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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可無不可

며칠 전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깜.놀. 하고 말았다.

목소리는 내가 익히 아는 강신주의 목소린데, 얼굴은 낯설었다.

채널을 고정시키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강신주가 맞았다.

그 강신주가 맞는데 살은 빠지다 못해 야위어 있었고,

그동안 보지못했던 앉은 자세로 강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사진 인터넷신문 재인용)

 

강의 주제는 '코로나19 시대, 제대로 사랑하고 있나요?'였다는데,

관심 있는 분은 찾아보시는 걸로 하고, ㅋ~.

내가 충격을 받았던 부분은,

그동안의 강신주는 둥글둥글한 외모와는 달리 강의내용과 방식이 날카롭고 공격적이어서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그런 것이었는데,

이날 강의는 날카로워진 외모와는 달리 강의내용은 둥글둥글 위로의 빨간 약이었기 때문이다.

앉아서 진행하는 건 강의가 아니라 담화라는 내 선입견의 문제일수도 있으나,

예전엔 보지 못했던 진행 방식이어서 생경했다.

 

그의 상태를 다른 말로 바꾸어보자면 '병색이 완연하다'이다.

지금 텔레비전에 나와 강의를 진행하고,

밀린 책을 쓰고 할 상태가 아니다.

일단 자신의 건강을 돌보시고, 쾌차하시길 바란다.

 

(누군가는 자발적 다이어트라는 경우의 수를 배제하지 않던데...

또 한가지 생각해볼 수 있는 건 구도나 수행을 위하여 정신을 명징하고 맑게 하기 위하여 다이어트를 하는 경우인데,

그럴 경우엔 눈빛이 같이 맑아지지 않나~(,.))

 

건강을 염려하는 철학자가 한명 더 있는데, 바로 강유원이다.

제주도에서 요양을 하시고 회복중이시라는 얘기,

제주도 어디 도서관이었나(?) 강의 공지를 본 것도 같은데,

제주도여서 엄두를 못 냈던 기억이 있다.

 

 

 

 

 책 읽기의 끝과 시작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20년 4월

 

알라딘 마실을 다니다가 이 책을 만났고,

응원하는 의미로 이 책을 구입하였으나,

강유원이 말하는 독서의 의미로 이 책을 읽어낼 자신은 없다.

그저 나처럼 책을 옆에 두고 지식을 얻은 듯 뿌듯해 하는 사람도 있다 쯤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어떤 이에게는 책읽기가 아무런 목적이 없는 행위이기도 하다. 책을 읽는 자신의 모습 자체가 스스로 기특해서 책을 읽는 사람도 있고, 우울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서나 기쁜 마음을 고조시키기 위해 책을 읽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쾌락적 독서는 읽기에서 시작하여 읽기에서 끝나므로, 책을 읽고 나서 자신이 읽은 내용 중에서 기억하는 것이 전혀 없다 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저읽기'를 목적으로 한다면, 그저 읽는 것이 좋다. 그것에 대해 뭐라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책읽기의 본래 목적은 지식을 얻는 것이다.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 머리 속에 지식을 입력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책의 내용이나 저자의 논지가 자신의 생각 속으로 들어와 자신의 것처럼 구사되고 활용될 수 있다는 것, 즉 자기화하는 것까지 의미한다.

그렇다면 책읽기를 자기화할 수 있게 잘 읽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내 대답은 이렇다. 자신이 읽은 책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것을 전제하고 읽으면 된다는 것이다. (9~10쪽)

 

강유원이 말하는 독서의 의미로 이 책을 읽어낼 자신이 없다고 한 이유는,

1부 8점, 2부 5점, 3부 23점, 부록 '장미의 이름'다시읽기 1점 등 36~37점의 서평이 나오는데,

내가 읽은 책은 장미의 이름 1점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지긋지긋하게 떨치지 못 하는 병, '장서'의 욕심이 있어서,

읽지는 못했어도 소장하고 있는 책은 여러권 나와야 하는데,

가지고 있는 것은 고작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와 '역사란 무엇인가','장미의 이름' 정도이다.

 

암튼 자기만족을 위해 책을 읽는 내가,

요즘 강유원 식 책읽기에 가깝게 읽는 책은 '『장자』곽상주 해제'이다.

 

 

『장자』 곽상주 해제
 김학목 옮김 / 학고방 /

 2020년 11월

 

장자 책 내용이 실리고, 그 밑에 곽상주 해제가 실리고, 한번씩 김학목 님의 해설이 등장한다.

 

알라딘 프로필 상태인 '無可無不可'를 난 논어에 나오는 말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 발견하다니 흥미로웠다.

장자 책 내용은 아니었고 곽상주 해제 부분이었지만,

그동안 난 無可無不可를 '중용'쯤으로 생각했던터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말 해석 부분만 옮겨보면 이렇다.

삶과 죽음의 변화는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사시의 운행과 같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의 정황이 다를지라도 각기 처해진 상황에 편안히 있는 것에서는 같다. 지금 살아 있는 자는 삶을 삶이라고 이제 막 스스로 말하고, 죽은 자는 삶을 죽음이라고 이제 막 스스로 말하니, 삶은 없는 것이다. 살아있는 자는 죽음을 죽음이라고 이제 막 스스로 말하지만 죽은 자는 죽음을 삶이라고 이제 막 스스로 말하니, 죽음은 없는 것이다. 삶도 없고 죽음도 없으며, 가함도 없고 불가함도 없기 때문에 유가와 묵가의 논변을 내가 같다고 할 수가 없지만, 각기 그 구분을 없애 하나로 여기게 되면 내가 다르다고 할 수가 없다.(91쪽)

 

이 책을 읽으면서 붕과 곤에 대한 색다른 해석에 한번 놀라고,

위 부분에서 한번 더 발상의 전환을 경험했다.

 

강신주로 시작해서 이 책을 떠올린건,

강신주가 장자를 좋아하는 걸 잘 알고 있고,

내가 노자와 장자를 시작한게 강신주를 통해서 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강신주도 그렇고, 강유원도 그렇고, 김학목 님도 그렇고,

건강을 최우선으로 챙기신 후 좋은 책들을 많이 내주셔서 읽는 즐거움을 누리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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