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읽는 역사책, 일본사 교양서적으로 『도시를 거닐면 일본사가 보인다』는 일종의 역사기행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주로 가는 해외여행지가 일본인 만큼, 일본을 가기전에 가는 곳에 대한 기본적인 역사적 지식을 챙기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예컨데 일본 내에서 도쿄 야스쿠니 신사의 상징성이라던가, 후쿠오카 쿠시다 신사의 상징성. 반대로 교토 유력 관광지(거대 신사나 사찰)가 실은 한반도계 도래인이 조성했다는 사실 뭐 그런거! 이런 역사적 지식을 알고 있다면 조금 더 풍성한 일본 여행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 물론! 이 포스팅을 쓰는 본인은 일본여행 목적이 늘 한일관계유적지 답사였다.
현재 일왕가의 선조라 불리는 야마토 왕조는 7세기 무렵 수립되었다. 바다 건나 한반도는 통일신라, 대륙은 수-당 통일제국. 이런 국제 변화에 대응하고자 일 왕실에서 ‘천황’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중앙집권적 왕권강화를 시작한다. 예컨데 일본 역사서인 《고사기》, 《일본서기》 등도 이 시기에 왕실 주도로 집필되었다. 이 역사서들은 천황제의 이데올로기 확립 및 왕실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집필되었기에, 허위와 과장이 넘쳐난다는 점을 고려해야한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을 찾기 위해서는, 당대에 집필된 중국 역사서나 한반도 역사서를 교차검증이 필수다.
이 책은 야마토 정권이 도읍을 정한 아스카 시대부터 시작한다.

흥미롭게도 당시 야마토 정권은 어느 한 곳에 도읍을 정하지 않고 현재의 나라현 일대를 전전하며 새 왕이 즉위할 때마다 새 궁을 짓고 처소를 옮겨 다녔다고 한다. 이처럼 군주가 권좌에 오를 때 마다 새 궁을 지어 처소를 옮기는 관행을 ‘역대천궁’이라고 부른다. 언어학자 중에는 궁을 지칭하는 ‘미야’와 장소를 말하는 ‘도코로’의 ‘코’를 합친 ‘미야코’가 도읍을 뜻하게 된 것은 계속해서 궁을 옮기는 역대천궁의 전통에 따라 궁이 있는 곳을 도읍으로 부르던 언어 습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 p 026
‘역대천궁’의 관행이 남아있던 당시 천황가가 아스카로 천궁한뒤, 1세기 동안 그 자리를 지켰던 이유는 아스카가 ’소가 씨’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소가 씨는 백제계 도래인이으로 추정되며 딸들을 천황가에 시집보내고, 외손들을 천황으로 옹립하는 등 야마토 정권을 좌지우지 하던 강력한 호족이었다.
일본 역사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동시간대 역사서인 《수서》에 따르면 수문제는 견수사에게 왜의 정치가 후진적이라고 힐난했다. 이러한 《수서》에 실린 기사로부터 3년이 지난 뒤, 왜는 쇼토쿠 태자를 중심으로 한 ‘관위12계’, ‘17조 헌법’등 정치개혁을 단행한다. 견수사 보고에 따라, 진행된 정치개혁으로 추정된다. 물론 《일본서기》에는 《수서》에 적힌 수 문제의 힐난은 적혀있지 않다. 이유는 앞서 말한 역사서 편찬 목적 때문이다. 천황 권위를 높이기 위해 집필된 역사서인데, 수 문제의 일왕가 비난을 적는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소가 씨를 멸망케 한 잇시의 변은 야마토 조정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살해 현장을 눈앞에서 지켜본 고교쿠 여왕은 정변을 주도한 동생 고토쿠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잇시의 변 당시 또 한 명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나카노오에 왕자가 소가 씨를 대신해 야마토 조정의 실질적인 권력자가 되었다. 새로 즉위한 고토쿠 대왕은 나카노오에 왕자 드으이 도움을 받아 일련의 정치 개혁을 안행했다. 먼저 ‘다이카’의 연호를 사용하도록 지시하고 ‘개신에 관한 조’를 내려 호족 세력이 보유한 인민과 토지에 대한 지배권을 국가로 이양하는 대신 이들에게 식봉을 지급한다는 내용의 ‘공지공민’에 관한 원칙을 표명했다. p 044
고토쿠는 아스카를 벗어나 나니와(현재의 오사카)로 천도했다. 이 과정에서 고토쿠와 나카노우에 황자의 의견이 엇갈렸고, 나카노우에 황자는 자신의 지지세력들과 함께 아스카로 돌아간다. 결과적으로 고토쿠는 갑작스레 사망하고, 왕위는 나카노우에 황자의 모친이자 전 천황인 고교쿠 여왕에게 다시 돌아간다. 그렇게 다시 아스카로 천궁하였는데, 다시 아스카를 떠나는 일이 발생했으니 다름아닌 백제 멸망이다.
