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두 사람을 잠자코 바라보던 게이스케가 씩 웃었다. (중략).
"그건 회사 창립 50주년 기념품입니다. 선대 사장이자 저와 유코의 할아버지인 사이다이지 도시로가 사이다이지 출판 주식회사를세운 지 5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해, 아버지가 이 전망실에 브론즈 북을 장식했어요. 아버지 입장에서는 뭔가 후세까지 형태가 남아 있을 기념품을 가지고 싶으셨던 거겠죠. 뭐, 수백 년을 버티는 종이책도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종이책은 보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으니까요."
"확실히 청동이 풍화에는 강하겠죠." 다카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새삼 유리 케이스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P171
"어젯밤 만찬 자리에서 쓰루오카 가즈야가 묘한 소리를 했죠. 자기가 그 비밀을 까발리면 어떻게 될지 아느냐고요. 그 말투로 추측건대 쓰루오카는 뭔가 중대한 비밀을 쥐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그가 쥐고 있던 비밀은 대체 뭘까. 두 분은 뭔가 짚이는 점이 없으십
"니까?"
"어. 그 사람이 그런 소리를?" 유코는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고 보니 쓰루오카가 그 발언을 했을 때, 유코는 이미 식당을 떠난 뒤라 쓰루오카의 발언을 직접 듣지는 못했다.- P172
"(전략). 그리고 생각해 보세요, 탐정님. 정말로 쓰루오카가 사이다이지 가문의 약점을 잡고 있었다면 20년 넘게 비밀을 가슴속에 가만히 품고만 살았을까요?"
"그렇군요. 확실히 잠자코 있지 않았겠죠. 좀 더 빨리 찾아와서 돈을 뜯어내든 어쨌든 무슨 행동에 나섰을 겁니다. 그는 그런 인간이에요."
"네, 그는 그런 인간이에요." 게이스케가 말했다.
"맞아요, 그는 그런 인간이에요." 유코도 맞장구를 쳤다.- P173
사야카는 전부터 머릿속에 있었던 생각 한 가지를 꺼내 놓았다.
"쓰루오카가 사이다이지 가문에 쳐들어와 돈을 갈취하는 짓은 하지 않았겠죠. 하지만 그는 다른 형태로 큰돈을 얻었어요. 사이다이지 고로 씨의 유언이라는 형태로요."
(중략).
사야카는 단어를 골라가며 말을 이었다. "어, 그러니까 쓰루오카는 실제로 무슨 비밀을 쥐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사이다이지 고로 씨가 그에게 유산을 남겼을지도 모른다는.."- P173
뜻밖에도 다카오가 사야카의 가설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나섰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로군. 하지만 난 납득이 안 돼. 가령 당신말대로 고로 씨가 입막음 조로 쓰루오카에게 유산을 남겼다고 치자. 그럴 경우, 쓰루오카는 고로 씨의 부고를 듣자마자 제 발로 사이다이지 가문에 얼굴을 내밀 거야. 그런데 실제로는 신변을 감추듯 조용히 살고 있어서, 마사에 씨가 그를 찾아내기 위해 실력 좋은 탐정을 고용해야 했을 정도였지."
실력 좋은 탐정?! 아니, 뭐, 됐다.- P174
"그럼 제 상상이 틀린 걸까요? 쓰루오카가 비밀을 쥐고 있던 것과 고로 씨가 쓰루오카에게 유산을 남긴 건 전혀 무관한 일일까요?"
"글쎄, 무관한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쓰루오카는 고로 씨가 유산을 물려주리라는 걸 상상도 못 했을 거야. 쓰루오카의 태도를 보면 짐작이 가지. 결코 쓰루오카가 사이다이지 가문의 비밀을 꼬투리 삼아, 유산을 남겨 달라고 고로 씨를 협박한 건 아니야. 그렇다면 고로 씨가 유언장에 쓰루오카의 이름을 올린 건 순수한 고인의 의사라고 봐야겠지. 반대로 쓰루오카에게는 예상치 못하게 호박이넝쿨째로 굴러떨어진 셈이고."- P175
"탐정님은 대체 무슨 권한으로 남의 집 비밀을 파헤치려는 건데요?"
"엇?! 무슨 권한이라니...... 권한?!" 그런 단어는 처음 듣는다는 듯이 다카오는 고개를 꼬며 말했다. "그, 그야, 그러니까 그거죠.
그, 뭐더라. 어...... 아버지가 오카야마 현경의 수사1과장이라는걸로는 안 되겠습니까?"
