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혹하다
1
엄숙하다고 해야 할지 우스꽝스럽다고 해야 할지, 사토야마나미는 금방 판단이 서지 않았다. 지금까지 자신의 감성을믿는다면 수상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어두컴컴하고 길쭉한방에서 벽을 등지고 서로 마주하듯 나란히 정좌한 남녀 열명은 표정으로만 봐서는 자신들의 행위에 의문을 품은 사람이한 명도 없는 것 같았다.- P9
자, 하고 입을 연 사람은 상좌 한가운데 앉아 있는 남자다.
이름은 렌자키 시코. 물론 본명이 아니다. 팸플릿에는 어느밤 머리맡에 성인이 나타나 이름을 내려 주었다고 되어 있다.- P9
고개를 끄덕이는 렌자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실은 외부 사람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교단의 수치니까요. 하지만 좋은 면만 보여서는 우리의본모습을 알릴 수 없겠죠.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중요한 건 잘못을 회개하고 마음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단에 자정 작용이 있다는 점을 오늘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P10
렌자키가 등을 쭉 폈다. 표정도 한결 엄숙해졌다.
"오늘 이렇게 모이시라고 한 것은 중대한 문제점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아이회‘가 똘똘 뭉쳐 있다고믿었습니다. 모두가 한 방향을 바라보며 같은 것을 추구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아쉽게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중 한명이 구아이회의 보호를 받으면서 마음속으로는 우리를 배반했어요."- P11
(전략).
렌자키가 말을 이었다.
"우리 목표는 마음의 정화입니다. 병이나 인간관계로 고통받는 사람들 중 다수가 자신의 마음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살아오는 동안 갖가지 더러움이 축적된 결과 재앙이 일어나는 것이죠. 그래서 그 더러움을 씻어 내고 행복해지자는 것이 우리 교단의 이념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마음의 정화를 이루지 못한 사람이 간부 중에 있다는 사실은 우리 교단이 아직 미숙하고 더 나아가 저 자신이 미숙하다는 뜻입니다."- P11
"설령 그렇게 괘씸한 자가 있다 해도 그건 그자가 타락한 것이지 결코 대사 때문은……………."
(중략).
제자의 물음에 렌자키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범인이라는 표현은 쓰지 맙시다. 우리는 가족이에요. 그자는 그저 마음을 충분히 정화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불쌍한 사람이지요."- P12
‘구아이회‘에는 열 명의 간부가 있고, 그들이 렌자키 휘하에서 모임을 운영해 나간다고 들었다.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 열 명이다. 모두들 놀란 표정으로 제5부장을 바라보았다. 그가 지명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제5부장, 하고 렌자키가 운을 떼었다. 그 표정은 온화하고,
목소리도 부드러웠다.
"이곳은 혼을 정화하는 곳입니다. 정화라 함은 모든 일을고백하는 것이기도 해요. 숨기는 일이 있다면 부디 솔직하게 털어놓으세요. 당신 안에 있는 검은 것들을 토해 내세요."- P13
제5부장은 바닥을 손으로 짚은 채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 얼굴에는 공포와 놀라움의 기색이 가득했다.
어떻습니까, 하고 렌자키가 재차 물었다.
제5부장은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명히 느끼긴 했지만, 저는 아닙니다. 저는 대사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P14
연기력 한번 대단하네, 하고 나미는 냉소적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도 이건 렌자키에게 초자연적인 능력이있다는 걸 선전하려는 퍼포먼스겠지. 주간지에서 취재하러온다니까 부랴부랴 준비했을 거야. 제5부장의 박진감 넘치는 연기는 인정하지만, 이런 짓거리를 사실 그대로 기사화했다가는 독자에게 바보 취급을 당할 것이다. 아니, 그러기 전에 편집장에게 호통을 듣겠지.- P15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하고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다들 놀라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제5부장과 렌자키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모두가 배우라는 말인가. 설마 싶긴 하지만 그럴 가능성도 염두에 두는 편이 좋을 듯했다.- P15
렌자키가 말했다.
"죄를 인정합니까?"
그러나 제5부장은 등을 구부린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중략).
누구도 막을 틈이 없었다. 제5부장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지상 5층이었다.- P16
2
구사나기는 마미야의 설명만으로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리저리 질문한 끝에 겨우 내용을 파악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알 수 없는 점이 있었다.
