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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1 : 돈황과 하서주랑
  • 유홍준
  • 20,700원 (10%1,150)
  • 2019-04-29
  • : 4,027

오늘 리뷰하는 역사책은 현 국중박 관장이신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중국편1』 이다. 


전 권을 다 모으진 못했지만, 그래도 대략 70%는 책장에 꽂혀 있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 물론 다 읽지는 못했다. 가끔 생각날 때마다 한 권씩 읽는 정도? 중국편 역시 사두기만하고 안읽다가, 급 꽂혀서 읽기 시작!!



 




어느 시대나 한 문화권에는 주도하는 중심부 문화가 있고 이를 따라가는 주변부 문화가 있다. 그것이 하나로 어울릴 때 그 문화권은 더욱 풍성한 모습을 갖게 된다. 에드윈 라이샤워가 말한 바대로 우리나라는 중국, 일본과 함께 동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 중국의 불상, 한국의 불상, 일본의 불상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비슷한 것은 동아시아 불교문화의 보편성이고, 다른 것은 각 민족의 특수성이다. p 014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중국편1』  서두에 문화의 보편성과 민족의 특수성 이야기가 있어서 다시금 곱씹어 본다. 보통 전 세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유물을 문화의 보편성이라고 말하고, 보편적인 문화유산 속에서 보이는 각 국의 개성을 특수성이라고 한다. 문화의 보편성으로 이야기하는 대표적인 유물이 바로 고대 유물인 비너스상(또는 여인상)이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발굴되는 여인상을 보면, 그 모습이 각기 다르다. 이게 바로 보편적인 유물에서 발견되는 각 나라의 특수성이다. 



이번엔 동아시아 3국을 봐보자. 한국, 중국, 일본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문화 유산이 정말 많다. 위에서 말한 불교 문화가 그렇고, 도자기 문화가 그렇고, 정원 문화가 그렇다. 



불교문화는 중국을 통해 한반도로 들어왔고,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전파하였다. 민간신앙과 쉽게 융합되는 불교 특성상, 세 나라 모두 불교가 민생 깊숙히 파고들었다. 그 결과 세 나라에서 모두 불교 문화유산이 많이 발견되었다. 대표적인 게 절과 불상이다. 한국, 중국, 일본 어디에서든 쉽게 볼 수 있는게 절과 불상. 이것들이 문화의 보편성에 속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한반도로, 그리고 일본열도로. 시작점은 한 곳이니 삼세 나라의 불교문화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놀랍게도 각국의 절과 불상은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인다. 민족의 특수성이 반영된 결과다.



예컨데 한국의 절은 ‘산사(또는 사찰)’라고 해서, 예로부터 녹음이 푸르른 산에 지어졌다. 자연경광을 헤치지 않는 선에서, 자연과 어우러지도록 지어진게 바로 우리네 사찰이다. 반면에 중국은 아주 거대한 규모로 산과 바위를 파고, 깎고, 다듬어가며 하나부터 열까지 사람 손을 거쳐서 만들었다. 거대한 막고굴 같은 석굴사원이 대표적이다. 일본 사찰은 주로 마을 한켠에 있다. 


 


세 국가의 정원문화도 그렇다. 한국 정원은 창덕궁 정원처럼 언제나 자연을 중심에 두고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연과 조화로움을 생각했으며, 중국은 이화원 같이 인공적이고 거대한 정원을 만들었고, 일본은 라쿠스이엔이나 료안지처럼 돌과 연못등을 이용하여 절제된 환경의 정원을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불상이나, 도자기 같은 문화유산도 세 나라 모두에서 보이는 보편적인 문화유산이지만, 각 나라의 특수성이 반영되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유홍준 교수님이 굳이굳이 문화의 보편성을 이야기한 이유는 아마도, 이 책이 ‘중국 편’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중국과 뗄레야 뗄수 없고, 수많은 문화적 교류가 있었다. 그렇다보니 중국에 있는 문화유산과 비슷한 문화유산이 한국에 있을 때, 그 둘을 무의식적으로 비교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기에, 그런 사람들을 위해 굳이굳이 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이야기한게 아닐까? 


​​


자 이제 본격적으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중국편1』로 들어가보자.





진나라의 수도 함양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진시황의 아방궁이다. 아방궁이 하도 유명해서 사람들은 진시황이 짓고 살던 호화로운 황궁의 이름으로 생각하곤 하지만 아방궁은 미완성 상태에서 불타버렸고 궁궐의 이름도 아니다. 진나라의 궁궐은 함양궁이었다.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 35년 조에는 이 사실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아방궁은 끝내 완성되지 않았다. 완성되면 이름을 선택하여 다시 명명하려고 했다. 아방에 궁전을 지었기 때문에 천하가 그것을 아방궁이라고 했다. p 037



이것이 미완성으로 끝난 아방궁 마스터플랜의 앞부분이다. 한때 ‘말하는 건축가’ 정기용이 설계한 ‘지붕 낮은 집’인 고 노무현 대통령의 고향집을 아방궁이라고 헐뜯은 것은 참으로 터무니없는 헛소리였다. 또 전하기를 관중에 300채, 함곡관 동쪽에다 400여채의 궁전을 지었드며 또 진시황이 지배한 한, 위, 조, 제, 초, 연 6국의 부호 12만 호를 이곳으로 이주시키고 각국의 궁전을 모방한 건물을 짓게 하고 그들이 데려온 비빈과 미녀들이 미를 겨루게 하는 「삼십육궁의 봄」을 공연하게 했다고 한다. 이것이 전설적인 아방궁의 실상이다. p 039




난 아방궁이 진짜 호화스러운 궁을 말하는 줄 알았더니만, 웬걸! 미완성에다가 심지어 ‘아방’이라는 한자 뜻이 근방(가까울 아, 곁 방)! 아방궁 전설은 결국 ‘의자왕 삼천궁녀’ 마냥 문학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였다는 이야기.