"당연히 안 되죠!" 유코는 더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대답했다.- P176
(전략). 한편 탐정은 방금까지 오갔던 대화를 듣고 문득 현실을 인식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요. 확실히 유코 씨 말씀이 옳습니다. 제게 이 사건을 조사해달라고 의뢰한 사람은 없죠. 즉, 진실을 밝혀 본들 땡전 한푼안나오는 거야!"
결국 돈 문제구나! 속으로 핀잔을 준 사야카는 그의 가치관을 일부 엿본 기분이었다.- P178
3
(전략).
다카오는 1인용 의자에 떡하니 앉아 두 다리를 앞으로 아무렇게나쭉 뻗은, 예의 바르지 못한 자세로 "아이고, 어쩐지 피곤하네"라고 한숨을 섞어 약한 소리를 내뱉었다.
"피곤하기는 뭐가 피곤해요. 아직 사건의 수수께끼는 하나도 해명되지 않았다고요."
사야카도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다카오는 뒤통수에 깍지를 끼고 말했다.- P178
사야카가 그런 생각을 하던 바로 그때, 탐정의 양복 안주머니에서 핸드폰 수신음이 울렸다.
(중략).
다카오는 또 무슨 생각인지, 청소 도구함으로 들어가서 문을 탁닫았다. 청소도구함이 일시적으로 전화부스가 된 셈이다. 어지간히도 통화 내용을 남에게 들려주기 싫었나 보다.
"뭐, 뭐예요. 진짜!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훔쳐 들을 리………………"
사야카는 큰소리를 지르며 망설임 없이 청소 도구함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중략). 두 사람의 통화가 막바지에 다다른 모양이다.
"네....... 네...... 압니다....... 네, 물론・・・・・・ 네, 저 고바야카와다카오가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사건의 수수께끼는 반드시 제가……………. 네...... 어, 어머니의 이름을 걸고!"
"앗, 어머니?! 그건 그렇고 방금 어떤 만화의 아주 유명한 대사(*『소년탐정 김전일』에 나오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를 뜻한다)를 대놓고 표절하지 않았나?!‘
여러모로 놀라서 사야카는 눈이 동그래졌다. 동시에 문 안쪽에서 말이 뚝 끊겼다.- P181
그러자 다카오가 맹렬한 기세로 말을 쏟아냈다.
"소장님이야, 소장님. ‘고바야카와 탐정 사무소‘의 위대한 소장님!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지! 소장님이 사건을 해결하고 와라. 경찰에 지지 마라 하고 내게 지시했어. 그러니 사건을 해결하는 수밖에. 탐정 사무소의 위신을 걸고! 일찍이 명탐정이라 불렸던 소장님의 이름을 걸고!"- P182
4
(전략).
"사건을 조사하려는 거죠? 어디로 가는 건데요?"
사야카의 질문에 검은색 정장 차림의 탐정은 복도를 나아가며 대답했다. "유코 씨와 게이스케 씨에게는 일단 이야기를 들었어. 그렇다면 이번에는 첫째인 에이코 씨 차례겠지. 에이코 씨 방에 갈 거니까 당신도 가자. 나 혼자 가면 경계할 우려가 있으니까."
"확실히 그렇긴 해요. 탐정인 줄 알았던 사람이 실은 살인범일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으니까요."- P183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에 사야카는 새삼 소박한 질문을 꺼냈다. "저기, 고바야카와씨. 이 계단 묘하지 않아요? 1층의 내 방에서 1층에 있는 식당으로곧장 갈 수가 없다니까요. 이 계단으로 일단 2층에 올라가서 복도한복판에 있는 나선계단을 내려가야 1층 식당에 다다르는 구조에요. 대체 왜?"
"나한테 물어본들 알겠나. 나도 이 저택에 온 후로 내내 신기했어. 뭔가 이유가 있는 걸까?"
이유도 없이 이런 구조로 만들었다면, 그야말로 기묘하다.- P184
"에이코 씨, 혼자 계셨어요? 집안의 가장은 어디에?"
실제로는 에이코가 주인마님이고, 아쓰히코가 머슴 같은 이미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그렇게 물어보았다. 에이코는 정면의 의자에 앉으며 대답했다.
"남편은 미사키 방에 있어요. 딸아이가 걱정되는 거겠죠."
