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부암동
은은하고 어쩌면 희망차기까지 한 아침 햇살이 몸 구석구석에 닿았지만, 호수는 그런 기운이 무색하게 잔뜩 상기된표정이었다. 가쁜 숨을 고르며 호수는 부암동 주민센터 부근언덕길을 터덜터덜 걸어 올랐다.- P7
모든 게 다 심드렁하게만 여겨지는 마음을 뒤로하고 호수는 발길을 재촉했다. 매일 이렇게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숨을고르며 언덕길을 오를 걸 생각하니, 차라리 아예 출근을 하지 말아버릴걸 하는 후회가 찾아들기도 했다.- P8
‘랑데부 미술관‘
그래도 늦지 않고 제시간에 도착한 것만큼은 다행이었다.- P8
(전략).
계속되는 낙방 끝에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한 기업의사회 재단 사내 아나운서직에 지원해 2차 면접까지 갔지만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애초에 딱히 마음이 가는 곳이 아니었기에 별다른 기대를 품고 있지 않았으면서도, 그래도 혹시나하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호수는 크게 좌절했다.- P9
"오늘 첫 출근이시죠. 반갑습니다. 저는 학예연구원 손다미라고 해요."
여자가 손에 든 명함을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 갸름한 얼굴에 큰 눈망울, 야무져 보이는 입매, 긴 머리를 뒤로 한데 묶은, 언뜻 봐도 다부진 인상의 여자였다.- P11
"아, 아, 그 친구구먼."
다미가 문을 열고 나왔던 사무 공간에서 한 중년 남자가모습을 드러내며 호수를 향해 손짓했다.
"미술관 오영균 학예실장님이세요."
옆에서 속삭이듯 건네는 다미의 말에 호수는 얼른 허리를굽혔다.- P11
"미술관에서 일하는 사람은 저희뿐인가요?"
호기심에 물은 말이었는데 순식간에 오 실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 상황엔 이것도 많아" 하고 오 실장이 중얼거리듯 말하는 바람에 무안해진 호수가 몸을 외틀었다.
"......그런데 원래는 아나운서직에 지원했었다죠?"- P12
곧바로 실망한 눈초리로 허공에 손을 내젓던 오 실장이 뒤돌아서며 중얼거렸다. "아니, 채용에서 떨어뜨린 사람을 뭐하러 미술관으로 보내는 거야. 나 참 이해를 못 하겠네. 여기가 만만한 거야 뭐야."- P13
"성격이 좀 급하세요."
금세 사무 공간 안으로 들어가버린 실장을 지켜보며 다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실장님 말에 크게 신경 쓰지 말아요. 뒤끝은 없어서 저러다 말아요."- P13
건물을 올려다보며 호수가 물었다.
"전시관이 원래는 여러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일부만 사용하고 있어요."
"일부만요?"
"네, 지금은 단 하나의 작품만 전시하는 공간이니까요."- P14
"그럼, 어떤 그림을 전시하는 건가요?"
속 타는 마음과 다르게 짐짓 미소를 지으며 호수가 다미에게 물었다.
"관람객들의 사연을 받은 이후에 저희 미술관 소속 작가님이 그중 하나의 사연을 선정하시거든요. 그 사연을 바탕으로 작품이 만들어지고, 완성된 후 이곳에 전시하고 있어요. 말하자면 오직 한 사람의 이야기로 완성된 하나의 작품만을 전시하는 곳이에요."- P15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도 딱히 전시관의 그림을 보고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뭘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P16
발끝에 매달린 것
(전략).
서름한 얼굴로 전시관 바깥으로 나온 호수가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다미 씨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몸이 조금 굽은 듯 보이는 청소부 할머니가 그 자리에서 전시관 유리를 닦고 있었다.
"새로 출근한 직원분이신가 봐요?"
(중략).
"참 여유가 있어 보이는 얼굴이네."
"......네?"
"요즘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여유가 없어 보이잖아요. 그런데 새로 오신 분은 아주 여유가 있어 보이네요."- P27
"요즘 사람들 아니다 싶으면 쉽게 뒤돌아서기도 하잖아요. 너무 조급해하고 또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게 이해가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청소부 할머니는 한 차례 유리창에 분무액을 분사한 다음 다시 호수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말했다. "그런데 새로 오신 분은 안 그럴 거 같아."- P28
보이지 않는 젊음
춘호는 요즘 들어 도통 사는 낙이 사라져가는 느낌이었다.- P30
빌라 윗집에 젊은 신혼부부가 이사 온 건 불과 삼 개월 전의 일이었다. 전에 윗집에 살던 이들은 춘호와 엇비슷한 나이대의 노부부였다. 있는 듯 없는 듯 살던 그들 부부가 이사가고 나서 찾아온 변화가 그는 당혹스럽기만 했다.- P31
(전략).
