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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편

어두운 실내. 의자가 스무 개쯤 되는 시사실 한가운데 사내가 몸을 깊숙이 묻고 앉아 있다.
그가 왼손을 높이 들어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자 머리 위로 눈부시게 하얀 빛의 사각뿔이 홀연히 나타났다.- P9
빛이 사라지고, 스크린은 다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다. 하지만 이번 어둠은 조금 전의 어둠과는 달리 인공적인, 투영된 어둠이다.- P9
힘을 잔뜩 준 바리톤 음성이 다시 흐른다.
(출연자나 스태프 가운데 영화의 결말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없다!)
다시 저택 전경.
(오직 한 사람, 이 영화의 감독을 제외하고는……………)- P11
검은 바탕에 흰 고딕체.
‘탐정영화‘
큼직한 글자가 비친다. 아무런 장식도 없다. 음악도 없다.
이어서.
(설 연휴 전격 개봉)필름은 거기서 끝인 모양이었다.- P12
"그러니까 남은 건 ‘배우들을 모아 크랭크를 돌리는 일‘뿐이라는 말씀인가요?"
젊은 남자는 사내가 입에 달고 다니는 말버릇을 가로채 써먹었다. 이때 그가 내쉰 한숨을 사내는 놓치지 않았다.
"당연하지! 뭐가 잘못되기라도 했다는 건가?"- P13
이미 자기가 저지른 실수를 깨달은 젊은이는 얼른 덧붙였다.
"아, 아뇨. 이렇게 여쭤보려던 건데... 상영 시간은 얼마나됩니까? 대체, 며, 몇 분쯤으로 만들 예정이십니까?"- P13
하지만 젊은이는 이날 믿을 수 없을 만큼 운이 좋았다. 감독은 그 질문을 웃어넘길 정도로 기분이 괜찮았던 모양이다.
"시간? 미안하지만 그건 아직 가르쳐줄 수 없어. -아, 한시간에서 세 시간 사이라고 해둘까?"- P14
감독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중얼거렸다.
"모두 다 속여줄 테다."- P15
1장

크랭크인


1

촬영 첫날이지만 감독은 늘 그러듯 지각이었다. 하지만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P19
 촬영소는 한 편에 얼마로 따져서 빌리니 너그럽게 넘어갈수 있다고 해도 장비 대여료와 인건비는 그렇지 않다.
요코하마 근처 전철 노선 가까이에 있는 이 촬영소는 대형 영화사 소유인데, 열두 개나 되는 거대한 창고 모양의 스튜디오가운데 현재 촬영 중인 곳은 우리와 다른 한 곳뿐이다.- P19
"야, 서드. 커피 좀 돌려라."
조감독 치프인 히사모토의 지시에 나는 말없이 일어섰다. 모든 잔심부름은 세 명밖에 안 되는 조감독 가운데 가장 말단, 즉 내게 돌아온다.- P20
"왜 이렇게 작은 프로덕션에 들어왔어요?"
종이컵에 커피를 따르면서 미나코가 또 물었다.
분명히 이 FMW-Film Maker‘s Workshop-는 작은 영화사다. 오야나기 감독과 함께 일해온 몇몇 스태프가 설립한 독립프로덕션이다. 급여도 많지 않고 언제 망할지도 모른다.- P21
뭔가 말하려다 그만두는 눈치였다.- P22
세트와 바깥 벽 사이, 파이프의자가 몇 개 놓인 어두운 공간에서 연기자들이 대화에 빠져 있었다.
"요즘 세상에 추리영화라니, 감독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 말을 한 사람은 이번 영화에서 일단 중심이 될(‘될‘이라고하는 까닭은 감독 이외에 누구도 결말 부분의 대본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스미 고타로라는 배우였다. - P22
내가 다가가자 다들 손을 들었고, 나는 한 잔씩 건넸다. 모두여섯 명이었다. 하스미 고타로와 기요하라 미스즈 안쪽에 베테랑 조연 호소카와 다쿠야와 신인배우 니시다 다카히로, 깐깐한 올드미스 분위기를 풍기는(사실은 결혼했지만) 모리 미키, 그리고 가장 나이를 많이 먹은-아니 연세가 많이 드신 야우치 젠조 선생이 앉아 있다. 이 여섯 명이 밀실에 가까운 <탐정영화>에 나오는 배우 전원이다.- P23
호소카와가 감탄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잉그리드 버그먼이아카데미상을 받은 사실에 감탄했는지, 아니면 그걸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는지 알 수 없었다.
"(전략). 누가 범인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지. 그래서 결말은...... 다 알잖아? 결말을 알든 모르든 그 영화는 즐겁게 볼 수있어. 하지만 본격미스터리는 원래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는 게 상식이지. 히치콕도 그렇게 말했어."- P25
"흐음, 그게 사실이라면 감독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여태 등장하지 않은 참신한 트릭이라도 떠올랐나?"
"설마 미스터리에 참신한 트럭이 이제 어디 있겠어? 순열과 조합을 이용해 만들어내는 변형 트릭은 있을지 몰라도."
하스미는 아무래도 ‘트릭 고갈론 신봉자‘ 가운데 한 명인 듯하다.- P27
하스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애당초 본격미스터리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진 건데 그 가운데서도 더 클래식한 설정으로 영화를 찍겠다니, 대체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워."- P26
"맞아. 기본적으로 서술트릭은 소설이 아니면 힘들지.
호소카와가 이렇게 대꾸하자 미스즈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P28
"예를 들면... <매드맥스2>⁵요."
내 딴에는 자신 있게 대답했는데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호소카와는 어깨를 으쓱하며 내게 물었다.
(중략).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 영화는 액자 구조로 되어 있어요. 기억나세요? 어떤 인물이 주인공 맥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구조였잖아요. 하지만 영화 앞부분에서는 그 인물이 누군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스토리가 진행돼요. 그러다가 관객은 그 설정을 까먹죠. 적어도 전 그랬어요. 그리고 마지막에 누가 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밝혀지죠."