"무리도 아니죠. 쓰루오카 씨를 죽인 범인은 아직 섬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어쩌면 섬이 아니라 이 저택에 있을지도모르니까."- P185
"어머, 탐정님. 혹시 제 알리바이라도 조사하겠다는 건가요?"
"아니요 아니요, 알리바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애당초 알리바이를 조사하는 데는 무리가 있습니다. 쓰루오카의 시신을 살펴본다카자와 선생님은 막연하게 범행이 어젯밤에 일어났다는 의견을제시했을 뿐, 사망추정시각을 자세하게 말씀하시지는 않았으니까요. 아마도 법의학 쪽은 전문이 아니겠죠. (후략)."- P186
다카오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에이코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젯밤 늦은 시각? 아니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요. 침대에 누워서 푹 잠들었을 시간이니까요. 남편은 함께 있었지만 코를 골며 잠들었으니 분명 저보다 더 숙면을 취했겠죠. 가령 이게 알리바이 조사라면 우리 부부는 둘 다 알리바이가 성립하지 않겠네요. 호호호."- P186
사야카는 질문을 망설이는 다카오를 곁눈질하다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저기, 어제 늦은 밤에 중정에서 뭔가 못 보셨나요?"
"흠, 중정에서 뭔가라니요? 중정에 뭔가 있었나요?"
"어, 그러니까...... 예를 들면 오두막이랄까, 정자랄까......."
"정자?!" 에이코는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라면 중정이 아니라 뒤뜰에 있잖아요? 거기서 가즈야 오빠의 시신이 발견됐고요. 그게 왜 중정에 있어요?"- P187
에이코는 고개를 설레설레흔들더니, 사야카에게 딱하다는 듯한 눈빛을 던졌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중정에 정자라니, 그런 게 있을 리없잖아요."
"그, 그렇죠......." 사야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속으로에이코에게 불만을 툴툴 늘어놓았다. ‘애당초 당신 딸이 그걸 봤대서 물어보는 거잖아!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건 꿈일 거야! 당연하잖아!"- P188
그런데 그 직후에 갑자기 중대한 뭔가가 생각난 것처럼 다카오가
"아아, 그렇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는데요" 하고 대뜸 물었다.
"저기, 에이코 씨. ‘그때‘는 언제입니까?"
그 순간 에이코는 분명 움찔했다. 하지만 바로 냉정한 표정을 되찾고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제가 언제 그런 말을?"
"그게, 에이코 씨가 하신 말씀은 아니고요. 마사에 씨가 에이코씨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죠. 고용인 고이케 기요시 씨가 이번 살인사건을 사고로 위장하면 어떻겠느냐고 근사한 제안을 했을 때요.
에이코 씨가 ‘어때요, 마사에 고모? 하고 의견을 묻자 마사에 씨는안 된다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기요시의 생각에는 동참할 수 없어. 그때와는 달라‘라고요. 저한테는 마사에 씨의 대답이 약간 이상하게 들렸는데, 에이코 씨는 아무래도 수긍하신 눈치였습니다."
"그, 그랬었나. 잘 기억이 안 나는데요."- P189
이 일을 중대한 문제로 삼고 싶지 않다는 강한 의지가 에이코의 태도에서 엿보였다.
그래도 다카오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흠, 마사에 씨의 머릿속에 딱 떠오른 ‘그때요? 아, 혹시 그 ‘비밀‘에 관련된 일 아닙니까?"
"비밀?! 아아, 어젯밤 만찬 자리에서 가즈야 오빠가 떠벌렸던 그거요?"
"그렇습니다. 쓰루오카가 떠벌렸던 그거요."- P190
더 이상 깊이 추궁해 봤자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다카오는 "에이코 씨 말씀이 옳을지도 모르겠네요" 하고 태도를 싹 바꾸어 이해심있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테이블에 놓아두었던 커피를 조용히 들이마셨다.- P190
5장
23년 전의 사건
1
(전략). 사야카는 불만에 찬 표정으로 옆에 있는 탐정을 쳐다보았다.
"고바야카와 씨.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네요. 왜죠? 에이코 씨는 분명 뭔가 알고 있을 거예요. 척 보기에도 심하게 동요했다고요."
"맞아. 하지만 너무 자극해도 역효과가 나겠지. 그들이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면 앞으로 일을 풀어 나가기가 힘들어. (후략)."- P191
사야카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앞서서 올라가던 탐정이 말했다.