춘호는 여자의 말을 더는 듣지 않고 인터폰을 끊었다. 하여간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자기 할 말을 다 해 피곤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P31
윗집에서 일어나는 소음은 다양했다. 춘호는 윗집 사람들이 걸을 때 나는 발망치 소리로 그들의 이동 경로를 환히 들여다볼 수 있었고, 새벽에 울리는 알람음에 그들의 기상 시간과 출근 시간을 짐작할 수 있었으며, 뛰어다니는 소리로그 아이가 얼마나 활달한 성향을 지녔는지 보지 않고도 알수 있을 지경이었다. - P32
한 번은 윗집의 젊은 부부 내외가 아이와 함께 찾아왔지만, 춘호는 인터폰 화면으로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을 뿐, 기척을 내거나 문을 열지 않았다. 어차피 혼자 살아가는 생이라고 여긴 지 오래였다.- P33
안녕하세요, 301호입니다.
저희 때문에 많이 불편하셨던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아이가 뛰거나 할 때마다 소음이 일어나는 걸 저희도 인지하면서 그러지 않도록 지도하고 있습니다. (후략).
춘호는 그날 밤 다시 과일 바구니를 가져다 윗집 현관에걸어놓았다.- P33
매트를 깔았다고는 했지만, 그 때문에 아이가 더 마음껏 뛰는지 소리가 전보다더 쿵쿵 울리는 듯했다. 상황이 그쯤 되자 춘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보복하듯 위층 천장을 마대자루로 마구 두드려댔다. - P34
그날 춘호가 어느 젊은 커플을 마주친 건, 여느 때처럼 북악산 산책길 쪽으로 걸어 오르던 참이었다.- P35
"혹시, 어르신, 백사실 계곡으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하죠?" 하고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물어왔다. (중략).
"아, 그럼 아까 거기서 꺾었어야지 왜 여기까지 올라왔어!"
꾸짖듯 말을 뱉고 나서 춘호는 갈래길에서 한가롭게 셀카를 찍고 서로 웃던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눈꼴시면서도한편으로는 정답고 생기 있게 보이던 그들의 모습이.- P36
아래쪽으로 멀어져가는 커플을 한동안 혀를 차며 바라보다 오르막을 향해 막 돌아서려는 순간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무엇인가가 빛에 번득이며 춘호의 눈을 찔렀다.- P37
미술관에서 누구라도 사연을 써서 신청하면 선정해 작품으로 만든다는 설명이 궁금증을 유발시켰다. "내 사연이 작품이 된다고……………?" 리플릿에서 여전히 호기심 어린 눈길을 떼지 못하며 춘호는 언젠가 한번 이곳에 들러봐야겠다고 다짐했다.- P37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싶은 그였지만, 가슴 답답한 무엇인가를 어디에든 털어놓고 싶은 욕망만큼은 절실했다.- P38
작고 소담스러운 탁자 앞에 앉아 춘호는 종이와 펜을 집어들었다. (중략).
‘한글자는 쓰고 나가야지. 이제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춘호는 자기 안의 감정을 억누르며 버텼다. - P39
미술관을 나오자 밖이 완전히 달라 보였다. 분명히 미술관안으로 들어설 때만 해도 진초록과 노르스름한 빛이 섞인 나뭇잎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어느새 불그스름해진 듯했다. - P40
안녕하세요, 김춘호 관람객님. 저희는 랑데부 미술관입니다. ‘오직 한 사람의 이야기로 꾸며진 단 하나의 작품‘ 전시에 사연이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저희 미술관은 김춘호 님께서 신청해주신 사연을 바탕으로 하나의 그림을 완성할 계획입니다. 이와 관련해 요청할 사항이 있어 연락드렸습니다.
(후략).- P41
춘호는 수납장에 넣어놓은 채 수년 동안 펼쳐본 적 없던앨범을 꺼내 펼쳐놓았다. 아내와 사별하고 나서는 단 한 번도 열어본 적 없는 지난날의 기억. 무의미하다고까지 여겼던 지나온 시간들이었다. - P42
다정한 눈빛으로 말해요
(전략).
호수가 질문을 마치기도 전에 다미가 갑 티슈에서 티슈 몇장을 집어 들었다.
"전시실에서 어떤 분이 울고 계셔서 가실 때 우리 미술관책자하고 같이 드리려고요. 그냥 방문 기념 굿즈 드리는 것처럼요."- P43
"그분, 사연 신청자분이신가 봐요."
"아...... 그래서." 다미가 손에 든 물티슈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다시 호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이거 드릴 건데, 같이가실래요?"- P44
전시실 앞에서 살짝 안을 들여다보자 과연 김춘호 씨의 뒷모습이 보였다. 사진을 전달하러 찾아왔을 때와 다르지 않은 복장이었다.- P45
전시실 앞에서 살짝 안을 들여다보자 과연 김춘호 씨의 뒷모습이 보였다. 사진을 전달하러 찾아왔을 때와 다르지 않은 복장이었다.- P45
그림들 밑에 전체를 아우르는 또 하나의 제목이 굵은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Title: 눈빛
그러고 보니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외적인 모습은 많이변화했지만, 어딘가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한결같다는 느낌이었다.- P46
(전략).