한사군은 한반도 북서쪽 요동지방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보다 10여 년 앞서 한무제는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하서 지방의 흉노를 정벌하고 한사군을 설치했다. 이를 ‘하서사군’ 또는 ‘하서 한사군’이라고 한다. 하서는 황하의 서쪽이라는 뜻이며, 하서사군은 무위, 장액, 주천, 돈황 네 도시이다. (…) 역사적으로 보면 한족들이 세운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 등 역대 왕조들은 한사군과 한구군의 울타리 안쪽을 강역으로 삼았다. 오늘날 중국의 영토가 그때보다 3배나 더 넓어진 것은 아주 예외적이고 최근 일이다. 이는 만주족의 청나라가 한족의 울타리를 벗어나 변강민족과의 동질성을 내세우며 티베트를 흡수하고 위구르 지역에 신강성을 설치한 것을 중화민국이 그대로 계승한 결과이다. p 050



한족의 위치에서 보면 우리도 변강민족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변강민족의 삶은 염두에 두지 않고 한족의 입장에서 중국사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훗날 동쪽의 한사군은 400년 뒤 고구려가 되찾았고, 900년 뒤 남쪽의 한구군 중 하노이 지역을 베트남이 차지했다. 그러나 하서의 한사군 땅은 원래의 유목민족인 흉노와 치열하게 일진일퇴의 쟁탈전을 벌였다. 결국 흉노가 망하고 한나라 차지가 되었지만 한나라가 망한 뒤 이 땅은 다시 유목민족의 차지가 되어, 이들이 세운 단명 국가가 명멸하는 오호십육국시대(304~420)의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p 051



한반도 북서쪽에 있는 한사군이 아닌, 하서지방의 한사군. 이렇게 또 한나라 역사 지식 +1이 되었다. 



1949년 주원에서 정식으로 많은 청동기 구덩이가 발굴되었고 서주시대 궁궐터도 발견되었다.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에는 주나라 왕의 책봉을 받고 파견된 일, 제후가 전쟁에 참여한 일, 왕이 하사한 것, 토지의 교환/소송 판결등의 정치/경제/문화 각 방면이 언급되어 있다. 300개에 달하는 갑골문도 발견되었다. 특히 2003년 미현 양가촌에서는 문왕과 무왕을 받들어 주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단공의 후손 집 구덩이에서 아름답고 희귀한 청동제기가 다량으로 발견되어 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p 060



주나라의 성립과정을 보면 시조는 후직이고 (…). 고공단보의 손자인 창이 서백이라는 벼슬을 하고 있던 시절에 상나라의 폭군 주왕이 주지육림에서 애첩 달기와 온갖 못된 짓을 하며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을 때 그를 폐위시키고 주나라를 세웠다. 훗날 문왕으로 추대된 서백은 낚시하던 강태공을 태공망이라 부르며 재상으로 맞이해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중국 사상의 처음과 끝이라고 할 『주역』도 문왕이 감옥살이하던 시절에 64괘를 만들었고 주공(문왕子)이 여기에 괘사를 붙인 것이다. 이것이 이상적인 봉건국가 주나라의 탄생과정이다. p 064



‘하은주~’로 외웠던 고대 중국 역사. 일단 하/은(상)나라는 제쳐두고, 주나라 유물이 그렇게나 많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에 놀랍기 그지 없없다. 심지어 정치/사회와 관련된 여러 문건까지. 놀랍기도 놀라웠지만 부럽기도 엄청 부러웠다. 동시대를 살았던, 한반도 고대국가 유물들도 이정도까지는 없는데. 



우리나라 고대국가들은 기원전은 당연하고, 그나마 기원후인 고구려/백제/신라와 관련된 문건들도 대게 당대 기록은 유실되고 후대에 기록된 것들이 대다수다. 그나마 당대 기록이라고 남은 것들이 광개토대왕릉비나 진흥왕순수비 등이 남아있으나 오랜시간 외부에 있으면서 문자들이 유실되기도 하고, 설상가상 광개토대왕릉비는 중국에 있고. 부럽다 부러워!!



아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천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 저 많은 유물들이 어떻게 온전히 남아있을 수 있지? 싶었는데 왠걸. 기원전 771년 주나라가 유목민 침입을 받을때, 주나라 백성들이 다 들고 도망갈 수는 없으니 땅에 파묻고 도망간 모양이다. 그렇게 파묻힌 청동기들에 이천년이 지나 현대에 와서 발굴! 약간 뭐랄까.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사비백제가 함락될 때, 백제인이 땅속에 묻은 백제금동대향로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한무제는 사마천의 진언에 분노하였고 이듬해에는 사마천을 파면시키고 감옥에 가두었다. (…) 사람들은 결국 궁형이 사마천으로 하여금 『사기』를 저술케 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오히려 인생의 자산으로 삼은 이들을 이야기할 때면 꼭 사마천을 빼놓지 않고 말해왔다.


주나라 문왕은 구금 중에 『주역』의 64괘를 풀이하였고, 공자는 진과 채 사이에서 액을 당하고 『춘추』를 펴냈고, 굴원은 방축되고 『이소』를 지었고, 손빈은 다리가 잘리고 『손자병법』을 썼고, 쿠마라지바는 18년간의 유폐 중 한문을 배워 불경을 번역했고, 사마천은 궁형을 당하고 『사기』를 펴냈다. p 082



표면적으론 한무제가 이겼지만, 역사적으론 사마천이 이겼다. 왜? 기록을 남긴자가 승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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