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장소
1989년 1월 어느 오후 브라이튼 어딘가에서 학생 할인 중인 책이 눈길을 끌었다. 내 생애 최고로 잘 쓴6.99파운드였다.- P8
거기서 바르셀로나 중심부 어느 모퉁이에 있는 크고 지저분한 건물의 사진을 보았다. 내가 여지껏 본 무엇과도 달랐던 그 건물의 이름은 ‘까사밀라 Casa Mila.‘ 현대적인 아파트 블록처럼 보이는 동시에 놀랍고 원초적인 석재 조형물 같기도 했다.
충격적이었다. 이런 건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P12
이번 여행이 까사밀라와의 첫 만남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건물의 탁월함을 포착하게 된 느낌이다. 나는 런던 킹스크로스에서 분주한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P14
얼마 전 런던에서 건축가 친구와 나눈 대화가기억난다. 당시 우리 스튜디오가 진행하던 건축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직사각형 창문 위에약간의 곡선을 더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이를 친구에게 보여줬더니 친구에게서 "오, 대범한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P14
1912년 까사 밀라가 완공되자 비평가들은 마치 땅속의 돌을 바로 깎아 만든 듯하다 하여 ‘채석장La Pedera‘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P16
가우디는 그때도 지금처럼 센세이션이었다. 까사밀라 공사에 관한 뉴스는 <카탈루냐 삽화llustració Catalana>와 같은 당대 인기 잡지에도 보도되었다.- P16
준공 검사가 안 좋게 끝났다는 얘기를 들은 가우디는 만약 기둥을 깎게 된다면, "이 기둥의 손실된 부분은 시 의회의 명령에 따라깎인 것"이라는 명판을 달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결국 기둥이 깎이는 사태는 면했지만, 대신 10만 페세타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P19
인간은 반복에 이끌리는 성싶다. 그리스 신전의 기둥 배열이나 튜더 시대 주택의 목제보에서 반복하여 나타나는 패턴, 초승달모양으로 늘어선 영국 조지 시대 테라스 주택의 반복적인 창문을 떠올려 본다. 우리는 예술 작품과 물체 속 질서 · 대칭 · 패턴에 자연스럽게 끌린다.- P20
우리가 좋아하는 건 딱 알맞게 조합된 반복과 복잡성이다. 둘 중하나가 아니라 둘 다. 서로를 보완하도록. 이것은 분명 자연 환경속 인간의 진화와 관련되어 있다. 나무로 가득한 숲, 호수 위 잔물결, 나비의 날개 무늬를 떠올려 보면 반복과 복잡성이 어우러진 모습이 연상될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거의 모든 이에게 잔잔한 흥분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P21
<노란 잠수함 Yellow Submarine> 같은 비틀즈 히트곡과 쇼스타코비치 교향곡의 차이는 전자가 반복 쪽으로 기우는 데 반해 후자는 복잡성 쪽으로 기운다는 점이다.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위치한 둘일지라도 사용하는 도구는 같다. 마찬가지로 흥미진진한 소설을 읽거나 최신 스릴러 영화를 관람할 때에도 이야기 속에서 모종의 원형적 양식을 읽어낼 수 있다.- P22
까사밀라 바로 앞 보도에 들어서며 건물 곳곳에 스민 장인 정신을 마주한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되었을 당시 사물의 제작 방식을 이해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기에, 나무를 조각하고 돌을 깎고 강철을 단련하여 사물을 만드는 일이 어떤지 안다.- P24
건물의 석재 표면에서도 장인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멀리서 보면 매끄러워 보일지라도, 제작자는 가까이에서도 매끄럽게 보일 정도로 끌 자국을 다듬는 데에는 딱히 대단한 돈을 들이지 않았다.- P24
까사밀라의 사진을 보고 나라는 청년이 사랑에 빠진 대상은 그저 건물 한 채가 아니라 ‘건물‘이 가진 잠재력이다- P27
까사밀라에서 북동쪽으로 20분을 걸으니 가우디의 건축물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사그라다 파밀리아-Basilica de la Sagrada Familia‘가 보인다.- P29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가우디의 가톨릭 신뿐만 아니라 놀라운 일을 성취해내는 인간의 능력에대한 축제의 장처럼 느껴진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선언하는 것 같다.- P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