"오히려 사이다이지 가문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어야 가망이 있을지도 모르지."- P192
당구대 옆에는 남자 두 명이 큐대를 들고 서 있었다. 다카자와 나오토와 도라쿠 스님이었다. 다카자와는 흰색 와이셔츠에 감색 바지스님은 베이지라기보다 차라리 ‘낙타색‘이라고 하고 싶은 구성진 색상의 전통 작업복 차림이었다. 순수한 일본풍 복장으로 큐대를 들고 당구대 옆에 서 있는 모습은 실로 초현실적이라고 할까, 허무개그 같다고 할까, 아니면 경건하지 못하다고 해야 할까.- P192
곧바로 게임룸에 이완된 분위기가 감돌았다. 탐정은 공을 치는 기술은 뛰어나지만 당구 규칙은 전혀 모르는 모양이다. 대체 어디서 큐대를 다루는 기술만 배운 걸까. 사야카는 고개를 갸웃거리지않을 수 없었다.
다카오는 그다지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큐대를 스님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뭐, 규칙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당구를 치려고 여기 온 건아니니까요. 그렇지, 실은 선생님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P194
(전략). 하지만 다카오는 그런 스님에게 등을 휙 돌려 다카자와와 마주 보았다.
"실은 어젯밤 일을 여쭤보고 싶어서요. 만찬 때 쓰루오카와 유코씨가 말다툼을 벌였고, 유코 씨가 식당을 떠났죠. 그 직후에 선생님도 유코 씨를 뒤쫓듯 식당을 나가셨고요. 그때 두 분이 어떤 말씀을나누셨는지 아무래도 궁금하더라고요. 대답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
"아아. 그때....... 그렇다면 이야기는 간단하지요. 식당을 나선유코 씨를 따라잡아, 그대로 어둠 속에서 유코 씨를 다정하게 끌어안고....... 헤헷."
"저기요, 스님, 입 좀 다물어 주면 안 되겠습니까. 지금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라...."- P195
다카자와는 화난 듯 은테 안경을 손끝으로 밀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분명 그때 유코 씨를 쫓아갔습니다. 모욕을 받고 슬퍼하는유코 씨를 내버려둘 수가 없었거든요. 저는 2층으로 향하는 나선계단에서 유코 씨를 따라잡았습니다. 따라잡기는 했지만 뭐라고 할말을 못 찾겠더군요. 게다가 원래 유코 씨는 그렇게 약한 여자가 아니에요. 속내는 어떻든 겉으로는 굳세게 행동했습니다. 제가 괜찮냐고 물어보자 쓴웃음을 지으며 ‘죄송해요.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렸네요‘ 하고 대답했어요. 그뿐입니다. 유코 씨는 제게 인사한 후몸을 돌려 계단을 총총히 뛰어 올라갔습니다."- P195
(전략). 사야카는 궤도에서 이탈한 화제를 되돌리기 위해 의사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그 후에 어떻게 하셨어요?"
"더는 유코 씨를 쫓아갈 수가 없겠더군요. 떠나가는 유코 씨의 뒷모습이 혼자 놔두라고 호소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아마 유코 씨는그대로 자기 방으로 갔겠죠. 전망실에 갔을지도 모르고요."
"그럼 선생님은 어디로? 식당에는 안 돌아오셨잖아요."
"네. 그 상황에서 혼자 터덜터덜 식당으로 돌아가도 멋쩍기만 할테니까요. 하는 수 없이 저택을 나서서 정원을 산책했습니다. 그때는 아직 비가 내리지 않았거든요. 기분 내키는 대로 잠시 중정과 건물 주변을 돌아다녔습니다."- P196
"저어, 좀 엉뚱하게 들리시겠지만, 그때 중정에 부자연스러운 부분이나 마음에 걸리는 점은 없었나요? 어, 그러니까예를 들면 ‘낯선 오두막‘이 있었다든가."
너무 직설적이지 않느냐는 듯이 탐정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사야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히려 직설적이라서 상대의 의혹을 사지 않은 것도 같았다. (중략).
다카자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니요, 중정은 평소와 다름없었습니다.‘라고만 대답했다.- P197
이번에는 다카오가 물었다. "그럼 뒤뜰에는 가셨습니까? 정자가있는 뒤뜰요."
"네 갔습니다. 어슬렁어슬렁 걷다 보니 자연스레 발길이 그쪽으로 향했죠."
말을 마치자마자 다카자와의 단정한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확번졌다. 그리고 자신의 발언을 취소하겠다는 듯 양손을 내저었다.
