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로 유명한 빌 브라이슨 작가의 신간이다.
한 프로그램에서 김은희 작가님이 추천하신 책의 저자로 빌 브라이슨을 언급해 처음 알게 되었다.
(추천하신 책을 읽으려다가 옆길로 새서 추천한 책은 안 읽고,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먼저 읽게 되었지만)
이 작가님 책은 한 마디로 하면 빌 아저씨의 알쓸신잡(알아둬도 쓸데없는 신기한 잡학사전) 같은 느낌이다.
이야기꾼 특유의 넉살이 곳곳에 묻어나서 자칫 장황할 법한 이야기에 생기를 불어넣을 줄 안다.
(그 조미료가 가끔 지나쳐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를 때도 왕왕 있으니 적당히 걸러 읽어야 하지만.)
<타임스>와 <인디펜던스> 기자에 영국 더럼 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이력이 있고, 무엇보다 영문법 책을 출판한 이력도 있거니와, 책의 소제목이 무려 '영어의 역사, 그리고 세상 모든 언어에 관하여'라고 하니 얼마나 많은 얘기를 담아내려나 호기심이 먼저 들었다.
책을 다 읽고 든 2가지 생각 :
1. 영어, 생각보다 별 거 아니다
미국인 빌 브라이언은 나름 객관적인 태도로 영어의 장단점을 나열했다.
하지만, 한국인 독자로서 영어의 장점 부분은 크게 와닿지 않았다.
(단점은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공부한 외국인으로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음)
(예1. 한 가지 단어에 너무 많은 의미를 가짐 - fine은 무려, 형용사 14개, 명사 6개, 부사 2개의 뜻을 가짐-)
(예2. 영어의 불규칙성을 다 담아내기에 너무나 추상적인 품사 -명사인데 동사이고 형용사이며 부사-)
언어로서의 장단점을 어필하려면, 다른 언어와의 비교가 빠질 수 없는데
비교를 하기엔 빌 브라이언이 가진 외국어 지식의 폭이 그리 넓지 못했다. 책 중간 중간에 덧붙인 옮긴이의 말들이 이를 증명한다.
때문에 '영어는 다른 어떤 언어보다도 풍부한 어휘를 보유하고, 가장 다양한 의미의 색조를 지니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다소 신빙성이 떨어지게 느껴진다. (풍부한 어휘를 보유한 것이 꼭 좋은 것 만은 아니라는 얘기가 뒤이어 나오지만) 풍부한 어휘를 가진 것은 한국어도 둘째 가라면 서러운 것이 아닌가(!) 빌 브라이슨이 한국인이었다면, 분명 한국어의 위대함과 세종대왕을 향한 절절한 존경심으로 가득한 책을 전세계에 출판했을지도.
(그 외 장점들 : 단어 배열, 능/수동태 등 영어의 유연성, 철자법과 발음이 비교적 간단, 성별에 자유로움 -대명사가 굴절되지 않음-, 간결성을 추구함 -줄임말-)
9번째 챕터 '좋은 영어와 나쁜 영어'에서는 영문법의 복잡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① 규칙과 영어가 영어와는 공통점이 극히 드문 라틴어(심지어 1000년 전에 사멸한) 에서 따왔기 때문
② 어떠한 저명한 권위자도 지지하지 않는 무의미한 애호에 매달렸기 때문
(쉽게 말해, 그럴듯한 근거나 타당성 없이 그저 이러면 좀 더 고상할 것 같아서 라는 식의 이유로 주장된 것들이 굳어져 지금의 문법이 되었다는 것)
가끔 세상의 많은 것들이 말도 안되게 비상식적으로 생겨먹었다는 사실에 놀라곤 하는데, 이도 비슷한 느낌이다. 말도 안되게 엉성한 문법들을 전 세계 공용어라는 이유로 세계 곳곳의 많은 비영어권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문법,어휘,독해,스피킹 까지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기묘하다. - 정작 영어권 국가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공부하지도 않는 그들의 언어를!- 영어가 가진 궁극적인 힘은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언어라는 것 이외엔 무엇이 더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작금의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우리는 영어를 열심히 배우고 쓰겠지. 이미 전세계 인구 중 1/3이 영어를 공용어로 쓴다고 하니 말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어찌되었건, 과학 논문 중 2/3는 영어로 간행되고, 전 세계의 우편물 가운데 70퍼센트 이상은 영어로 작성되고 영어로 주소를 쓴 것이라 하니 우리가 영어를 배워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하지만 생각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20년 가까운 시간을 들여 영어 공부에 매진했건만, 아직도 영어를 사용하기에 앞서 긴장하고, 주저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혹여나 내가 말한 문장이 문법에 맞지 않은 것이 아닐지, 이 상황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지 등을 머릿속으로 검열하느라 바빠 정작 입밖으론 몇 마디 뱉지도 못하는 현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을 포함한 네이티브 스피커, 미국인들 조차 본인들의 말을 온전히 맞게 사용하지 않는데, 하물며 비영어권 출신인 내가 영어 문법을 완벽하게 구사해서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문법의 정합성을 고집할 만큼 대단히 체계적이지 않은 문법이니 말이다. 모든 언어는 의사소통을 위한 다양한 방식일 뿐 이고, 전문 통번역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문법에 목맬 이유가 전혀 없다. 어쩐지 그 사실을 안 것 만으로도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샘솟는 기분! 우리 모두 자신감을 갖도록 합시다!
한마디로, 영어라는 언어에서 품사는 사실 추상적 개념일 뿐이다. 어떤 명사가 명사고, 어떤 동사가 동사인 까닭은 대체로 문법학자들이 그렇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P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