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재회한 나의 전 여친이자 첫사랑이 메갈이 되어 있었다!
시놉시스부터 정말 도발적이고 흥미롭다.
메갈. 92년생인 나의 주변 또래 남자들 사이에서는 대충 '꼴페미'랑 유사한 의미의 용어 정도로 사용되는 느낌이고, 결코 좋은 뉘앙스는 없다.
그런데 자신이 좋아하던 사람이 메갈이 되었고, 그 사람과 연애를 한다....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구도다.
책을 읽기 전 관련 리뷰들을 10~20개 정도 찾아 보았다.
대체로 메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레디컬 페미니스트의 표상 정도라 할 수 있는 여주에 이입하고
한남의 표상인 남주를 욕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구매자의 다수가 2030 여성인 만큼 이런 반응은 예상한 바였다.
그렇다면 메갈이 말하는 속칭 한남에 해당하는 내가 이 책을 읽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
인터넷 상 지인의 추천에 더하여 위와 같은 흥미가 이 책을 손에 잡은 이유였다.
일단 남주 승준은 요즘 기준에서 볼 때 상당히 가부장적인 집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성장한 인물로 보인다.
그 또래 평범한 남성답게(?) 페미니즘, 메갈 등에 단어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집안의 영향인가 일부 사고방식이 굉장히 고루한 부분이 있고, 일부 지점에서 눈치가 다소 떨어져 보인다.
여주는 짧은 머리에 티셔츠를 입고 다니며 성범죄 등의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고 매사에 다소 까칠한,
전형적인 페미니스트의 이미지를 가진 인물이다.
맨스플레인 같은 페미니즘 특유의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게 현실성을 높여준다.
일단 책을 다 읽고 30분도 채 안 된 현 시점에서는 일방적으로 한 쪽을 칭찬하거나 욕하기는 어렵다.
승준은 아마 항상 칭찬받고 승승장구하며 딱 정해진 루트를 밟아온 것으로 추정되고, 그래서 그런지 상당히 순진한 구석이 있다. 나쁘게 말하면 눈치가 없고.
젠더 이슈에 너무 무지하다 보니, 여친이 성범죄 관련 기사를 말하며 열변을 토할 때 무고죄 어쩌고 이야기를 하고, 비혼주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 같은 좋은 남자 만나면 결혼 생각 나지 않겠어 같은 소리를 할 때 입 좀 막고 싶었다.
그리고 낙태죄 같은 이슈에 대한 태도에서 그가 동세대 남자들의 기준에서도(승준은 나랑 비슷한 또래로 설정됨) 고루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나는 낙태죄 폐지에 절대찬성하는 쪽이다), 특히 노콘 섹스해서 여친 임신시키면 결혼 가능ㅋ? 같은 망상을 하는 일련의 대목들은 남자라도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승준은 여친을 대하는 데 있어 자기 나름대로는 진심이었고, 폭력 등의 범죄행위를 저지르지도 않는다.
생각이 좀 일부 고루해 보이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스스로의 기준에서' 여친을 잘 대하고자 애쓴다. 밤늦게 걱정되니까 데릴러 간다던가, 무거운 들 때 도와준다던가, 돈 좀 대신 내주려 한다던가, 특히 여친이 성희롱 사건에 엮이며 퇴사를 결정할 때는 진심으로 그녀를 뒷받침하고자 한다.
결혼을 은연 중에 강요하는 집안의 분위기에 짓눌리고 이에 반감을 가지기도 하지만, 오랜 세월 가진 가치관을 바꾸기도 어려운 딜레마에 빠지는, 현 시대 기준에서 구식 가치관을 지닌 집안에서 자란 남성 나름의 고독을 보여주기도 한다.
여친(이름이 없어서 부득이하게 여친으로 명명한다)은 아마 과거 승준과 헤어진 이후 겪은 여러 성희롱 피해로 인한 트라우마로 인해, 소설의 용어를 빌리면 메갈, 정확히 말하면 레디컬 페미니스트가 된 인물이다.
그녀는 여성이 수많은 범죄에 노출되는 사회를 바꾸고 싶어하며, 자신의 관점에서 구세대적 가치관을 강요하는 집안 분위기에 염증을 느껴 자취를 하고 있다.