"계장님, 이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P16
"내용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우리가 담당해야 할 사건이지사람이 죽은 데다, 자신이 죽였다고 자수한 사람까지 있으니 말이야. 5층 건물에서 떨어뜨렸다더군."
"기합으로…………… 말입니까?"
"기합이 아니라 염, 이라고 하나 봐. 염력, 할 때 염 말이야."
구사나기는 오른쪽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P17
종교 법인 ‘구아이회‘의 신자 하나가 건물에서 뛰어내렸다고 경시청으로 신고가 들어온 것은 오늘 오전 10시가 조금 지났을 때였다. 그 신자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사인은 뇌 좌상. 5층 창문에서 주차장 아스팔트 바닥으로 떨어졌으니 애초에 살아날 가능성이 희박했다.- P18
그런데 맨 먼저 입을 연 교조 렌자키 시코가 뜻밖의 말을 했다. 자신이 신자를 추락시켰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염력을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도쿄 서쪽 변두리의 작은 경찰서가 우왕좌왕하게 된 것은 당연했다.- P19
이런 종류의 단체에는 탈퇴한 신자가 자신이 속았다고 주장하고 나서는 일이 반드시 있기 마련인데 ‘구아이회‘는 여태까지 이렇다 할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는 듯했다. 지역 주민과 다툼이 일어난 사례도 없었다. 이번 사건이 교단으로서는 처음 있는 불상사인 셈이다.- P19
구사나기가 맞은편에 앉자 남자는 그때껏 감고 있던 눈을뜨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경시청 수사 1과의 구사나기입니다.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후지오카에게 건네받은 자료에 따르면 본명은 이시모토가즈오 직업은 ‘구아이회 교조‘였다.
"렌자키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예전 이름은 버렸으니까요."
남자가 차분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럼 렌자키 씨, 당신이 한 일을 가능한 한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그러니까, 간부 회의 중에 사건이 일어났다고요?"- P21
내부 조사를 한 결과 거액의 돈이 사용처가 불분명한 채 사라졌기 때문이다. 경리 담당자인 제5부장 나카가미 마사카즈가 의심스러워 그에게서 진실을 듣고자 했다. 그 방법은 렌자키가 나카가미의 마음에 염을 보내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P21
(전략).
"물론입니다. 아니, 그런 적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매일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번민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저를 찾아오거든요. 그런 분들의 마음에 염을 보내서 마음을 정화하고 번민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저의 책무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그 의식을 행하다가......."
"의식이 아니라 송념이라고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염을보낸다는 뜻입니다."
렌자키가 송구스러운 듯이 말했다.- P23
"부탁을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구사나기가 물었다.
"제게 그 송념이라는 것을 한번 해 보세요."
그 말에 렌자키가 눈을 번쩍 떴다.
"여기서 말입니까?"
"네. 안 되겠습니까?"
잠시 침묵하던 렌자키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해보죠."- P24
"별다른 느낌이 없는데요."
"그럴 겁니다. 염을 보내고서 알았습니다. 당신은 제게 구원을 바라지 않아요. 다만 저를 시험할 뿐이죠. 그런 사람에게는 염이 통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강한 사람입니다."
그러고서 렌자키는 빙긋이 웃었다.- P25
3
"그 일은 물리학과 관계가 전혀 없는 것 같은데."
유가와 의자 팔걸이에 턱을 괸 채 흥미가 일지 않는다는듯이 말하고는 책상 위에 놓인 머그잔을 집어 들었다.- P25
"무슨 수로 체포하겠어, 상대방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있는걸. 그가 한 일이라고는 양손을 상대방에게 향한 채 눈을 감은 것뿐이야. 그걸로는 살인죄를 적용하기는커녕 구류할 근거조차 없단 말이지. 결국 그대로 돌려보내고 말았어."
"목격자라고 해 봐야 신자들뿐이잖아. 정말로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을까? 교조를 지키자고 다들 입을 맞춘 거 아니야?"- P26
구사나기를 안내한 사람은 마지마라는 초로의 남자였다.
‘제1부장‘이라는 직함으로 보아 렌자키의 수제자인 듯하다.
