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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rien Lee님의 서재
  • 인간과 말
  • 막스 피카르트
  • 11,700원 (10%650)
  • 2013-06-25
  • : 3,199

이 책은 고전적인 산문집입니다

절대 지식 습득을 위한 책이 아니며, 이해를 요하는 책이 아닙니다. 내용을 장 별로 요약해 공부하려 하는 것도 무익한 일입니다.


사실 읽기 전에는 이 책의 특징이 잘 와닿지 않았는데, 목차가 너무 끌려서 샀고, 읽고 나니까 출판사 제공 책소개가 정말 가장 딱 맞는 설명이더군요. 리뷰를 써도 딱히 더 나은 걸 쓸 수는 없을 정도로 잘 써있으니, 이 책을 살지 고민하는 분들은 곱씹어 읽어 보시길. 사고 나서도 다시 읽어보면 도움이 됨.


최근의 책들 가운데 산문집은 시집보다도 훨씬 먼저 멸종단계에 이르른 종류라 이 책이 더 낯설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산문집은 최근 유행 장르인 에세이와는 영 딴판이예요.



이 책은 한 권의 음악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것은 한 권의 교향악 같은 책이라는 겁니다. 


역자가 말하는'부분을 오릴 수 없는 전체성'이라든가, ~구심점에 집중하는 대신에 강물 같은~등으로 온갖 노력을 기울여 표현한 출판사 책소개를 한줄로 줄이자면 딱 그 말입니다. 음악 같다는 것.


각 챕터는 교향악의 1악장 2악장 같은 느낌이네요.


기승전결로 하나의 결론을 향해 목적을 가지고 달려가는 게 아니라, 각 부분은 각자 따로 의미가 있으면서 전체를 이루듯이 어울려 있습니다.

저자의 생각을 독자에게 주입하기 위한 어떤 교묘한 장치도 구성도 전략도 없습니다.


할 수 있다면 그냥 즐기기에 알맞은 책입니다.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함께 들어가서, 강물 속에 빠져 흘러가듯이 물살을 타고 노는 것입니다.


"저자의 미덕은 절대 자신의 논리나 입장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저 느릿느릿, 조근조근 들려줄 뿐, 어떠해야 한다는 마음은 조금도 지니고 있지 않다. 그저, 편안히 느끼고 반응하고 또는 튕겨져나가면 그뿐이라는 듯 무심하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중


그러니 매 순간 뭘 배우려 들지 말고 그냥 즐기는 게 맞는 독서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의 책 트렌드와는 아주 다르죠)


다만 저자와 비슷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해 본 적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말에 대해서, 언어에 대해서 정말 조금이라도 '생각'은 해 본 적이 있어야 같이 놀 수 있겠죠. 내가 관심 없는 주제에 대해 떠드는 친구는 싫죠. 그래서 작가를 위한 책이라고 하는 걸지도요.



이 책은 언어 조각품입니다

"막스 피카르트(Max Picard)는 언어를, 육감적으로, 공간적으로 구체적으로,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능력을 지녔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중


대부분의 글이 언어 그 자체를 목적으로 말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면, 이 책의 글은 언어를 < 도구 >로 생각의 덩어리 그 자체를 고스란히 내보내려 한다는 느낌이 더 강합니다. 이게 신선했습니다. 글을 쓰는 대부분 사람들하고는 엄청 다른 세상에서 놀고 있습니다. 


이 책은 명상록이라고도 소개되는데, 그에 가깝긴 합니다. 하지만 그 단어는 한참 부족한 설명입니다. 다른 작가들의 명상록은 이렇지 않으니까요. 보통 좀더 해체하고, 구조화하고, '언어화'하고, 의미를 짜넣죠.


이 < 방식 >에 비하면 다른 모든 글들의 방식은 딱딱하다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글들이 그냥 생각을 발화합니다. 노래합니다. 


말 되는 말을 하려고 굳이 애쓰지 않고

생각과 심상 그 자체를 

툭 하고 전달합니다.


먼저 떠오른 것은 유시진 작가의 < 온 > 이었습니다. 이 만화책에서는 (다분히 철학적인 책인데) 가수가 노래를 하는 것에 대해 이 책의 느낌과 비슷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철저하게 말에 대한 말인데 이 말이 한국어가 아니다보니, 번역을 하면 아무래도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글 자체의 속성에서 오는 한계라는 거죠. 저자의 손자인 가브리엘의 서문에 따른다면 독일어를 알고 독일어로 읽어도 낯설텐데..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더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도 아닙니다. 그러나 설사 책의 어느 부분이 이해되지 못한 채로 남는다 해도, 인간과 말이 서로 분리할 수 없이 상대의 내부에 자리한 관계라는 기본개념은 누구나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p.10. 가브리엘 피카르트의 서문



이 책은 무의식의 언어입니다

구체화보다는 추상화

깨어 있는 상태의 정치가 연설보다는

아직 잠이 덜 깬 몽롱한 의식

꿈 그 자체를 녹화하듯 적어놓은 전체성.

꿈 속에서는 기막히게 멋진 생각들이 떠오르지만

그대로 기록할 방법이 없기에 놓치는 것들

언어로부터 제거되지 않고 통째로 표현된 심상



그래서

아쉬운 부분이라면, 가능한 한자어를 줄이고 번역해 주었다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한자어는 직접적으로 와닿는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이 책의 독서에 특히 방해가 됩니다. 많은 한자어는 우리 문화의 특성상 지식을 강요하는것처럼 보여서 책의 목적과 동떨어지게 만들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무척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불가피한 단어는 쓰더라도 가능한 부분에서 10%만 신경을 썼더라면 더 아름다운 번역서가 되었을텐데 싶습니다. 자칫하다가는 책이 '잡음어'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 맞지 않았던 것은 저자가 신비주의자라는 부분이었어요. 생각을 따라가다 신비주의에 맞닥뜨리면 멈춰설 수밖에 없어서. 종교인에게는 잘 맞을 것 같군요.


그러나 [파괴된 말]에 나오는 '잡음어(의미가 상대에게 전달되지 않아서 소음에 불과하게 된 말)'에 대한 건 매우 좋았고, 누구에게도 얼른 권하고 싶은 생각 덩어리입니다.



어떻게

책 볼때마다 뭐 하나라도 더 줏어먹고 '배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던지고,

말을 만들어낸 생각과 직접 접촉하고 싶다면,

그리고 거실 소파에 퍼질러 저자와 마주앉아 있듯이 대화하며 자기 생각을 발전시키고 싶다면..........


"한밤중의 탐닉이 아니라 아침의 명료함을 선사한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중

정말 시적인 소개네요. 딱 맞기도 하고.



조각조각난 세상에 질렸다면

잠자며 꾸는 꿈 속의 모든 것에 매혹된다면

이 책이 마음에 들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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