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갈색의 건물을 올려다보며 마요는 심호흡을 했다. 지은 지 20년도 더 된 건물에 있는 집이었지만 미나토구 시로카네(金)에 자리한 데다 백 평은 더 되는 평수이니 아마 시세도 2억 엔은 더 되겠지.- P9
마요는 목례한 뒤 실내로 들어와명함을 내밀었다. "분코 건축사무소 리폼부서 가미오라고 합니다.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성은 명함을 보고 싱긋 웃었다.
"가미오 마요 씨. 젊은 분이시네요. 건축사라고 해서 나이 지긋한 남성분이 오실 줄 알았는데요."- P10
마요는 실내를 한 바퀴 둘러봤다. 사전에 조사해놓은 평면과 같았다. 2LDK* 였는데, 거실과 주방 크기만 해도 다다미 스무장**은 더 될 정도로 널찍했다.
우에마쓰 가즈미는 이 집을 1LDK로 만들어달라고했다. 리폼보다 리노베이션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리라.
* 거실(Living room), 식당(Dining room), 부엌(Kitchen room)의 약자로, 방두 개에 주방과 거실 구조를 의미한다.
** 일본에서는 다다미 한장(1.53㎡)을 기준으로 방의 크기를 측정한다.- P11
"아직 생각을 안 해봤고, 정해진 것도 없어요. 새로운 집을 보고 정하려고요."
"그럼 현재 사시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우에마쓰고객님의 라이프스타일을 조금이라도 파악할 수 있을것 같아서요."- P12
(전략). "혹시나 해서 여쭤본 거고요. 그럼 제가 몇 가지 콘셉트를 준비할 테니, 그걸 토대로 상의하는 건 어떠실까요?"
우에마쓰 가즈미는 생긋 웃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일주일쯤 시간을 주실 수 있을까요?"
"일주일, 알았어요. 기대할게요."- P13
일주일 뒤, 우에마쓰 가즈미에게 연락을 넣었다. 어떤 구조로 할지 대략적인 아이디어가 떠올랐기에 확인을 받기 위해서였다.
"전에 말씀하신 에비스 자택으로 찾아뵈면 될까요?"- P14
2
(전략).
"영업 준비 중이라는 팻말 못 봤어? 영업 전에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다고."
"준비하면 되죠. 우리는 탁자하고 의자만 있으면 된다고요. 그리고 대체 뭘 준비하는데요? 술잔 닦는 것정도잖아요."
"무슨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예를 들면 손님이 칵테일을 추천해달라고 했을 때에 대비해 재료 재고도 살펴봐야 하고, 재고가 남은걸 소진해야 하니까."- P15
"그러지 말고 앞으로도 좀 도와줘요. 오랜만에 들어온 큰 건이라고요. 그리고 의뢰인이 미인이에요. 화장은진한 편이지만, 삼촌도 보면 마음에 들걸. 게다가 부자고."
(중략).
"아마도요 시로카네에 방 두 개짜리 맨션을 사서 리노베이션을 맡기잖아요. 예산은 삼천만 엔 이내라고 했지만, 콘셉트가 마음에 들면 분명 더 낼것도 같았어요."- P16
"부자와 친해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제법 좋은 고객을 잡았네."- P17
돌아가신 아버지의 동생인 다케시는 마요의 얼마 없는 혈육이었다. 이곳은 다케시가 운영하는 ‘트랩핸드‘라는 이름의 바다. 카운터석과 안쪽에 탁자가 하나 있는 작은 가게였다.- P18
"어서 오십시오. 제 조카가 신세를 지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며 다케시는 우에마쓰 가즈미의 얼굴을 보고 앗, 하고 환한 표정을 지었다.
"마요한테 우에마쓰라는 희귀한 성을 듣고 같은 성을가진 지인이 떠오르더군요. 혹시 우에마쓰 고키치 씨사모님 아니십니까?"
우에마쓰 가즈미는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남편을 아시나요?"- P19
"지금으로부터 칠팔 년 전이었던가요. 인터넷 체스사이트에서 만났습니다. (중략). 그때 사모님과도 인사를 나눴는데………"
(중략).