"앗, 착각은 하지 마세요. 탐정님. 그때 저는 혼자였습니다. 정자도 그냥 지나쳤을 뿐이에요. 누구하고도 안 만났습니다."- P197
"하지만 동기는 있죠. 분명 기회도요. 선생님, 어젯밤 늦은 시각에 알리바이도 없지 않나요?"
탐정은 일부러 도발적인 말을 던졌다. 다카자와는 더욱 감정이격해진 말투로 대답했다.
"그, 그야 누구든지 늦은 밤에는 혼자 방에 있을 테니까요. 누구에게나 범행을 저지를 기회가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동기도 저한테만 있는 건 아닐 테죠. 다른 사람들에게도 뭔가 동기가 있지 않을까요?"- P198
"그렇습니다. 즉, 쓰루오카는 그 비밀을 지키고 싶은 사람 손에살해당했을 가능성이 있는 거죠. 선생님, 쓰루오카가 언급한 ‘비밀‘
에 관해 뭔가 짚이는 점은 없으십니까?"
탐정이 상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다카자와는단정한 얼굴에 동요한 기색을 드러내며 입을 다물었다. 옆에서 도라쿠 스님이 소외된 설움을 풀풀 풍기며 말했다.- P199
다카자와는 닫힌 문으로 다가가 손끝으로 자물쇠 손잡이를 돌렸다. 문이 안에서 잠기자 게임룸은 이제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밀실이 되었다.
고요해진 밀실에서 탐정이 다카자와를 다그쳤다.
"비밀 이야기라고요?! 그럼 선생님은 역시 뭔가 비밀을 아시는거로군요"- P202
그러자 다카자와는 게임룸에 있으면서 어딘지 먼 곳을 보는 듯한 눈빛을 지었다. 그리고 먼 옛일을 이야기하듯 더듬더듬하는 말투로 사야카와 다카오가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건 세상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어떤 사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무대는 23년 전의 비탈섬이고요. 사이다이지 출판의 초대 사장님인 사이다이지 도시로 씨를 찾아온 갑작스러운 죽음에 얽힌 일이죠."- P203
2
(전략).
그 말에 다카자와 나오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엄밀하게 말하면 조금 다릅니다. 1995년 당시에 이 별장은 아직 ‘화강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거든요. 다들 그냥 ‘비탈섬의 별장‘이라고불렀던 것 같습니다. 형태도 지금과는 전혀 달랐고요. 지금은 コ 모양의 건물에 공처럼 둥근 전망실이 얹혀 있는 특이한 형태지만, 당시는 별 특징 없늨 2층짜리 직육면체 건물이었어요."- P203
"총 열두 명입니까. 이번 사십구재 법사 참석자와 꽤 많이 겹치는군요." 다카오는 젊은 의사에게 얼굴을 쑥 들이밀고 말했다. "만약을 위해 물어보는 건데, 방해만 되는 스님은 없었습니까? 도라쿠스님 또는 그의 선대 스님은 참석하지 않은 거죠?"- P204
"오, 아직 열세 살이라. 선생님은 그 무렵부터 사이다이지 가문사람들과 어울리셨던 겁니까?"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실은 제가 소년 시절 그 가문분들과 제대로 만났던 건 23년 전 봄방학 때 딱 한 번뿐이에요. 사이다이지 가문과 관계가 있다고 해도, 아버지가 주치의로서 드나들었을 뿐저는 친척도 뭐도 아니니까요. 아버지는 사이다이지 가문분들과 자주 접할 기회가 있었겠지만, 저는 아버지의 이야기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분명 장래에 제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었을 때를 염두에 두고 일찌감치 저를 사이다이지 가문에 소개하고 싶었던 거겠죠. 그래서 아직 중학생인 저를 굳이 비탈섬에 데려갔을 거예요. 나이상으로도 게이스케 씨와 또래니까요."- P205
"네. 한적하고 평온한 시간이 사흘쯤 이어졌습니다. 다들 그렇듯 평화로운 시간이 휴가 마지막 날까지 계속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죠. 그런데 그런 평온한 나날이 단번에 돌변했어요. 아직도 똑똑히 기억나네요. 섬에 건너간 지 나흘째가 되는 날 밤이었죠."- P206
사야카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다카오도 잠자코 다카자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스름한 방에는 베갯머리의 전기스탠드만 희미하게 켜져 있었습니다. 정면에 한층 호화로운 침대가 보이더군요. 두툼한 이불은 몹시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이불 끄트머리로 잠옷 차림의 남자가 보였죠. 침대 위에서 바닥으로 미끄러져 떨어진 듯한, 아주 부자연스러운 자세였습니다. 두 다리만 침대 위에 걸친 상태로, 상체는 바닥에 누워 있었죠. 남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풍성한 백발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 저는 드디어 알아차렸습니다. 그 남자가 사이다이지 도시로 씨라는 사실을요. (후략)."- P208
. 한편 다카오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23년 전, 당시 사이다이지 가문의 가장이 칼에 찔려 살해당했다고요?! 아니, 그런 이야기는 못 들어봤습니다만. 사실이라면 당연히 지역 뉴스에서 크게 다루었을 텐데요."