그러다가 승준과 메갈 집회에서 우연히 재회한다. 그녀는소설의 표현을 이용하면 승준의 안에 내재된 한남성을 알기에 다시 사귀자는 승준의 제안에 망설이지만, 승준이 워낙 강렬하게 대시하기도 하고 본인도 과거 승준한테 좋은 감정이 있던 만큼 '너가 나가떨어지면 100만원 줘'라는 좀 우스꽝스러운 조건을 걸고 사귀기 시작한다.
솔직히 이 지점부터 연애가 잘 굴러가지 않을 거라는 게 보인다.
나 자신이 연애 경험이 딱히 있는 건 아니지만, 내가 아는 연애는 서로 맞춰가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여친은 자신의 가치관을, 그것도 승준이 전혀 공감하지 않는 가치관을 절대로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분명히 하고, 승준에게 '너가 맞춰. 싫으면 말고'라는 태도를 고수하며 연애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연애가 잘 끝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둘의 서로 좋아하는 감정 자체는 진짜였기에 둘은 관계를 가지기도 하고 나름대로 잘 지내간다.
하지만, 여친의 관점에서 보이는 승준의 한남성
동시에 승준의 관점에서는 매사에 지나치게 까칠한 여친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고
이는 결국 둘이 함께 참가한 친구의 결혼식에서 승준의 친구와 여친 사이에 언쟁이 나며 폭발해 버린다.
중반부까지는 승준과 여친 사이의
악의가 없었음에도 서로의 가치관과 시야에 따라 발생하는 갈등을 나름 현실감 있게 잘 보여주었다 생각한다.
그런데 최후반부 친구의 결혼식 파트부터는 거부감이 심하게 들었다.
대관절 친구 결혼식 가서 친지들끼리 저따위로 언쟁하는 것부터가 좀 억지 같고...
아니 축하하러 간 자리에서 서로 무례한 질문과 답변을 주고 받지를 않나...
승준의 친구나 여친이나 잘한 거 하나도 없다.
남의 결혼식 가서 분위기나 망친 매너 없는 것들 뿐이다.
승준이 귀가길에 여친에게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여친은 '너가 뭘 그렇게 노력했냐?'며 되려 화를 낸다.
물론 승준이 '너 그러다 독거노인으로 죽는다.','니네 부모님이 이혼해서' 같은 막말을 욱한 김에 내뱉은 건 잘못이지만, 여친의 '나는 잘못한 것이 전혀 없고 자신의 가치관에 어긋나는 일을 강요하는 승준과 세상이 문제야'라는 고고한 자세는,
그리고 승준과 여친의 이별에서 승준이 마치 여친에게 일방적으로 잘못한 것처럼 말하게 하는 전개는 진심으로 짜증스러웠다. 그 와중에 승준은 또 여친을 걱정하고... 후
여친의 캐릭터는 페미니스트가 어째서 그렇게 전투적인지, 동시에 왜 많은 이들, 특히 남성들로부터 경원시되는지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여친은 사회에서 여러 여성 차별을 겪으면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억압받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는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투신으로 이어진다.
여성으로서의 피해서사, 한남에 대한 분노 및 혐오.
여친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위의 두 요소를 핵심동력으로 운동을 지속하였을 것이다.
피해의식과 분노가 바탕이 되면 운동은 투쟁이 된다.
투쟁은 본질적으로 상대에 대한 이해 가능성을 차단한다. 상대는 부숴야 할 존재가 되니까.
스스로가 피해자이기에 타인의 고통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어진다.
그래서일까? 여주는 승준의 배경, 생각, 고민 등에 대해서 철저히 무관심하다.
그저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서, 승준이 하는 행동에 언짢음을 표시하고, 스스로의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서만 열을 올리고, 막판에는 승준의 모든 노력을 부정해 버린다.
'설명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은 설명해도 모르는 것이다'
여친이 뭔가 있어 보이느 것처럼 마지막 이 문장은 k페미니즘의 본질을 보여주는 말이다.
우리는 너희들을 설득해서 이해시킬 생각은 없어. 그냥 우리의 말이 옳아 라는 독선 의식.
상대가 공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거나 별 관심이 없음에도 특정 주제를 계속해서 강요하는 것은 무례다.
여친은 승준이 뻔히 싫어할 것을 알면서도, 굉장히 반복적으로 페미니스트 티셔츠 입기, 페미 서적 읽기를 자꾸 권유한다.
승준은 별로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책은 읽는 시늉이라도 한다. 그런데 여친은 뭘 했지?