"대사가 금방 석방되어 안심입니다. 자수하겠다고 하셨을때 저희는 말렸습니다. 대사가 염을 보낸 결과라고는 하나, 제5부장이 창에서 뛰어내린 것은 마음의 고통에서 해방되기위해서였지요. 다시 말해서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 자살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대사는 수긍하지 않았습니다. 분노한 나머지 힘을 통제하지 못했으니 자신이 죽인 것과 다름없다는거예요. 정말이지 훌륭한 분입니다. 만일 대사가 이대로 감옥에라도 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경찰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내려 주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P27
마지마를 포함해서 사건 발생 당시 방에 함께 있었던 간부 9명을 모두 만나 보았지만, 그들의 진술에 모순점이나 미심쩍은 부분은 없었다. 피해자가 날뛰던 모습에 관해서는 각자의 표현이 조금씩 달랐지만, 그 점은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볼수 있었다.
사건에 대해서는 그들도 놀란 눈치였다.- P28
"이런 일이 벌어져 면목이 없습니다. 저는 어려운 내용은잘 모르지만, 대사가 자수하겠다고 결정한 이상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여겼습니다. 돌아와서 안심입니다."
부인이 알아듣기 힘들 만큼 조그만 소리로 말하면서 버릇처럼 몇 번이나 고개를 꾸벅거렸다.- P29
(전략).
"그 증언을 그대로 믿는 거야? 그런 식이면 자네들에게 잡힐 범인이 하나도 없겠군."
"얘기를 끝까지 들어 봐. 사건 현장에는 신자가 아닌 사람도 있었어. 그들에게도 얘기를 들어봤단 말이야."
"신자가 아닌 사람이 있었어?"
"그래. 주간지 취재 기자랑 사진 기자. 우연히 취재하러 와있었던 모양이야."- P29
기자는 『주간 트라이』의 사토야마 나미라고 했다. 나이는서른 전후, 보이시한 헤어스타일에 화장기가 없는 여자였다.
(중략).
"우리 잡지사 편집부로 익명의 투서가 날아들었거든요. 최근 들어 신자가 급격히 늘어나는 ‘구아이‘라는 종교 단체를 아느냐고요. 자신의 가족이 줄줄이 신자가 되어 재산을 갖다 바치는 바람에 결국 가정이 붕괴되고 말았다는 거예요. 수소문해 보니까 아닌 게 아니라 수상쩍은 얘기가 들리더라고요. (후략)."- P30
사토야마 나미에 따르면 처음에는 취재를 거절당했다고한다. 송념의 자리에는 신자만이 참석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데 얼마 후, ‘구아이회‘ 쪽에서 먼저, 신자들이 수행하는 모습이라면 취재하러 와도 좋다고 연락을 했다. 렌자키가 염을 보내는 장면을 볼 수 없다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일단 들여다보기나 하자 싶어서 사진 기자와 함께찾아갔다. 그런데 도량에는 신자가 거의 없었다.- P31
"진짜더라고요. 렌자키 시코가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는데, 제5부장이 비명을 지르면서 날뛰기 시작했어요.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확실해요. 렌자키 시코는 단 위에 앉은채 엉덩이조차 들지 않았어요. 그러니 제5부장을 창에서 떠밀기란 불가능한 일이죠."
헤어지면서 사토야마 나미는 이번 사건을 최신호에서 상세히 다룰 예정이니 기대해 달라고 사뭇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사진 기자에게도 얘기를 들어봤지만 대체로 내용이 일치하더군. 그때 찍은 사진도 봤는데, 취재 기자의 말이 거짓이나 과장은 아닌 것 같았어."- P32
구사나기는 방해해서 미안하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만, 그 교조인가 뭔가하는사람 말이야, 운이 좋긴 했어."
"무슨뜻이지?"
"그렇잖아. 방금 우리도 말했다시피, 그 자리에 신자들만있었다면 경찰이 그 얘기를 믿었겠어? 사실은 누군가 밀어서 떨어뜨린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게 보통이지. 그랬다면 그 교단에 대한 평판에도 흠집이 났을 거야. 자칫 억울하게 체포되었을지도 모르고."- P33
4
같은 방인데도 한가운데 앉아 있으려니 기분이 영 달랐다. 혼자라는 사실도 영향을 미쳤을지 모른다. 그때는 간부 열명이 양쪽 벽을 등지고 마주 앉아 있었다.
사토야마 나미는 ‘구아이회‘ 본부를 다시 찾았다. 목적은물론 취재를 보충하는 것이다.- P34
나미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했다.