당시 한반도에선 나당연합군 전선이 고구려와 백제를 몰아내고 있었다. 백제 멸망시점이 바로 고교쿠 여왕이 재차 왕위에 올랐던 시기다. 백제와 친밀했던 천황가는, 백제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한반도로 파견했다. 결론만 말하면, 백촌강전투에서 나당연합군을 상대로 백제 부흥군이 처참하게 패배했다. 천황가는 혹시나 나당연합군이 일본까지 처들어올까 두려워하며, 한반도와 인접한 지역에 산성을 쌓고, 아스카보다 조금 더 내륙에 있는 지역으로 천궁한다.
여기서 질문! 고대 천황들이 도읍으로 정했던 아스카는 고대도시인가?
아스카가 고대도시가 맞는지를 논하기 전에,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도읍과 고대도시는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왕궁만 있어도 도읍이 성립할 수 있으나, 고대 도시는 다르다. 고대 도시가 되기 위해선 도시적인 경관과 함께 강력한 왕권이이야 말로 제일 중요한 전제조건이라고. 아스카 시대 일왕들은 여러 호족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 되며, 왕권을 제대로 휘두르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아스카는 일본 고대국가의 ‘도성’이지만, ‘고대 도시’가 되지 못하는 이유다.
헤이조경은 율령국가의 수도로 7대에 걸쳐 784년까지 불교와 함꼐 번성을 누렸다. 그 사이에 쇼무 천황은 역병과 내란을 피해 일시적으로 구니경, 나니와경, 시가라키경으로 거처를 옮긴 적도 있다. 그렇다고 천도를 단행하지는 않았다. 율령제가 정착하면서 관인의 숫자가 많아졌고 그에 따라 이전처럼 간단히 천도를 시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8세기 후반 새로이 천황에 즉위한 간무는 조정의 분위기를 일신하고자 천도를 지시했다. 비대해진 사원세력을 정리하고 후지와라 씨와 같은 귀족들의 정치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도를 선언한 것이다. 여러 우여곡적을 겪은 끝에 결국 794년 지금의 교토에 해당하는 헤이안경으로 도읍을 옮기게 된다. 헤이안경으로 천도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리고 헤이조경 일대는 다시 논밭으로 되돌아갔다. 심지어 궁궐 터의 위치조차 잊혔다. p 096
백촌강 전투 이후 왕실은 후지와라 경으로 천도한다. 후지와라 경은 중국의 도성제에 기반하여 조성된 도성되었다. 이미 동아시가 각국에선 도성제를 갖추고 있었기에, 어찌보면 조금은 늦은 시작이기도 하다. 하지만 후지와라 경이 도성 역할을 한 건 고작 16년. 그 이후엔 헤이조경으로 천궁한다. 헤이조경이 도성 역할을 한 건 백 년이 채 안된다. 이후로 우리가 잘 아는 헤이안 시대, 교토 천년의 시대가 열린다(후지와라 경, 헤이조 경이 몰락할 수 밖에 없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건 생략).
