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판에 눈이 내린다. 그 곳엔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심겨져 있다. 마치 엉크린 사람들 같다. 그 뒤로 봉분들이 즐비하다. 검은 통나무는 묘비인가. 어느 순간부터 바닥에 물이 차기 시작한다. 지평선인 줄 알았던 벌판의 끝은 바다였다. 물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소리내어 말했다. ‘왜 이런 데다 무덤을 쓴거야?’ 무덤이 모두 바다에 쓸려가기 전에 뼈들을 옮겨야 한다. 그리고 꿈에서 깬다.
소설은 경하의 꿈 이야기로 시작한다. 5월의 광주를 소재로 소설을 쓴 이후에 시작된 꿈이었다. 길몽은 아니다. 악몽이라고 치부하기엔 무언가 찝찝하다. 아마도 경하의 꿈은 살아남은 자가 느끼는 죄책감,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미안함, 국가에 대한 분노 등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무의식중에 발현된게 아닐까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 꿈은 경하만의 꿈이 아닌, 제 2의 경하, 제 3의 경하가 꾸었을 꿈이기도 하다. 어쩌면 5월의 광주를 소재로 소설을 썼던, 한강 작가가 꾸었을 꿈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5월의 광주에 메여있던 한강 작가가 제주 4.3에 눈길을 돌린 건 필연이었다. 그리하여 한강 작가는 제주 4.3을 주제로 한 『작별하지 않는다』를 집필했다. 다만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작별하지 않는다』가 ‘지극한 사랑이야기’로 받아들여졌으면 한다고.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저자의 말이 이해가 갔다. 이 책 저변에는 정말 사랑이 깔려있었다. 진짜로 지극한 사랑이야기가. 그렇다. 이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은 증언문학이기 이전에, 정말 지극한 사랑이야기를 담은 소설이었다.
소설 속 인물인 경하도 작가처럼 제주 4.3에 다가섰다. 인선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인선, 그녀는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인선은 자신을 향한 부모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부모의 뜻모를 고통과 슬픔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런 부모의 감정이 자신에게 옮겨지는게 두려웠다. 그래서 인선은 제주를 떠났다. 그렇게 육지에서 인선은 경하와 만났고 친해졌다. 경하는 인선에게 꿈 이야기를 했고, 자신의 꿈을 영상으로 만들기로 했다. 인선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각박한 현실을 살아내느라 경하와 인선은 잠시 멀어져있었다. 그 사이에 인선은 다시 제주로 돌아갔다. 자신이 업으로 삼던 일조차 뒤로한채. 그렇게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겨울, 경하는 인선의 연락을 받았다. 병원으로 와달라는 연락을. 그렇게 경하는 인선을 찾아 병원으로 갔고, 인선의 요청으로 제주로 내려갔다. 눈이 세차게 내리던 겨울 날에. 그날 경하는 마주하고야 말았다. 제주에서 벌어졌던 참극과, 그 참극으로 인해 무너져내렸던 인선의 가족사를.
인선의 엄마는 한날 한시에 부모와 동생을 잃었다. 겹겹이 쌓인 시신들 사이에서 부모 시신을 찾겠다고, 시신에 쌓인 눈을 쓸어 내리는 열 일곱 살 언니 옆에 붙어서, 열 세살 동생은 시신들 얼굴을 확인했다. 부모 시신은 찾았으나, 동생은 보이지 않아서 불타 무너져 내린 집으로 돌아갔다. 그 곳에서 숨만 붙어있던 동생을 발견했다. 동생이 살아나길 바라며,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어 동생 입에 물렸다. 그저 살아나기만을 바랐다. 시신조차 찾지 못한, 생사확인이 안된 오빠를 찾고자 노력했다. 오빠가 주정공장에 갖혀있었단 사실을 알았고, 잠시나마 오빠를 만났다. 하지만 오빠는 대구로 이감되었다. 그렇게 인선 엄마의 오빠, 인선의 외삼촌은 영영 실종상태다.
인선의 아빠는 젊은 남성을 대상으로 한 예비검속(보도연맹)을 피하기 위해 낮에는 산에 숨고, 밤에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어느 날,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주민 명부에 있는 사람이 집에 없다는 이유로, 남은 가족들이 군경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렇게 인선의 할아버지가 죽었다. 인선의 아빠도 결국은 예비검속으로 끌려갔다.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러다 대구로 이감되었다. 대구로 이감된 대다수의 재소자들은 학살되었지만, 형기가 길었던 인선의 아빠는 살아남았다.