개인적 경험담이 나오게 되는데 과거 페미니즘 서적을 읽고 리뷰를 보다 보면
'남자들이 책 읽지도 않고 별점테러한다'
'남자들한테 이 책을 읽혀야 하는데'
이 같은 말들이 자주 보인다.
이 말부터가 오만 방자함의 끝이다.
한남들은 기본적으로 멍청한 존재라 그냥 불합리한 페미에 대한 증오심으로 별테나 한다.
하지만 페미니즘 서적을 보면 바뀔 것이고 바뀌어야 하며, 안 그러면 답이 없는 존재다. 라는 것
사람을 얼마나 우습고 쉽게 보는 걸까?
사람은 좋게도 나쁘게도 쉽게 바뀌지 않는 존재다.
여친이 승준의 시점에서 평범한 여자에서 페미니스트가 되기까지 4년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가 되엇듯
승준이 변하는 데도 시간이 당연히 필요할 것이다. 변하지 못 할 수도 있고.
그런데 여친은 승준을 변화시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한숨 쉬지만
가끔 언쟁하는 거랑 책 읽고 티셔츠 입으라고 권유 좀 한 거 말고 여친이 한 게 뭐가 있나?
아마 위의 설명 어쩌고 운운한 대사에 함의되듯 여친은 애초에 승준의 변화 가능성을 보지 않았을 거 같다.
그냥 본인도 사람이 그리우니까, 승준이 워낙 대시하니까 만나보고는 싶은 건데, 가치관을 바꿀 생각은 없고
신념에 따라 사는 것은 자유이나, 일단 연인 관계를 스타트했으면 승준에 대한 존중을 조금은 더 보여주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이렇게 말하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니, 까칠한 대응을 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일리 있는 말일 수 있다.
다만 방식으로 피해의식과 분노로 무장된 투쟁을 선택하였다면 그 후과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트위터 등의 화력을 이용한 투쟁은 단기적으로는 분명 대중의 관심을 높인다.
실제로 그로 인해 환기된 여성 차별 문제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강경한 공격은 장기적으로 증오를 생산한다.
초반에 승준이 자신이면 메갈을 치료할 수 있어 같은 소리 하는데
내 주변 보면 이런 생각 잘 안 하는 것 같다. 그냥 손절해야 한다 같은 말이나 하지.
여친은 잠재적 가해자와 같은 표현에 언짢아 하는 승준에 대하여
'그러면 피해자 없는 세상을 만들어서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 없애면 되겠네'라는 소리를 한다
그런데 그 세상이 오기 전까지는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에 죄의식을 가지고 살라는 소리가
페미니스트가 아닌 이에게 그리 합리적으로 들리겠나?
한남을 여성 차별 이야기 하는데 무고죄, 군대 이야기나 하는 사람으로 표현하는데,
남자들이 겪는 엄연한 고통인 군 문제에 대한 공감을 표시할 생각이 1도 없으면서 자신에 대한 공감을 바라는 것은
솔직히 바보 같기도 하고 뻔뻔해 보이기도 한다.
물론 여친이 악인은 아닐 것이다.
그냥 자신이 겪은 경험이 너무 아파서, 그런데 세상은 자신의 호소에 너무 차가워서,
그렇게 변했을 것이다.
그런데 승준이 의도를 가지고 여친을 상처입히는 것이 아니듯,
페미니스트들의 표현에 많은 한국 남성들이 상처받는다는 사실은
페미니스트의 속사정이나 의도와 무관하다.
본인들이 의도야 어찌되었던 그런 전략을 택한 이상 그 후과도 각오해야 할 것이라 본다.
벌써 대선 후보 1명이 무고죄 강화를 입에 담고 있고, 반페미를 외치는 당대표가 나온 것이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승준과 여친의 연애담 자체는 어찌 보면 가치관 차이로 헤어지는, 그냥 평범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작가가 은연 중에 정당화하는 여친의 캐릭터성과 승준으로 대표되는 남성에 대한 몰이해가
이미 다른 페미니즘 서적에서 느낀 한계점임에도 또 느껴져서 짜증이 배가된 느낌이다.
시놉시스가 워낙 신박했고
중반부까지 은근히 현실적인 서로의 사고 과정 묘사로 몰입이 잘 되었지만
어느 순간 여친에 대한 무조건적 정당화가 보여서 거북했던 소설.
거기에 이 책의 여친을 무조건적으로 찬양하고 승준을 그저 욕하기만 하는 리뷰들이 그 거북함을 배가시켜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