방명록에 적어놓은 다른 사람들의 글을 차례로 훑다 호수는 김춘호 씨가 남긴 듯한 글을 발견했다. 삐뚤빼뚤한 글씨체의 아이와 엄마가 차례대로 적어놓은 글에 그가 답장처럼써 내려간 것이었다.- P49
"되게 마음이 여리신 분 같았어요."
다가선 기척을 느꼈는지 여전히 김춘호 씨의 모습을 바라다보던 다미 씨가 중얼거렸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P51
"처음에는 당신 얼굴이 그려진 그림들과 작가의 말을 보곤 눈시울이 실룩였는데, 방명록을 열어본 후에 그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셨대요. 거기 또 그런 글이 있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참 다정한 눈빛이라는 말이요. 그 글이 사별한 부인이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할아버지에게 한 말을 생각나게 했대요."- P52
"혹시 오늘, 점심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점심거리를 챙겨오지 않은 호수는 "그냥 간단히 먹으려고요" 하고 가볍게 웃어 보였다. 미술관에서는 직원들끼리 점심을 같이 먹는 법이 없었다. 출근한 첫날부터 호수는 점심시간은 각자 알아서 보내는 시간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53
위로의 맛
호수와 다미는 미술관을 나와 털레털레 길을 걷기 시작했다. (중략).
"부암동은 전에 와본 적 없으세요?"
"네, 저는 처음 와봤어요. 서울 살면서 이런 동네가 있는 줄몰랐거든요."- P56
"여긴 너무 좀 조용하지 않아요?"
호수가 떠보듯 다미에게 물었다.
"전 그래서 좋은데요."
"......그건 그렇긴 한데."
약간 무안해진 호수는 마음에도 없는 호응을 했다.- P57
"여기 손맛 좋다고 소문난 식당인데, 국밥 괜찮으세요?"
"전 좋아하죠. 그런데 이런 취향이셨어요? 저는 연구원님이 점심은 거르거나 샐러드 같은 걸로 때우시는 줄 알았어요."
"가끔 먹긴 해요" 하며 다미가 희미하게 웃었다.- P58
"저희 미술관 출근한지 얼마 안 된 분이세요."
다미가 호수에게 눈길을 건네며 대답했다.
"아, 그러셔?" 하며 고개를 돌아보는 아주머니에게 호수는꾸벅 고개를 숙였다. "인상 참 좋네. 앞으로 자주 와요. 여기식당 이름도 정배식당이잖아요. 정이 배가 되는 식당."
아주머니의 말에 다미와 호수는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P59
다미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녀의 낯빛이 창백해져 호수는 혹시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사적인 일을 서로 묻고 답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P60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서 요기를 하고 들어오시는 것 같긴해요. 딱히 어울려서 같이 밥을 먹고 이런 건 별로 좋아하시지 않는 것 같아서 앞으로도 식사 같이할 일은 별로 없을 거예요."
다미가 알아두는 게 좋을 거라는 듯 말하는 사이 아주머니가 차르륵차르륵 밀차를 밀며 다가왔다.- P60
"아주머니, 손이요, 손!"
호수가 느닷없이 목청을 돋운 건 뚝배기를 쥔 아주머니의엄지손가락이 국밥 안에 반쯤 빠져 있는 걸 보고 나서였다.
(중략).
호수는 자기 앞에 놓인 국밥 그릇을 가만히 바라보다 다미에게 은밀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아까 여기 손맛이 좋다는 얘기가 이 손맛은 아니었죠?"- P61
"그래도 한번 먹어보세요. 뭐랄까, 위로의 맛이라고 할까요. 전 마음이 좀 안 좋으면 여기 와서 국밥 먹곤 하거든요."
다미의 말에도 젓가락으로 반찬을 깔짝거리기만 하던 호수는 마지못해 국밥 한 숟가락을 떠 입에 넣었다. 뭉클한 훈훈함이 속을 채웠고 몸에 열기가 돌았다.- P62
궁금한 마음에 호수가 묻자, 다미가 답했다.
"작가님이 사연 선정을 하셨다는데 작업을 위해서 뭘 좀찾아야 한다나 봐요."
"뭘 좀 찾아요?"
"그건 내일 출근하신 후에 얘기하자 하시네요."- P63
투명하고 반짝이는 몸짓으로
편집숍에서 산 물건을 결제하려던 해주는 점원에게서 카드 잔액이 부족하다는 얘기를 듣고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있었다.
이번 달 대학 및 지역 축제와 공연 준비를 위해 고가의 의상과 신발을 카드 할부로 사들였던 것을 순간 떠올렸고, 카드 단기 대출금 결제일 역시 하필 오늘이었다는 걸 뒤늦게생각해냈다.- P65
도로 카드를 내밀며 점원이 물었다.
"네, 없어요. 죄송해요."
해주는 고개를 떨군 채 빈손으로 편집숍을 빠져나왔다. 곧내야 할 보험료와 전기세 생각에 해주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P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