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분과 기술은 다르다. 그속에서 우리는 눈군가를 즐겁게 해 주는 차원을 넘어서는 의무를 가진다. 실체의 본질을 추구하거나 형성하면서, 우리가 혼신의 힘을 다해 그런 영역에 헌신할 때, 단순히 우리에게 요구되는 일을 할 때보다 더욱 깊은 차원의 유익을 다른 사람들에게 끼칠 수 있다는 확신을 품게 된다. 기술의 영역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실체들을 취급한다. 반면에 직분의 영역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과 관계한다. ... 목회자의 고결함은 하나님(근심을 덜어주고, 평안함을 주며, 종교적인 조직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이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지식을 소유한 상태로 시작했다. 적어도 그런 사실에 대한 암시를 상당히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목회 현장에 들어서면, 목회자들에게는 직업적인 일이 주어진다. 목회자들이 대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의식이 아닌 자아 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목회자들이 그들의 주된 관심사 - 상담, 교훈, 격려 - 를 취급하는 한, 그들은 목회자들에게 직업적인 업무 안에서 좋은 점수를 부여할 것이다. 목회자들이 하나님을 진지하게 대하든 그렇지 않는 간에 그들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 목회자 주변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무언가 다른 일을 해달라고 요구할 때 소신껏 일을 해내기란 정말 쉽지 않다. 특히 그 사람들이 매우 지적이며, 목회자를 존경하고, 목회자에게 사례를 지불할 때에는 더욱 그렇다. ... 종종 그런 일들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긴급하게 몰려온다. 그러한 모든 전화와 편지들은 목회자들이 무언가를 자신들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사람들로부터 온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목회자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권면과 훌륭한 충고, 아니면 모종의 기회를 얻기 위해 목회자를 찾는다. 그들은 목회자가 그런 것들을 부여할 자격을 갖추고 있으리라는 헛된 생각을 품고 있다. (23-25) 내가 맡은 일과 사람들이 내게 요구하는 일 사이에서 나는 분명한 선을 지키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은혜, 그분의 자비하심, 창조와 언약에 나타난 그분의 활동에 주된 관심을 쏟고 있는가? 사람들이 이러한 실체들 속에서 더욱 성숙하며 그 속에 깊이 참여하도록 이끌어주지 못할 일들을 나에게 요구할 때, 나는 그런 요구를 단호히 거절할 만큼 충분히 거기에 헌신하고 있는가? ... 어떻게 나는 그 선을 정확하게 지킬 수 있는가? 종교적인 일을 하도록 나를 고용한 사람들의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나는 목회적 소명의식을 유지할 수 있는가? 오랫동안 비교가치에 따라 쇼핑하는데 익숙하기 때문에 목회적 성실함이라는 건전한 관점에서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이 직분의 고결함을 보존할 수 있는가? (26-27)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유진 피터슨이 관심을 두는 것은 바로 “균형”이다. 직분과 직업 사이의 “균형”,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는 목회자의 본래적 직분과 그들의 요구하는 일을 들어주어야 하는 직업 사이의 균형이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이를 위해 그가 내놓은 것은 기도, 성경읽기 그리고 영적 지도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답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목회자들은 기도와 성경읽기, 영성을 말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진 피터슨은 이를 다시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조금 다르다. 그는 주목하지 않았던 것들을 주목하면서, 이 단어들이 담고 있는 본래적인 의미를 깊이 들여다보고 환하게 비추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딱딱한 규칙이나, 엄격한 제도, 때로는 하기 싫어지는 잔소리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마땅히 해야할 당연한 것들을 말하고 있음에도 그의 이야기는 따뜻하고 깊다. 그러나 그것이 도리어 그렇게 하지 못하는 부족한 모습을 더욱 뒤돌아 보게 한다. 마지막 장에 그는 영적지도의 다섯 가지 유형을 다섯 명의 목회자를 통해 이야기한다.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 부분은 충분히 숙고하면서 자신의 유형을 만들어가는 좋은 시금석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아래는 대략의 내용을 정리해 본 것이다.
목회의 삼각형에서 그가 제시하는 첫 번째는 기도다. 이 때 그는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와 계몽주의 시대가 이끈 변화를 지적한다. 그것이 이끈 것은 인간이 인간에 대한 일을 이해하는 것, 그 자신의 실존을 말하는 것에 중심이 있었다.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을 인간이 아닌 신으로서 살아가게 했다. 한계는 사라졌다. 이와 유사하게 목회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일어난다. 기도가 연설로 자리 잡으면서 외관상 전면으로 등장하지만, 그 실질적인 가치가 심하게 손상되는 경우가 다반사이게 된 것이다. 이 속에서 저자는 다시 “기도”를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반응의 언어”로서 제시된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의 일부로 되돌리고, 인간의 실존을 하나님께 대한 반응으로 다시 위치시키는 노력이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이 바로 히브리의 기도, “시편”이다. 그리고 그 반응을 하루를 새롭게 시작하는 저녁시간과 일주일을 다시 시작하게 하는 안식일에 위치시킨다. 그리하여 기도는 “휴식”으로 이어지게 된다. 기도하는 것, 그것은 시편으로 삶을 들여다보고, 저녁과 안식일의 실제적인 리듬 속으로 들어가 쉬는 “삶의 반응”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성경읽기다. 여기서 그는 성경을 “들을 것”을 말한다. 기록된 문자로서 철저하게 분석하고 파헤지는 작업을 게을리 해서는 안되지만, 그와 동시에 기록된 문자 이전의 언어를 기억하는 것, 곧 음성적인 언어를 들어야 함을 그는 말하고 있다. 이 때 듣기의 힘이 제시된다. 그것은 인격적인 상호 교류가 가능하고, 마음과 몸의 구분이 사라지며, 내면과 외면, 외부의 세계와 내부의 영혼이 통합되도록 이끈다. 그래서 “듣기”에서는 “찾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이 강조된다. 이를 위해서 “묵상”이 필요하다. 그 묵상도 마찬가지로 말씀을 소리로 듣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지는데, 이 때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말씀이 들려진 상황과 컨텍스트를 포괄하게 된다. 그 상황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크고 광활하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가 들려진 곳에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을 소리로, 이야기로 제대로 듣는 것은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곳으로부터 오는 놀라움이 있고, 그 놀라움에 대한 반응은 삶의 변화로 이어지게 된다. 그 때마다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영적 지도다. 이것은 매일의 일상적인 사건에 관련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일들과 평범한 삶의 일상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경우들에 마음을 다하여 헌신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탐구하며 발전시키는 사역의 한 측면이다. 그리하여 소홀히 취급한 것들을 진지하게 여거 '삶에 속한 복잡한 문제들'을 고귀한 거룩함을 위한 원재료로 받아들이도록 돕는 일(222)이다. 따라서 영적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규정을 도입하거나 엄청나게 복잡한 직무 설명서에 또 다른 항목을 추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관점을 새롭게 하는 것을 의미(228)한다. 따라서 이는 충분한 관심을 요구한다.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영역이 곧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된다. 그리고 이 사역을 위한 최고의 준비 단계는 정직한 삶이다. 그것은 순례자가 되는 것과 연관된다. 그 순간 순간마다 대면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만나는 그 사람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를 더욱 사랑하시는 주님을 향한 두려움, 감탄, 존경이 그 마음 깊이 항상 상존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목회자에게 맡겨진 것은 주연의 역할이 아니다. 무지함에 대한 인식이 커지면서 겸손하게 기도하게 된다. 따라서 영적 지도는 목회자가 누군가에게 행하거나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만날 때 그 자리에 있는 방식으로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