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에는 반대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애당초 여기에는 사이다이지 가문 사람만 있는 게 아니야. 고이케 부부와 다카자와 선생님은, 뭐, 협력해 준다고 치더라도, 예를 들면 아주 입이 가벼워 보이는 스님이 있지. 과연 스님의 입을 막아 놓을 수 있을까?"
"그건 무리지요." 도라쿠 스님은 바로 인정했다. "스스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제 입은 가볍기로 정평이 났습니다. 이렇게 중대한사건의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기는 힘들겠지요."- P151
"그리고 어쩐지 믿음이 가지 않는 탐정도 있어. 저 사람은 우리 거짓말에 기꺼이 협력해 주겠지. 다만 그 대가로 대체 얼마를 요구할지 몰라. 분명 죽을 때까지 뜯어먹으려고 할 거야."
"그런 짓 안 합니다! 마사에 씨, 탐정이라는 직업에 편견이 있군요!"
다카오는 뿔난 표정으로 항의했다.- P151
"잘됐네요, 고바야카와씨. 당신이라는 존재가 큰 도움이 됐어요!"
"그런가. 하나도 기쁘지 않은데......." 탐정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어쨌거나 거실에서 열린 파란만장한 회의는 겨우 마무리된 듯했다. 마사에가 모두의 의견을 정리하듯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럼, 경찰에 신고할게. 괜찮지?"
안 된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P152
고바야카와 다카오가 경찰에 신고한 후? 무거운 분위기가 거실을 장악했다.
(중략).
하지만 아까 다카오가 중얼거린 말이 사야카의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태풍이 접근 중인 외딴 섬에 과연 경찰은 어떻게 출동할까.
한 가지가 더 생각났다. 어제 벤텐마루호로 섬에 왔을 때 상고머리선장이 한마디 하지 않았던가. 비탈섬 부근 바다에는 숨겨진 암초가 많아서 물결이 잔잔할 때도 안심은 금물이다.- P153
"잠깐, 유코. 어디 가는 거야?"
"어디냐니, 내 방이지." 유코는 딱딱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래도 상관없잖아, 오빠? 경찰이 도착했을 때 바로 나와서 맞이하면아무 문제도 없을 거야."
"아니, 문제 있어." 게이스케도 소파에서 일어나서 동생에게 다가갔다. "지금은 혼자 있으면 위험해. 아까 못 들었어? 외부에서 침입한 살인범이 섬을 어슬렁거릴 가능성이 있다고."- P154
고용인 부부 중 남편인 고이케 기요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에이코 앞에 나섰다.
"저어, 만에 하나의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저희는 가나에 님곁에 있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가나에 님 혼자 계시는 게어쩐지 걱정돼서…………."
"알았어요. 가 봐요." 에이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도 충분히 조심하도록 해요."- P155
그때 사야카 옆에서 느닷없이 ‘릴릴릴리‘ 하고 전자음이 울려퍼졌다. 깜짝 놀라 시선을 주자 분홍색 집 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중략).
"아, 여보세요. 사이다이지 씨 댁입니까?"
(중략).
"아, 네. 댁이랄까, 사이다이지 가문의 별장인데요……... 어, 누구세요?"
"아참, 소개가 늦었네요." 전화 저편에서 이마를 찰싹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저는 오카야마 현경 수사과의 과장으로 있는 소마 다카유키라고 합니다."- P156
그러자 전화 저편의 남자는 "아니요 아니요. 저야말로요" 하고 송구스러워하더니,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런데 저희 아들이 그쪽에 신세를 지고 있을 텐데요."
"앗, 아드님이요?!" 사야카는 어리둥절해졌다. 이곳에 형사의 아들이 있었나. - P158
"거기서 기다려야겠지. 달리 뾰족한 수가 없어. 경찰은 당분간 그섬에 갈 수가 없으니까. 적어도 이번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는 불가능해. 하기야 하나가 지나가도 다음 태풍이 접근하는 중이지만, 후후."
"후후? 에이씨, 지금이 웃을 때야?"
"안 웃었어. 방금 그건 낙담의 한숨이야. 후우."
수사1과장은 수화기에 대고 일부러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뭐, 그렇게 됐으니 뒷일 잘 부탁한다. 저택 사람들이 의심에 사로잡혀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주의해. 그리고 혹시 몰라서 말해 두는데, 목소리가 귀여운 아가씨에게 혹해서 추근거리면 안 돼."- P159
고바야카와 다카오는 침울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화기를 든 그의 주변에는 사야카는 물론이고 사이다이지 가문의 관계자들이 빠짐없이 모여 있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다들 아버지와아들의 희한한 통화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수화기에서 새어 나오는 수사1과장의 더럽게 큰 목소리는 전부그들의 귀에 들어갔다.- P160
4장
고립된 저택에서
(전략).