"그랬나요.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하네요. 죄송합니다. 남편 손님이 워낙 많았거든요."- P21
우에마쓰 가즈미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남편은 삼 년 전에 작고하셨습니다."- P21
"원래는 계속 그 집에 살 생각이었어요. 남편과의 추억이 담긴 집이니까요. 하지만 반년쯤 전에 도둑이 든뒤로는 혼자 살기 무서워져서..."
"도둑이요? 큰일을 겪으셨군요."
"제가 집에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혹시라도 마주치기라도 했으면……….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치죠."
우에마쓰 가즈미는 두 손으로 팔을 감쌌다.- P22
"진짜 그러지 좀 마요.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
우에마쓰 가즈미를 배웅한 뒤 마요는 카운터 안쪽의다케시에게 투덜거렸다.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갑자기 우에마쓰 씨 부군이 어쩌고 그랬잖아요. 그건 어떻게 알아냈어요?"- P23
"우에마쓰 씨는 팔 년 전에 이 집을 일억 육천만 엔에매수한 모양이야. 대출을 끼지 않고 전액 지불했다더군.
평범한 사람은 아니지 소유자의 전체 이름을 인터넷에서 검색해봤더니 해당하는 인물의 정보가 나오더군."- P24
"뭣 때문에? 네 일이 잘 풀리게 하려고 이러는 거 아냐! 주택 리노베이션이라는 큰일을 맡기는데, 생면부지의 상대보다는 조금이라도 연이 있는 사람이 마음놓이지 않겠어? 여기서 이야기를 들어봤는데, 너희 사무소랑 계약할 것 같던데."
(중략).
"표정이 왜 그래? 뭐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 P26
하지만 우에마쓰 가즈미가 선택한 건 정통파 콘셉트였다. 과감한 콘셉트와 심플한 콘셉트에는 눈길조차주지 않았다.- P27
"왠지 가격으로 정한 것 같아서."
(중략).
"아니. 견적은 제일 비싸요. 평범하고 지루한 디자인이라 재료를 고급으로 했어."- P27
"우에마쓰 씨, 아무래도 다른 사무소엔 의뢰 안 했나봐. 보통 이런 일은 잘 없거든요. 대부분의 고객들은 여러 사무소에 의뢰해 콘셉트와 견적을 낸 다음에 그중에서 본인 취향에 맞고 저렴한 콘셉트로 정하려 하는데."- P28
"아마 젊었을 적부터 좋다고 쫓아다니는 남자가 한둘이 아니었겠지. 그런 남자들은 거들떠도 안 보고, 자기보다 갑절은 나이 먹은, 게다가 지병이 있는 영감을잘 구슬러 결혼했잖아. 자식이 없으니 남편이 죽으면 전 재산은 자기 거니까. 그리고 계획대로 됐지."
"처음부터 유산을 노리고 결혼했단 소리예요?"- P28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뭐 어때. 말해두지만 비난하려는 게 아냐. 오히려 찬사를 보내고 싶을 정도. 고독한 영감님이 그 많은 재산을 저승길 갈 때 싸가면 누가좋겠어. 고작해야 국고나 채워주겠지. 영감님도 노년에 젊은 여자하고 같이 살았으니 좋았을 거야. 그리고영감님이 세상을 떠난 뒤 미망인이 유산을 물 쓰듯 쓰면 주변 사람들도 행복해지지. 문제는 그 남아도는 돈이 어떻게 하면 나한테까지 흘러오게 하느냐, 인데."- P29
3
탁자에 펼쳐놓은 도면 위로 마요의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침실 콘센트 위치는 두 군데를 생각해놨어요. 문바로 옆에 하나, 안쪽 벽에 하나. 벽 쪽 콘센트는 텔레비전안테나와 광케이블과 일체화된 겁니다. 최대한 거치적거리지 않는 위치 같아서 여기로 했는데, 나중에 침대배치를 바꿀 걸 생각하면 위치를 변경해도 되고요."- P30
"흑맥주를 싫어하시진 않으시죠?"
"안 싫어해요, 가끔 마시는걸요."
"그럼 이걸 드셔보십시오."
다케시는 잔과 접시를 카운터에 놓더니 맥주 캔을따서 부었다.
(중략).