하지만 다카자와는 "사실입니다" 하고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카오는 더 이상 자세하게 캐묻지 않고 이야기를 재촉했다.- P209
"범인을 쫓아갔다고요?!" 뜻밖의 말에 놀랐는지 다카오의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쫓아간대도, 어떻게요? 그것보다 범인이 누구인지 어떻게 알고요?"
"아니요, 범인이 누구인지는 물론 모릅니다. 하지만 봤어요. 보였습니다."
"보였다니요?"- P209
"이야, 아주 용감하시군요." 다카오의 입에서 감탄의 말이 나왔다.
"용감한 게 아니라 무모한 것 아닌가요?!" 사야카는 기가 막혀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이 고작이었다. "선생님, 그때 중학생이었잖아요."
"네. 장래에 의사가 되어서 탐정의 조수로 들어갈까, 아니면 탐정이 되어서 의사를 조수로 삼을까 진심으로 고민하던 중학생 남자아이였죠."
잘생긴 의사는 뜻밖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이건 이것대로 충격적이었다.- P210
"선생님, 수상한 사람을 쫓아 숲속으로 들어가신 다음에는 어떻게 됐나요? 추적에 성공했나요?"
"물론 쫓아가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비탈섬은사이다이지 가문의 별장을 제외하면 불빛 하나 없는 외딴 섬이니까요. 다만 그날 밤은 보름달이 휘영청 밝아 주변이 희미하게나마 보였어요. 덧붙여 앞에서 도망가는 범인은 의외로 얼빠진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범인은 손에 조명 기구를 들고 있었습니다. 손전등이나 펜 라이트 같은 조명 기구를요. (후략)."- P211
"딱히 겁먹은 건 아닙니다. 머리를 좀 썼을 뿐이죠. 균열이 생긴부분에 놓인 다리는 하나뿐. 그리고 다리 건너에는 아무것도 없습
"니다."
"아무것도 없다니요?! 진공이라는 뜻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카자와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도망칠 곳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비탈섬은 이름대로 섬 남쪽에서 북쪽이 오르막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북쪽 가장자리에서 오르막이 끝나죠. 거기서부터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거의 수직으로 바다와 이어집니다. 그야말로 단애절벽이죠."- P213
"기껏해야 15분이나 20분 정도였을 겁니다. 아버지와 고로 씨는이대로 다리 앞에서 가만히 기다릴지, 누군가 범인을 찾으러 다리를 건너갈지를 의논했습니다. 물론 누군가 다리를 건너가더라도 다른 사람이 다리 앞에서 감시할 필요가 있었죠. 그렇다고 해도 중학생 혼자 남아서 감시하는 건 위험하지 않겠느냐고 두 분이 상의하고 있을 때, 숲속에서 지원군이 한 명 더 나타났습니다. 쓰루오카 가즈야였어요. (후략)."- P214
"고로 씨와 쓰루오카는 30분쯤 후에 저희가 있는 통나무 다리로돌아왔습니다. 돌아오자마자 쓰루오카가 다리 건너편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하더군요. 고로 씨도 바위 뒤편이나 나무 덤불을 빈틈없이 살펴봤지만 쥐새끼 한 마리 못 봤다고 하셨고요. 그리고 두 사람은 제게 이구동성으로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정말로 범인이이 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봤느냐고요. 저는 물론 똑똑히 봤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죠. 그렇다면 이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중학생의 머리로도 간단히 이해가 가더군요."- P215
"다리를 건넌 범인은 섬 북쪽 벼랑, 통칭 ‘도깨비 뒤집기 벼랑에서 바다로 몸을 던졌다. 정황상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죠. 즉,
사이다이지 도시로 씨를 살해한 범인은 막다른 골목에 몰린 끝에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겁니다."- P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