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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可無不可

언텍트 시대여서 그런 것도 있지만, 대화는 주로 카톡으로 이어진다.

가벼운 대화이고 가끔 선문답 같은 대화를 나누기도 하지만,

간혹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한다.

 

 

 

 박세당의 장자 읽기
 박세당 지음, 박헌순 옮김 /

 유리창 / 2012년 12월

 

 

예를 들자면 이런 상황이다.

 

'박세당의 장자읽기'라는 책을 얘기하다가,

(읽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갖고 있기만 할 뿐이니까.)

'남화경'의 뜻을 아느냐고 묻는다.

 

당나라 현종이 나오고,

그가 장자를 추앙하여 '남화진인'이라고 불렀고,

불경, 도덕경 처럼 남화경이 되었다고 아는 척을 하고 싶지만,

난 이 지식을 책을 통해 알게 된게 아니라 유튜브 최진석 님의 강의를 듣다가 우연히 알게 됐을 뿐이다.

 

 

 

 

 

 

 

 

 

『장자』 곽상주 해제
 김학목 옮김 / 학고방 /

 2020년 11월

 

 

 

김학목 님의 '『장자』곽상주 해제'를 권해주면서는,

붕의 뜻, 붕이 어떤 존재인가, 를 알고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나를 무시하는건가 싶어 짜증이 확 났었다.

 

비록 사람은 다르지만,

오강남과 김형효, 최진석(최진석이 말하는 노장은 김학목 님이 얘기하는 노자와 장자에서 많이 비껴간 것 같고, ㅋ~.),

결정적으로 내가 애정하는 강신주 님의 노자와 장자까지 좀 읽었던 터라,

'붕' 정도는 알고 있다고 착각했었다.

 

책의 처음 '옮긴이의 말'을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좀 길지만 같이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 옮겨본다.

 

흔히 노자와 장자를 노장으로 함께 부르는데, 그 이유는 노자나 장자 모두 마음 비움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자는 분별력 곧 지적능력을 인위의 출발로 부정하면서 소박함을 강조했고, 장자는 분별력을 사람의 자연스러운 속성으로 일단 인정하지만, 그것을 가지고는 시비를 벗어날 수 없으니 그것을 넘어설 것을 다시 역설한다. 「소요유逍遙遊」에서 붕의 비상에 대해 사람이 도를 통해 날아오르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도를 통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태풍이 휘몰아칠 때 지적 능력이 뛰어난 영웅이 세상을 평정하기 위해 나타나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이 때에 숲 속의 작은 새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붕이 숲속의 작은 새를 하찮게 보고, 작은 새들이 붕을 선망하면서 비아냥거리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유대有待 곧 무엇엔가 의지하고 있는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해 서로 갈등하는 것이다.

  붕의 비상을 도를 통한 것으로 오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이 마음을 비워 도를 통하는 것에 대해 엄청난 능력을 갖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노장 철학에서 마음을 비워 도를 통하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고, 또 비록 도를 통해 엄청난 능력을 갖게 될지라도 그렇게 세상이 놀라 주목하게 비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주목하게 되면 그들도 그렇게 되기 위해 지적능력을 온통 그것에 집중하느라고 절대로 미음을 비울 수 없기 때문이다. 노자나 장자가 계속 강조하는 것으로 마음을 비우면 다스림마저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무위無爲라고 하는 것이고, 또 마음을 비우면 마음을 비운 것마저도 잊게 되어 그 어느 것에도 의지하는 것이 없으니 무대無待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점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노자와 장자를 읽어도 그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나게 되니 유념하길 바란다.(5~6쪽)

 

이 책을 읽은 후에야 '붕'을 물은 이유를 알았지만 마음의 상처도 이미 입은 후이다.

 

예전에는 책을 읽으면 어떻게든 삶을 변화시키는 것까지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뭔가를 '하려니까', 즉 일부러 변화시키려고 하니까 불안하고 안달이 나는거라,

친구는 이런 내게 '어른이 별게 아냐. 놓으면 어른여ㅋ'라고 하는데,

놓는건 어디 쉬운일인가.

일단 인정을 하고 받아들여야 붙잡을 수도, 놓을 수도 있는게 아닌가.

그러고 보면 과거의 나는 인간 '관계'에 집착했던 것 같다.

그동안의 블로그명이 '안전 거리 확보'였던 것만 봐도그렇다.

 

이젠 책을 그냥 읽는다.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든 바뀌어도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읽는다.

붕이어도, 숲속의 작은 새여도 그만이 아닐까.

지금의 블로그 명은 '無可無不可이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건,

'왕필과 곽상의 유대有待와 무대無待',

'ㆍㆍㆍㆍㆍㆍ유有ㆍ무無,의 경계가 사라진 玄의 경지에서 나오는 행위'라는 표현이었다.

찬찬히 읽고 의미를 되새겨봐야겠다.

 

이 책을 권해준 친구는 '곽상주 해제'라는데 의미를 부여하던데,

난 '곽상주 해제'라는 무게의 경중을 실감할 깜냥이 아니라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마음을 비우고, 그 마음을 비운것까지 잊어버리게 되는 그런 날이 올 수나 있을까...따위를 미련하게 가늠해본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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