접시에 담긴 건 크림치즈를 올린 쿠키였다.- P31
맨션 리노베이션은 다행히도 마요의 회사에서 담당하게 됐다. 그 까닭에 자주 미팅을 하게 됐는데, 문제는장소였다. 그래서 오픈 전에 가게를 좀 빌려달라고 다케시에게 정식으로 부탁했더니 의외로 흔쾌히 승낙해줬다.- P33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말인데요, 마스터에게 부탁이있습니다."
(중략).
"어려운 일은 아니고요. 조만간 이곳에서 사람과 만날 약속을 해도 될까요? 손님이 아니라, 마요 씨와 이렇게 만나는 것처럼 영업시간 전에 만나고 싶은데요."- P33
"오빠라고요? 친오빠입니까?"
(중략).
"그건 아니고요. 오빠와는 벌써 수십 년간 안 본 사이예요. 만나기 싫어서 피했죠. 연락도 전혀 안 하고 살았고요."- P34
"오빠의 볼일이 뭔지 짚이는 데가 있으신가요?"
"오빠는 아버지 일로 할 얘기가 있다고 했어요."
"아버님은 살아계십니까?"
"글쎄요...... 하지만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은 적은없으니 아직 살아계실지도 모르죠."- P36
"오빠분은 우에마쓰 씨가 지금 사시는 곳 주소를 어떻게 아셨을까요?"
마요는 머릿속 의문을 입 밖으로 냈다.
"그걸 모르겠어요. 전입 신고도 아직 안 했는데."- P38
"하지만 전 이웃 사람들에게도 어디로 이사하는지알리지 않았는데요."
"알아낼 방법은 여러 가지 있죠."
다케시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이를테면 초소형 GPS 발신기를 택배나 소형 우편물로 야마테초 주소로 보냅니다. 우편물 전송 서비스를신청했으니 저절로 전송되겠죠. 자동적으로 새로운 주소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P39
"그러고 보니 이주일 전쯤에 모르는 회사에서 건강보조식품 샘플을 보냈어요. 광고지도 들어 있었는데,
그런 회사에서 뭘 산 적이 없어서 이상하다 싶었죠."
(중략).
"네, 성만......"
"그러면 우편함을 보고 집 호수도 알아낼 수 있었겠고요."- P40
4
카운터에 놓인 스마트폰의 시계가 4시 10분 전임을알려줬다. 옆에 있는 우에마쓰 가즈미의 몸이 굳은 것 같았다.- P41
다케시는 스마트폰을 들고 화면을 조작한 뒤 우에마쓰 가즈미 앞에 내려놓았다. 화면을 본 그녀는 앗, 하고작게 외쳤다.
마요도 화면을 들여다봤다. 사진 속 세 사람은 집 앞에서 웃고 있었다. 온화한 생김새의 노인을 가운데 두고오른쪽에는 다케시가, 왼쪽에는 우에마쓰 가즈미가 있었다. 그녀는 새빨간 재킷 차림이었고 머리가 짧았다.- P42
두 사람이 사진 데이터를 주고받는 걸 보며 마요는내심 혀를 찼다. 다케시가 우에마쓰 고키치의 체스 친구였다는 건 지어낸 이야기이니, 저 사진이 실제로 존재할 리 없었다. 우에마쓰 가즈미의 옛날 사진을 입수했을 리는 없으니 몰래 찍은 사진을 교묘하게 합성한게 틀림없었다.- P43
다케우치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본 뒤 마요와 다케시를 힐끗 보며 말했다.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은데."
"장소를 제공해주신 분들한테 나가달라고 할 수는없잖아."
"그럼 밖에서 이야기하자."
"왜? 남이 들으면 안 될 이야기라도 하려고?"- P44
그렇게 말하더니 다케시는 선반의 오디오 기기를 조작했다. 실내에 재즈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중략).
계속 쳐다볼 수도 없어서 마요가 고개를 돌리자 다케시가 오른손으로 작고 하얀 뭔가를 내밀었다. 무선 이어폰이었다. 다케시의 왼쪽 귀에도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마요는 받아 든 이어폰을 오른쪽 귀에 꽂았다. 즉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P45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하지만 법적으로는 아니야.