오빠를 찾던 인선의 엄마는, 그렇게 인선의 아빠와 만났다. 오빠 소식을 듣기 위해. 그렇게 몇 년 후 그들 사이에 딸이 태어났다. 인선이다. 인선이 그렇게나 도망치고 싶었던, 인선이 이해할 수 없었던 부모의 행동과 감정. 인선은 성인이 되어, 어머니가 성치 않아 돌보기 위해 제주로 돌아오고 나서야 알았다. 자신의 부모가 그런 행동을 보인건, 자신을 진정 사랑해서였노라고. 다만, 인선을 사랑하는 부모가 어린날 겪었던 참극이 그러한 사랑의 형태를 만들어 냈을 뿐이라고. 그렇게 벗어나고자 했던 인선 또한, 부모를 사랑했기에, 부모의 사랑을 알았기에, 그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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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담과 밭담들, 돌로 된 집들의 벽체들만 남기고 모든 것이 불타고 있었어. 아버지가 집에 들어서자 마당 가득 붉은 게 흩어져 있어서 놀랐는데, 달아오른 고추장 장독이 터진거였어. 집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총소리가 들렸던 팽나무 아래로 달려가보니 일곱 명이 죽어 있었대. 그중 한 사람이 할아버지였어. 가호마다 주민 명부를 대조한 군인들이, 집에 없는 남자는 무장대에 들어간 걸로 간주하고 남은 가족을 대살한 거야. p 218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p 220
당숙네에서 내준 옷으로 갈아입힌 동생이 앓는 소리 없이 숨만 쉬고 있는데, 바로 곁에 누워서 엄마는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대. 피를 많이 흘렸으니까 그걸 마셔야 동생이 살 거란 생각에. 한순간 동생이 아기처럼 손가락을 빨았는데, 숨을 못 쉴 만큼 행복했대. p 251
세상에서 가장 나약한 사람이 엄마라고 생각했어. 허깨비. 살아서 이미 유령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 삼 년 동안 대구 실종 재소자 제주 유족회가 정기적으로 그 광산을 방문했다는 걸 나는 몰랐어. 엄마가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도. p 288
잠들어 던 내 입에 손가락을 물리고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엄마는 아이처럼 울었어. 짜고 끈끈한 그 손가락을 억지로 빼내지 못하고 나는 견뎠어. 장사처럼 힘이 세진 엄마가 숨을 못쉬도록 나를 껴안을 때는 다른 길이 없어서 마주 껴안았어. 엄마는 나를 죽어가는 동생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어. 언니라고 믿을 때가 더 많았고. 어떨 때는 낯선 사람으로 여겼어. 자신을 구하러 온 모르는 어른. 무서운 악력으로 내 손목을 붙잡고 엄마는 말했어. 구해줍서. p 312
이 책은 분명 소설이다. 하지만 책 속 인선의 가족들이 겪었던 일들은, 1947년 4월 제주도민이 겪었던 일들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소설이지만 실화다. 제주 4.3은 국가의 주도하에 일어난 국민 학살극이었고, 국가의 주도하에 잊혀져야 했다. 그렇게 군사정권이 끝나고, 민간인 대통령이 당선될 때까지 제주 4.3는 언급할 수 없었다.
난 제주도를 갈때마다 4.3유적지를 찾아다녔다. 많은 사람들이 학살된 북촌, 터진목, 광치기해변, 성산일출봉, 서우봉, 종남밭, 당오름, 섯알오름, 화북동 등. 곳곳을 찾아다니며 그 곳에서 죽어간 그들을 추모했다. 내가 제주 4.3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소설 속 경하가 꿈을 꿨듯,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모르고 살았던 미안함, 국가에 대한 분노 등 여러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게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연장선상에서 블로그에도 제주 4.3과 관련된 글을 자주 올렸다. 그래서 누군가 제주 4.3이 왜 일어났냐고 물어본다면, 당장이라도 대답할 수 있을 정도다. 제주 4.3의 배경과 도화선, 국군과 미군정의 제주도 초토화 계획, 제주도민을 학살하기 위한 국군과 미군정의 사기극까지. 그 뿐만인가? 한국전쟁 당시 제주에서 자원입대자가 많았던 이유가, 빨갱이라는 굴레를 벗기 위해서라는 것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는 여전히 이름을 부여받지 못했다. 그저 제주 4.3이다. 제주4.3 평화공원기념관에 있는 백비에 비문이 새겨질 날이 언제쯤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