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롤로그에는 보통 이 책을 왜 쓰게 되었는지, 그리고 독자가 어떤 식으로 읽어주었으면 하는지가 적혀 있다.
이 책에도 마찬가지로 학술 논문만 쓰던 김세직 교수가 이런 책을 쓰게 되었는가를 밝혔다.
학술논문만 주로 쓰던 내가 일반 국민들께 내가 알게 된 한국 경제의 감춰진 비밀과 해법들을 알리고자 책을 쓰기로 마음 먹은 이유는 심각한 위기의식 때문이다.
... 이 책은 이 분들께 위기 가능성을 알려드림과 함께 그럼에도 해결책이 있음을,
지금부터라도 함께 노력하여 바꾸면 희망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 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모방과 창조', 김세직 - 프롤로그 중
사실, 경제 위기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IMF가 터지고, 날로 심각해지는 청년 실업 문제와 한 평생 벌어도 내 집 하나 갖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단순히 리먼 브라더스 사태 까지 따지고 들지 않아도 한국경제가 어려움을 잘 보고 들으며 살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사는 동안 경제위기가 없던 시대가 없었으니.
그러니 저자가 지적하는 위기의식이라는게 누군가에게는 새삼스럽게 느껴질 것도 같다.
그럼에도 나는 저자가 제시하는 해결책과 희망을 들어보고 싶었다.
한평생 경제로 먹고 산 사람이니 적어도 선거철 정치하시는 양반들의 허무맹랑한 정책들 보다 현실적인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였다.
책은 총 3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1) 당신의 미래는 안녕하신가요? : 5년 1% 하락의 법칙과 우리의 미래
2) 잃어버린 성장 법칙을 찾아서 : 30년 성장과 30년 추락의 비밀들
3) 신세계를 향하여 : 모방에서 창조로 가는 비법들
(순서대로 읽기를 추천함)
파트 1에서는 우리가 사는 시대를 분석하고, 현실적인 유토피아는 어떤 것이며 어떻게 하면 그 유토피아에 다다를 수 있을지에 대해 얘기한다.
흔히들 말하는 금수저, 흙수저 처럼 운에 의해 좌우되는 현실의 불공정성을 지적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저자가 제시한 해결책은 '잘 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 즉 유토피아를 만드는 것이다.
저자는 인생에서 가장 불공평한 것이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느냐가 아니라, 어떤 나라에서 태어나느냐라고 생각한다. 같은 흙수저라도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금수저가 될 수 있는(계층이동이 가능한) 기회가 있는 나라와 그런 기회가 전혀 없는 나라에서 태어난 것은 천지 차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금수저로 태어날 수 있는 나라를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라고 본다면, 저자가 말하는 현실적인 의미의 유토피아는 이 처럼 누구나 잘 살 수 있는 기회를 가진 나라를 말한다. 정확히는 소득의 원천인 '좋은 일자리'(= 직업과 상관없이 매년 소득이 빠르게 증가하는 일자리)가 충분히 공급되는 나라다. (이 부분에서 나는 과연 좋은 일자리에 있는 것인지 되돌아보게 됨)
그럼 좋은 일자리가 충분히 공급되는 나라는 어떻게 만들어지나?
나라 전체의 국민소득이 빨리 증가해야 한다. 나라의 국민소득 증대능력은 국가의 경제성장률을 뜻한다. 다시 말해, 좋은 일자리가 충분히 공급되는 나라는 나라의 경제성장능력이 높은 나라인 것이다.
그럼 이 경제성장능력은 어떻게 측정하는가? 연간 경제성장률 처럼 단기성장률은 정부 정책이나 불규칙적인 단기적 변동요인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장기성장률을 이용한 측정이 보다 정확한 판단이 가능하다.
여기서 소제목에서 나왔던, 그리고 프롤로그에서도 등장하고 이 책의 핵심 키워드인 '5년 1% 하락의 법칙'이 등장한다. 저자는 앞서 설명한 장기성장률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이 법칙을 발견하게 되었다. 법칙의 내용은 간단하다. 말 그대로 1990년대 초 이후 대한민국의 장기성장률이 매 5년 마다 1% 포인트씩 규칙적으로 하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9n년생인 내가 사는 동안 숨쉬듯 경제 위기를 보고 들은 이유가 바로 여기서 밝혀진다)
장기 성장률은 그 나라의 진짜 경제성장능력이고, 이 법칙에 따르면 우리라는 규칙적으로 경제성장능력이 하락하고 있다는 뜻이다. 90년대 초 이후 대한민국에는 정권 변화, 글로벌 경제위기로 인한 타격을 비롯해 각종 전염병 사태 까지 제법 굵직한 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5년에 1% 씩 꾸준히 하락했다는 것은 반대로 이 법칙이 한국 경제가 최근 겪고 있는 거의 모든 경제 문제들의 근본적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 (당연히) 90년대 초 이후 부터 지금 까지의 대한민국은 좋은 일자리가 충분히 공급되는 현실적인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것. 주목할 것은 지금 이대로라면 갈수록 더 현실적인 유토피아와 멀어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제로성장은 두 말 할 것 없고.
파트 1이 다소 암울한 현실을 꼬집은 내용이었다면, 파트 2는 그래도 희망차게 시작한다.