5. 매드맥스 2, The Road Warrior, 1981.- P29
"(전략). <호수의 여인>⁷ 같은 이상한 영화를 제외한다면 말이에요.* (후략)."


* 레이먼드 챈들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소설 원작이 주인공 필립 말로의 일인칭 주인공 시점인 데 착안해, 주인공의 시점 숏만으로 전개된다.

7. 호수의 연인, The Lady In The Lake, 1947.- P29
"또 한 편 있습니다. <로렌조의 밤>⁸이 그렇죠. 타비아니 형제⁹가 만든."
미스즈가 눈을 반짝거렸다.
"아, <굿모닝 바빌론>¹⁰ 만든 감독? 나 그 감독 좋아하는데!"
"네. 이 영화는 이탈리아 내전 시절을 겪은 소녀가 어른이 되어 침대에 누워 그 시절을 이야기하는 구조죠.

8. 로렌조의 밤, La Notte Di San Lorenzo, 1982.
9. 타비아니 형제, Vittiri Taviani, 1929. Paolo Taviani, 1931-.
10. 굿모닝 바빌론, A BEE, Good Morning, Babylon, 1987.- P30
"....・・・ <페도라>예요. 빌리 와일더 감독. 이건 서술트릭이라고 하기 어렵지만 처음에는 자살한 페도라라는 대스타의 성대한 장례식 장면으로 시작하죠. 그리고 컷백*해서 여배우가 어떻게 자살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주는데…………… (중략) 와일더 감독의 영화라면 <당신에게오늘 밤을>¹⁶도 코미디지만 미스터리로도 볼 수 있어 재미있죠."


*cut back. 앞에 나온 장면 또는 인물을 다시 보여주거나,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서 일어나는 장면을 동시에 보여주는 기법.

16. 당신에게 오늘 밤을, Irma La Douce, 1963.- P32
"글쎄, 뭐라고 해야 할까요...... 아, 그러고 보니 <존겔리아>²²도 있군요. 서술트릭도 무엇도 아닌, 그냥 공정하지 못한 결말이나는 이야기지만요."


22. 존겔리어, Dead & Buried, 1981.- P33
"그거 좀비 나오는 이야기? 어느 섬이 좀비로 가득 차게 된다는 영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 그건 루치오 풀치의 <산겔리아 2>²⁴* 일 거예요. 제목은 비슷하지만 <존겔리아>는 어느 시골 마을이 좀비로 가득 차게 된다는 이야깁니다. 주인공은 보안관이고."


*한국에서는 <좀비2>로 소개되었다.


24.산겔리아2, Sanguellia, 1979.-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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