"혹시 거슬리시는 내용이라도…………?"
아닙니다, 하며 렌자키가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그렇게 글을 잘 쓰시는지, 감탄했습니다. 현장감이 넘치더군요. 다만, 앞으로는 제 예전 이름을 거론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경력에 관해서도 저희 구아이회 팸플릿에 적혀 있는 내용 외에는 기재하지 마시고요."
"아,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P35
나미가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해산한다고요?"
"생각은 그런데, 제자들이 울며불며 말리더군요. 아직 자신들의 마음을 정화하지 못했으니 저의 염이 필요하다고 하는데는 반박할 말이 없었어요. 경찰에 출두해도 결국 돌려보내고, 대체 어찌해야 좋을지……………."
렌자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를 보고 있자니, 큰 힘을 가진 자의 고뇌가 느껴졌다. 나미는 그 힘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었다.- P36
렌자키는 고개를 저었다.
"그토록 신성한 행위를 취조실 같은 곳에서 할 수는 없지요. 게다가 상대는 단지 재미 삼아 그런 말을 했을 뿐이고요. 거절하기도 뭐해서 시늉만 해 보였습니다. 형사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면서 불만스러워하더군요."
"저는 재미 삼아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 힘을 느끼고싶다는 순수한 마음이에요. 결과적으로 저 자신도 뭔가 변할지 모르죠. 부탁드립니다."- P37
나미가 시키는 대로 하자 렌자키는 진지한 표정으로 양손을 그녀 쪽으로 향한 뒤 눈을 감았다. 그런데 몇 초 뒤 그가 다시 눈을 뜨고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번뇌가 많으신가 봅니다. 거짓과 비밀도 상당히 많이 품었고요."
"아......, 다 알아내셨군요."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공기 정화기는 깨끗한 공기를 공급하지만 대신 내부에 있는 필터가 점점 더러워지잖아요.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마음의 필터에 더러움이 쌓입니다. 그걸 조금씩 깨끗이 하는 것이 우리 교단의 목표입니다."- P38
"느 느꼈어요. 분명히 느꼈습니다. 뭐랄까, 몸이 조금 따뜻해지면서......."
렌자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염을 느낀 겁니다. 당신의 마음은 비록 아주 조금이긴 하지만 정화되었습니다."
다음 순간, 형언하기 힘든 감동의 물결이 밀려왔다.- P39
5
마미야가 주간지를 읽어 보고 싶다고 해서 주간지를 들고그의 자리로 갔다. 어제 발매된 『주간 트라이』이다. (중략).
"렌자키 시코를 꽤나 치켜세웠군. 마치 초능력자라도 된다는 듯이 말이야."
"이 소재를 당분간 우려먹을 속셈인 거죠."- P39
"쳇, 나오든지 말든지. 그건 그런데 말이지."
마미야가 기사에 게재된 사진을 가리켰다.
"용케 사진을 찍었단 말이야. 이 사진으로 봐서는 아무도피해자에게 손을 대지 않은 게 확실하잖아. 스스로 창에서 뛰어내렸다고 볼 수밖에 없겠어."
"그러게 말입니다."
마미야의 말대로였다. 사진에서 나카가미 마사카즈는 무언가에서 벗어나려는 듯이 고개를 돌린 채 양손으로는 몸을보호하려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창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진 기자 다나카에게 진술을 들을 때도 봤던 사진이다.- P40
마미야가 자리에 앉은 채로 구사나기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혹시 주간지도 한통속이라는 얘긴가? 아니면 교단이 선전을 목적으로 사건을 일으켰다는 거야? 일부러 신자를 자살하게끔 해서 말이야."- P41
"아닙니다. 그건 괜찮은데, 긴히 할 얘기라는 게 뭡니까?"
그러자 후지오카는 네, 하며 구사나기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실은 밀고가 있었습니다."
"밀고요?"
"네. 과거에 ‘구아이회‘ 신자였다는 남자한테 전화가 걸려왔어요. 그 사람 말에 따르면 교단의 돈을 착복한 사람은 나카가미가 아니라 다른 간부들이라는 거예요. 물론 경리 담당이었던 나카가미가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으니 얼마간 떡고물이야 얻어먹었겠지만, 어디까지나 그는 이용당했을 뿐이고 주범은 따로 있다더군요."- P42
"그런데 밀고자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답니까?"