(태어나보니 경제위기 였던 입장에서 억울한 맘인게 사실. )
중학교 사회시간 즈음에 배웠던 '한강의 기적'을 기억난다. 전후 30년 동안 대한민국이 일궈낸 급격한 경제성장을 일컫는 말이다.
저자의 '5년 1% 하락의 법칙'은 1990년대 초 부터 지금까지의 장기경제성장률이 하락한 것을 말하지만, 반대로 90년대 이전까지는 기적이라 칭할 만큼 무서운 성장률을 기록한 것이 우리나라다. (여기서 잠시 국뽕을 느껴도 좋음) 대한민국은 1960년대 초반 이후 30년간 하락추세 없이 8% 넘는 장기성장률을 보여주었고, 이는 인류 역사에 전례가 없는 일이다. 저자의 은사이자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할 만큼 거시경제학에 한 획을 그은 인물로 손꼽히는 로버트 루카스 교수의 논문에서 이런 고도 성장기의 한국을 농구의 신이라 불리우는 마이클 조던에 비유하며, 마이클 조던으로부터 농구를 잘하기 위한 원리를 배우듯 고도성장기 한국에서 경제성장의 원리를 배워야 한다고 했다.
눈치가 빠르신 분들은 한강의 기적을 언급한 부분에서 이미 알아차리셨을지도 모르겠지만, 파트 1에서 지적한 암울한 현실을 타개할 방법은 바로 이 한강의 기적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60년대 부터 30년 동안 보여줬던 기적의 비결은 무엇이었으며, 90년 부터 30년간 그 기적의 빛을 잃고 '5년 1% 하락의 법칙'이란 불명예를 안게 된 이유는 무엇일지 파트 2에서는 낱낱이 밝혀낸다.
그리고 가장 분량이 많은 파트 3에서는 저자가 제시하는 해결책이 적혀 있다. 바로, 모방과 창조.
이제서야 이 책의 제목이 경제서적이라기 어색한 '모방과 창조'인지 이해가 갔다.
파트2와 파트3은 직접 읽어보시길 추천드린다.
특히 파트 3. 서평에서 모든 내용을 세세하게 다룰 순 없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해결책이 조세정책과 보조금 제도, 교육제도 등 폭넓은 분야를 다루고 있고, 충분히 실현 가능한 부분이 많아 흥미로웠다. 또한, 대선이 얼마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기에 각후보들이 어떤 경제정책을 가져올지 궁금해졌다.
여기까진 책 소개였고, 지금부터는 내 감상.
책 내용 중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경제학이 유토피아를 향한 학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의 더 많은 소득과 행복을 보장하는 것으로, 결국 경제학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숫자와 손익만을 따지는 냉철하고 이성적인 내 안의 경제학의 이미지가 탈피되는 순간이었다. 괜히 인류애가 충전되며 뭉클해짐을 경험했다. 내가 모르는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좋게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을 목격하면 나 또한 의기투합해서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노력하게 된다. 결국, 모두를 위한 것이 나를 위한 것이다.
대학생활을 마치고 곧바로 사회생활에 뛰어들어 지금까지 경제활동을 하는 나는 남들보다는 조금 늦게 경제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눈엔 아직 새파랗게 어린 애가 돈 돈 거리며 사는 모습이 좋지 않게 비춰질지 모르지만, 그래도 내가 흔들림 없이 내 페이스를 유지하며 갈 수 있는 이유는 목표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경제공부의 목적은 경제적 자유를 얻는 것으로, 내가 나로서 살 수 있는 것, 즉, 행복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읽었나 보다.
곳곳에 저자의 친절함이 배어 있는 책을 읽으며, 프롤로그에서 언급한 위기의식을 전국민에게 알리고 해결책을 함께 찾고자 했다는 말이 진정성 있게 느껴졌다. 그럴 듯 하고 어려운 말로 포장한 부분 없이 쉽고 간결한 설명, 중요한 부분이 무엇인지 누구든지 쉽게 인지 하도록 글 머리에 앞서 설명한 내용을 요약 정리해 다시 언급한 부분이나 하이라이트 페이지를 끼워넣은 부분 등 에서 얼마나 독자를 배려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한편으론 역시 교수님은 다르구나, 이런 사람이 교수를 하는거구나 하고 느꼈다.
저자가 언급한 내용과 설명에서는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 많았다. 특히나 그 좁은 땅에 산은 어찌나 많은지 농지도 얼마 되지 않고,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이 나라가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것은 인적자원, 결국 사람 덕분이었다는 것. 그 외에도 언급하는 내용 중 대부분이 중고등 사회시간에 배웠던 내용과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일부러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 지식들이 연결되고 엮여서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는 것. 그게 나와 저자의 차이구나 새삼스레 깨달았다.
책을 모두 읽고 난 후에도 바뀐 것이 없다. 미래를 보는 나의 시선이 조금 더 낙관적으로 변한 것만 빼면.
N포 세대, 이생망(이번 생은 이미 망했다), 개천에서 지렁이나 겨우 나오는 시대에 살지만, 그 수 많은 전쟁 속에서 나라 잃은 슬픔을 배우고 지켜낸 이 나라에 백마 타고 온 초인이 있을 것이란 희망이 들기 때문이다. 정말 백마를 타고 올런지 모르지만ㅋㅋ 의외로 가까운 곳에 생각지도 못한 변수로 우리는 또 다시 일어나고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수많은 '~ 괜찮아' 시리즈들 보다 더 위로가 되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