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위안부'라는 단어가 나왔을때부터 마음을 다잡고 담담하게 읽으려고 노력을 했다.
그 단어는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읽는 동안 울컥하니 힘들때가 많았다.
특히 마지막 단락인 해림할머니의 이야기에서는 죄송하고, 또 죄송했다.
할머니들의 용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할머니들이 원하는 용서를 제대로 받아 드렸나 싶기도 하다.
이제는 거의 계시지 않는 위안부할머니들.
종전이 끝났음에도 계속 피해만 드리는 것은 아닌가 싶다.
일본이든, 한국이든, 어느 단체든, 개인이든.
또 강제징병이나 강제징용 등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어느 하나 속시원히 해결한 문제가 없는 것 같다.
'오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로 시작되는 <마중>은 손녀의 시점과 손녀가 쓴 소설 초고본 '전쟁터로 간 사랑'과 마지막으로 해림 할머니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모르는 이가 보낸 짧은 메일을 통해 알게 된 실종된 할아버지의 수기본과 해림할머니의 이야기로 엮어 만든 '전쟁터로 간 사랑'이 주이다.
비록 소설이지만 그들이 겪은 생생한 일들이 아프게 읽혔다.
'사랑'이란 단어가 들어가지만 나는 생존으로 바꾸고 싶다.
그 끔찍한 곳에서 어떻게든 생존 했어야 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고통스럽다.
읽는 것 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직접 겪었을 그들은 어땠을지 감히 상상도 못하겠다.
그렇게 살다간 그들의 생애 위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 "... 나와 종태 오라버니도 소설로 되살아나서 다른 사람의 마음에 살아 있을 수 있지 않겠어?"
- "우리 일을 없었던 일로 하면 안 되지. 엄연히 있었던 일이니까. 그러니까 지유 같은 젊은이가 나서서 되살려줘. 젊은이들이 그 당시 우리의 젊은 시절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 이래도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나. 이렇게 사는 것도?
- 입 다물라고. 꺼내기 싫다는 말을 왜 함부로 멋대로 상상해서 떠드느냐고 나무랐지.
- "어떤 일을 겪어도 저 나무는, 잘리지만 않으면 상수리나무야. 누가 무슨 짓을 해도, 저 나무는 상수리나무라는 걸 잊지 말아."

WITH. 은행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