"나카가미 본인에게 들었대요. 나카가미가 마지마나 모리야에게 불만이 많았는지, 그 두 사람을 거드는 일이 어리석게 느껴진다는 말을 흘리고 다녔답니다."
"그랬으면 그런 사실을 렌자키 교조에게 털어놓으면 되지않았을까요?"- P43
그때 주문한 음식이 나와 또 대화가 잠시 중단되었다.
『주간 트라이』에 실린 기사는 보셨습니까?"
종업원이 물러간 후 후지오카가 물었다.
"네, 봤습니다. 증언한 내용 그대로더군요."
"그런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던가요? 기사에 따르면 렌자키는 횡령에 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던데요. 다만 배신에 관해 나카가미를 꾸짖었을 뿐이고요."- P44
"렌자키가 말한 배신이란 횡령이 아니라 ‘수호의 광명‘ 쪽으로 돌아서는 것을 말하는 거였어요. 그와 같은 배신은 용서할 수 없다는 걸 다른 간부와 신자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말하자면 본보기로 그런 일을 벌인 게 아닐까요? 하지만 나카가미가 ‘수호의 광명‘에 가려고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교단의 이미지가 실추될 테니 나카가미에게 횡령죄를 덮어씌운 거죠. 어떻습니까, 제 추리가?"
구사나기는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P45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경찰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어요. 애초에 그 사건을 살인 사건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으니 말이죠."
"바로 그 점 때문에 의논을 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다시 뵙자고 한 겁니다. 구사나기 씨는 이런 종류의 사건에 강하시잖아요. 뭔가 좋은 아이디어가 없을까요?"- P45
6
오늘 다섯 번째 상담자는 예순이 넘은 남자였다. 신청서에는 자영업자라고 적혀 있었다. 명품을 걸친 건 아니지만 차림새가 그런대로 괜찮았다. 모은 돈이 꽤 있을 거라고 마지마는짐작했다.
남자를 ‘정화의 방으로 안내했다. 창은 열려 있는 상태고,
방 한가운데에 방석이 놓여 있었다.
"여기서 정좌하고 기다리십시오. 잠시 후에 대사가 오실 겁니다."- P46
"얼굴을 드시지요."
렌자키가 상좌에 앉고 나서 말했다.
"번민이 상당히 깊어 보이는군요."
네, 하고 남자가 대답했다.
"도무지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남들의 권유로 주식에 손을 대기도 하고 장사도 해 보았지만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어요.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얼마 남지 않은 퇴직금마저 몽땅 날릴 판이어서 답답한 나머지 이렇게 상담을 청하러 왔습니다."- P47
"바로 그 점입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만 부당하게 고생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요. 실은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는다거나 하는 좋은 일도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현재의 괴로운 상황 탓으로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겁니다. 그런 상태를 우리는 마음에 더러움이 쌓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더러움 때문에 지금의 사태가 벌어진것입니다. 먼저 그 더러움을 제거해야만 합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마지마는 렌자키의 여전한 말솜씨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얼마간 좋은 일도 있었을 거라고 찔러봐서 만일 상대가 대뜸 수긍할 경우에는 그런 탓에 방심한 나머지 마음에 더러움이 쌓였다고 할 것이다.- P48
"그럴 겁니다. 마음의 더러움이 아주 조금이나마 정화된거예요. 이걸 계속하다 보면 반드시 옛날처럼 좋은 일들이 일어날겁니다."
남자가 눈을 빛내며 다다미에 이마가 닿을 만큼 머리를 조아렸다.
한건 했네, 하고 마지마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입회금과수행료를 합해 120만 엔 이 남자에게는 좀 더 우려낼 수 있을 듯하다. ‘구아이의 별‘ 무늬가 새겨진 50만 엔짜리 항아리도 권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P49
모리야는 자신의 잔에 위스키를 콸콸 따랐다.
"저도 깜짝 놀랐어요. 나카가미가 죽었을 때는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끝나나보다 싶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보니 끝나기는커녕 전부 렌자키가 말한 대로 됐어요."
"정말 대단한 친구야."
마지마가 감탄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머릿속이 하얘지던데 그 친구는 오히려 반색하는 거야. 이렇게 효과적인 선전은 없을 거라면서 말이지. 그 친구를 적으로 돌리면 안 된다는 걸 새삼 깨달았어."- P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