기자들이었을 것이다.
히사모토가 이렇게 대답했다.
"감독이 튀었어."
다들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 P79
히사모토는 부드럽게 하스미의 팔을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워낙 꽉 움켜쥐고 있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거, 거, 거짓말 ・・・・・・ 거짓말이야! 바, 방금 다 함께 러시를 봤잖아! 거의 다 찍었어. 조감독이 셋이나 있잖아? 조금 남은 부분이야 감독이 없더라도 찍을 수 있어. 그렇지? 네가 찍어! ...... 아니면 네가!"
하스미는 착란이라도 일으킨 듯이 먼저 히사모토를 이어서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 질렀다.- P80
4
히사모토는 나를 자기 차에 태우고 감독의 집으로 향했다. 가사도우미에게 전화로 들은 이야기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웠기때문이다.
감독은 여배우와 결혼했다가 몇 해 전에 이혼하고 지금은 혼자살고 있다.- P82
물론 노인이라 가는 귀가 어둡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겨우 알아들은 단어를 가지고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문장을 만들어내는 비범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P83
나는 운전하는 히사모토에게 물었다.
"시즈상이 또 뭔가 착각한 거 아닐까요?"
"......그렇다면 다행이지."
그럴 리 없다는 표정으로 히사모토가 대꾸했다.- P84
시즈상은 타박타박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식탁에서 편지지같은 걸 집어 들고 돌아왔다.
(중략).
시즈상.
한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가끔 청소는 해주세요.
급여는 늘 드리던 대로 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서명은 없었다.- P85
"여기 ‘급여는 늘 드리던 대로 드릴게요‘라는 부분은 늘 지불하는 날에 같은 액수를 주겠다는 의미인가? 그렇다면 그날까지는 돌아올 생각이 아닐까?"- P86
시즈상은 고개를 저었다.
"어젠 못 봤어. 여덟시쯤 저녁식사를 차려놓고 나는 집에 돌아갔으니까. 촬영이 있을 땐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식어도 먹을수 있는 음식이나 찡하면 먹을 수 있는 걸로 차려놓고 먼저 퇴근하거든."- P87
"저기, 시즈상, 요즘 감독님이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나요?"
나는 다른 방향에서 찔러보았다.
"아니. 그런데 가끔 뜬금없이 괴상한 웃음을 짓기는 했는데, 이상하다면 이상한 건가?"
그건 촬영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요즘 들어 감독은 묘하게혼자 미소 짓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집에서도 그랬다니.- P88
"뭐 어때, 들키지만 않으면 돼. 뭔가 나오면 시즈상이 찾아냈다고 하자. 그렇죠, 시즈상? 감독님을 찾아내지 못하면 영화가 박살나게 생겼어요. 그러니 협력해주실 거죠?"
"그럼 그럼. 어서 감독님을 찾아줘."
시즈상이 어쩐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P89
영화판 사람들은 회사에서 조사하기로 하고 일단 이 사람들에게만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
"실례지만 혹시 오야나기 감독님이 거기 계시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물었다.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만약 오면 때려죽이겠다고 전해!" "보고 싶네요. 도시조는 잘 지내요?" "지금 거신 번호는 현재 사용하지 않는 번호입니다" 등등) 질문에 대한답을 요약한 결과는 똑같았다.
아니요.- P90
5
하루를 더 기다렸지만 감독으로부터 연락은 없었다.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치프회의를 열어 논의하기로 했다.- P90
"전혀. 일시적인 변덕이겠지. 곧 돌아올 거야."
나를 안심시키려고 하는 소리 같지는 않았다. 미나코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P92
히사모토는 멈춰 서서 사람들의 얼굴을 쭉 둘러본 다음, 면목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일주일 동안 촬영 중단이다. 물론 그사이에 연락이 닿으면 감독의 지시에 따르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일주일 뒤인 11월23일에 다시 치프회의를 열어 논의하기로 했다."
말하자면 문제 해결을 뒤로 미뤘을 뿐이라는 소리였다.- P93
"서드."
"네."
저절로 자세가 바르게 펴졌다.
"그동안 네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
늘 그러잖아요.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일주일 푹 쉴 수 있겠다고 쉽게 생각한 내가 잘못이다.
"무슨 일인데요?"
"감독을 찾아내"- P94
"우선, 첫째."
히사모토는 내 말을 자르며 말했다.
"넌 젊어. 그리고 독신이야. 시간도 자유롭고 걱정할 가족도 없어."- P95
"둘째, 매스컴에 알려지면 안 된다는 거야. 넌 왔다 갔다 해도 아무도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치프인 나나 세컨드가 창백한 얼굴로 이리저리 뛰어다녀봐. 바로 무슨 사고가 났구나 하고 짐작할 거라고."
그럼 창백한 얼굴로 이리저리 뛰어다니지 않으면 되지 않나?- P95
"셋째...... 셋째・・・・・・ 뭐였더라? 까먹었네. 어쨌든 네가 적임자야. 힘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P95
"감독은 포기해도 괜찮아. 시나리오를 찾아내."
나는 아마도 상당히 넋 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히사모토가 못을 박았다.
"완벽한 시나리오를!"- P96
3장 대책 수립
1
당장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던 나는 이튿날 일단 감독의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감독이 간 곳은 알아내지 못하더라도 시나리오가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P99
미나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나라면 일단 여기부터 들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마음이 통한 것 같아 무척 기뻤지만 그것도 잠시, 그 정도는 누구나 판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고쳤다. - P100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조심 안으로 들어가 구석에 있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뜻밖에도 디자이너들이 주로 쓰는, 경사가 진 현대적 책상이었다. 책상에는 스테이셔너리라고 영어로 부르고싶을 정도로 산뜻한 필기구 세트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한복판에는 떡하니 포터블 워드프로세서가 올려져 있었다. - P101
화면이 켜지자 문서 읽기‘ 메뉴를 클릭했다. 순간 문서 목록이 주르륵 떴다. ‘시나리오 1‘ ‘시나리오 2‘ ‘시나리오3......
가장 최근 것으로 보이는 ‘시나리오 10‘을 불러왔다. 바로 <탐정영화>의 일부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지막 부분이다. 화면을 쭉 스크롤해 맨 아래 부분을 봤다.
"없네."- P102
순간 이해가 됐지만 그것도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까 이렇게 도둑처럼 뒤지고 있는 거잖아. 우리가 이렇게 필사적으로 감독과 시나리오를 찾을 거라는걸 다 안다면 왜 모습을 감춘 걸까?"- P103
미나코는 내 소매를 어린애처럼 잡아당기면서 말하라고 졸랐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털어놓았다.
"어쩌면 누가 이 영화를 만들지 못하게 방해하는 걸지도 몰라.- P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