"확실히 지독한 악천후네요. 이래서는 경찰이 못 올 만도 한가......."
돔 모양의 전망실. 사야카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창문으로 거칠어진 바다 풍경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옆에서 창문을 바라보던 사이다이지 마사에도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사태가 벌어졌어. 하필 이럴 때 경찰에 의지하지 못할 줄이야……………"- P161
다카오는 눈꼬리를 추켜올리며 양복 가슴께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남에게 말 못 할 가정사 같은거 없어. 난 태어났을 때부터 소마 다카오였다고."
"이야, 그쪽이 본명이로군요." 사야카는 뜻밖이라는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소마 다카오 씨가 굳이 고바야카와라는 성씨를 쓰는 이유는 뭔가요? 목소리가 큰 아버지와 잘 안 맞아서?"- P162
"(전략). 뭐, 일종의 예명 같은 거지. 아니면 탐정명이라고 해야 하려나."
‘명탐정‘이라는 말은 자주 듣지만 ‘탐정명‘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봤다. 그야 어쨌든 그가 말하는 바는 사야카도 이해가 갔다. 분명 진실일 것이다.- P163
"아니, 그건 나도 몰라. 애당초 범인이 쓰루오카를 살해한 동기도 모르는걸. 아참, 그와 관련해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
난 개봉하는 자리에 입회하지 못해서 유언장의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쓰루오카의 몫이 꽤 짭짤했으리라는 건 짐작이 가. 어젯밤 만찬 자리에서 쓰루오카는 기분이 아주 좋았으니까."
"네, 맞아요. 그런데 그게 왜......?"- P164
마사에는 진심으로 낙담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못한 듯 사야카를 물고 늘어졌다. "난 가즈야 군의 이모야. 그래도 안 되나?"
"네, 안 돼요. 쓰루오카 가즈야가 유언장에 ‘유산을 이모 사이다이지 마사에에게 물려준다‘라고 적었으면 별개지만요. 설마하니 그런 문서는 없죠?"
"뭐, 없겠지." 마사에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힘없이 웃었다. "아아, 아쉬워라!"- P165
"그래. 그럼 분명 과장해서 말한 거겠지. 가즈야 군은 중대한 비밀을 쥘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 그 정도는 탐정님도 알텐데?"
"흠, 확실히 쓰루오카가 사이다이지 가문에서 중요한 존재였다고 볼 수는 없겠죠. ‘화장‘에도 23년 만에 방문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그만큼 어쩐지 묘해요. 대체 어떤 비밀을 가리키며 그런 소리를 한 걸까요."
그 점은 사야카도 마음에 걸렸다. 다카오 말대로 유산 상속이 쓰루오카를 살해한 동기가 아니라면, 필연적으로 그가 입 밖에 낸 ‘비밀‘이라는 말이 부각된다.- P166
2
(전략).
"이야, 두분도 여기 계셨군요. 탐정님, 바다 상태는 어떻습니까?"
탐정은 남쪽 창문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별문제 없습니다. 평소보다파도가 좀 높고, 너울이 심하게 일고, 시야가 안좋을 뿐입니다."
바로 그게 큰 문제잖아! 사야카는 무심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다카오는 개의치 않고 슬쩍 질문을 던졌다. "두 분도 바다 상태가궁금해서 오셨습니까?"
이 질문에는 유코가 대답했다.- P168
다카오가 감정이 깃들지 않은 목소리로 대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묻지도 않았는데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개인적으로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외딴섬 퍼즐』가가미 마사유키의 『감옥섬』을 추천합니다."
그 작품들은 분명 걸작이지만, 지금 비탈섬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는 절대로 추천 못 해.- P168
어제도 사야카와 다카오 사이에서 잠시 화제가 된 유리 케이스다. 안에는 책 모양 오브제가 들어 있다.
다카오가 물었다. "이것은 뭡니까?"
"이것은 책입니다." 게이스케가 성실하게 답변했다.
사야카는 중학교 1학년 때 배웠던 영어 교과서 첫 페이지가 생각나서 묘한 감개에 젖었다.
이렇게까지 수준 낮은 대화를 지켜볼 기회는 평생 한 번 있을까말까 할 것이다.- P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