후지와라경에서 헤이조경으로, 다시 나가오카경을 거쳐 헤이안경으로 천도가 거듭되면서 야마토에 본거지를 둔 호족들은 고향에 대한 유대감이 점점 약해졌다. 그 결과 야마토를 떠나 헤이안경으로 아예 이주를 결정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야마토뿐 아니라 멀리 북쪽과 서쪽의 변경에 사는 지방 호족 또한 이주했다. 이처럼 고향을 떠나 헤이안경으로 이주한 지방 호족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독립성을 상실하고 천황 권력에 귀속된 궁정 귀족이 되었다. p 114
헤이안경은 모든 면에서 이전 도성들과 비교했을 때, 일본 도성의 완성형이라 할 수 있다. 천황의 권위도 그동안의 부침을 벗어나 정점에 이르렀고, 행정 등 정무도 자리가 잡힌 뒤였다. 점점 천황은 행정 실무에서 손을 떼고, 권위의 존재로 군림하게 된다. 자연스레 천황을 대신해 현실정치를 주관하는 대리인이 나오게 되는데, 바로 ‘섭정’과 ‘관백’이다. 훗날 외척인 후지와라 가문이 ‘섭정’을 차지하며 권력을 좌지우지 하게 되고, 더 오랜시간 뒤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관백’을 차지하여 권력을 차지하는 등 섭정과 관백은 천황보다 더 앞에 있는 실질적인 권력가들이 차지하는 자리가 되어버린다.
여러 도시 문제 가운데 당시 사람들을 가장 골치 아프게 만든 것은 배설물의 처리였다. 한 사람당 하루에 배출하는 분뇨의 양을 대략 0.5리터 정도로 추산해, 헤이안 경의 인구를 10만 명으로 어림잡으면 연간 분뇨배출량은 1만 8,250킬로리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 일본에서 사람이나 가축의 배설물을 비료로 만들어 농사에 재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이후 중세부터였다고 한다. 따라서 인분의 활용법을 알지 못했던 헤이안 시대는 흐르는 강물에 배설물을 투기하는 것이 일반적인 처리방식이었다. 귀족들은 대로 옆에 흐르는 도랑에서 물길을 끌어와 측간을 거쳐 다시 도랑으로 흘려보냈다. 오늘날의 수세식 화장실과 유사한 처리 방식이지만 문제는 대로 옆 도랑으로 흘려보낸 용변이 쌓여 물길을 막거나 사람들이 통행하는 도로로 흘러넘쳐 악취를 풍기기 일쑤였다는 점이다. p 129
각종 배설물 처리와 더불어 헤이안경에 거주하는 이들을 괴롭힌 또다른 문제는 빈번히 발생하는 자연재해였다. 선행 연구에 따르면 천도 직후인 9세기에 발생한 지진 가운데 진도 6이상의 강진만 하더라고 모두 6차례 확인된다. 이 가운데 887년에 발생한 ‘난카이 대지진’은 수많은 민가와 관청에 피해를 일으켰을 뿐 아니라 건물이 무너져 압사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 헤이안경은 목조 건축물이 대부분이어서 화재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에 따라 화재 역시 지진 못징낳게 커다란 피해를 일으켰다. 대화재로 천황의 거처인 다이리가 소실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p 130
앞선 도읍이었던 후지와라경 역시 배수시스템과 공중 위생문제로 폐도가 되었기에, 헤이안경 역시 발전이 없었다면 폐도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헤이안경은 폐도는 커녕 도읍으로써 천년동안이나 존속한 것으로 미루어볼때, 도시문제 해결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에는 없는 내용이긴 하지만, 교토 도시문제 해결에 앞장선 사람들로는 도래인 하타씨 일족을 들 수 있다. 6세기에 이미 거대 집단이 된 도래인 하타씨는 열도 곳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중 하타씨 거대세력 일부가 교토에 자리를 잡았다. 하타씨는 토목(제방공사), 광산, 농업, 염전, 양잠, 양조등 도시개발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기술을 지닌 집단이었다. 이런 하타씨가 교토에 자리잡고 제방공사(대언천 제방), 경제기반 발달(농/광/상업 등)등을 이끌며 교토 도시개발에 앞장섰던 것이다.
리뷰는 여기까지! 앞서 말하긴 했지만 일본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 쯤은 이 책을 읽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