부모가 이혼하든, 호적에서 나가든 친자관계는 영원히변하지 않지. 무슨 말을 하고 싶으냐 하면, 부양의무 말이야 부모가 가난해서 생활이 힘들면 법적으로 자식이 부양해야 하지. 아버지는 지금 가난해. 생활 보호와 연금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지만, 그것도 한계야. (후략).‘- P46
‘그럼 그쪽이 돌보면 되겠네요. 아들이니까‘
‘그러고 싶어도 못해.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거든. 딸자식 뒀다 뭐하겠어. 너 돈 많지? 요코하마 그 집으리으리하던데. 어떻게 사는지도 다 알아. 돈 많은 영감을 잡아서 유산으로 한몫 챙겼다면서.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던데.‘- P47
‘어기긴 법은 내 편을 들어줄 것 같은데? 내 생물학적 아버지란 사람은 아내와 이혼한 뒤에 양육비도 제대로 주지 않았어. 내가 보육원에 들어간 뒤에도 부양의무를 일절 다하지 않았고, 그런 아버지인데 나한테부양의무를 지라고 하겠어?‘
‘법대로 하자 이거야?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가정법원을 찾아갈 수밖에‘- P48
당신, 다케우치가목소리를 낮췄다. 정말 가즈미 맞아?‘
흠칫한 마요는 다시 두 사람을 보았다. 다케우치는어깨를 움츠리고 몸을 내밀고 있었다. 우에마쓰 가즈미는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P49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아니면 무슨 수작질이야?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는데.
"물론 진심이지. 직접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이지만, 오래전부터 당신을 관찰했어. 처음에는 가즈미인 줄 알았는데 점점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 이렇게 직접 만나보고 확신했어. 당신은 내 동생이 아냐.‘- P49
‘그래, 잘 알지. 진짜 가즈미는 죽었어‘
다케우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그랬군. 언제 어디서 죽었지?‘
(중략).
‘가즈미는 열세 살, 중학교 일 학년 때 죽었어. 네 살많은 오빠에게 살해당했지. 그 후로 살아가는 사람은 가짜 가즈미야. 당신 말이 맞아. 여기 있는 난 가짜야.‘- P50
‘그럼 이건 어때? 아까 가미오 씨한테서 받은 사진이야. 이분이 조작이라도 했다는 거야? 무엇 때문에?‘
집 앞에서 찍었다는 사진을 보여주는 모양이었다.
‘사진 속 여자는 당신하고 비슷하군. 진짜 가즈미인가. 하지만 화질도 안 좋은데 그게 증거가 될까?‘- P51
‘당신이 가즈미라면 병은 어떻게 됐지?‘
‘병? 무슨 소리야?‘
‘요코하마에 살 때 병원에 다녔잖아.‘
‘.....그걸 어떻게 알지?‘- P51
두 사람은 한동안 눈싸움을 벌였지만, 이내 다케우치가 두 손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일어났다. 홱 몸을 돌리더니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더니 마요와 다케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거칠게 문을 열고 가게를 나섰다.
우에마쓰 가즈미가 일어났다.- P52
우에마쓰 가즈미는 난처한 듯 웃으며 마요의 옆에 앉았다. "우리 얘기, 들렸어요?"
"아뇨. 하지만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은 건 느껴졌어요."
"이상한 소리를 하면서 생트집을 잡지 뭐예요. 나더러 우에마쓰 가즈미인 척하는 가짜라나. 황당하죠?"- P53
"저 남자가 에비스 집을 아니까 언제 또 쳐들어올지몰라요. 미행하거나 어디서 기다리고 있으면 싫으니까, 차라리 이사를 갈까 해요. 시로카네 집 공사가 끝날때까지 잠깐 머물 수 있는 집이 없을까요?"
"아마 있을 거예요. 하지만 새로 집을 구하실 때까지는 어쩌시려고요?"- P54
우에마쓰 가즈미는 가방에서 키홀더를 꺼내더니 거기서 열쇠 하나를 뺐다. "열쇠 먼저 줄게요."- P55
"일단 그것부터 마셔. 안색이 안 좋다."
다케시의 말에 마요는 마른세수를 했다.
"앗, 그런가. 아마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너무 놀랐나봐. 삼촌도 놀랐죠?"- P55
"너한테 할 말이 있다. 우에마쓰 가즈미 씨 얘기야."
(중략).
"그 사람은...... 가짜야."- P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