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사라진 근대사 100장면 1』에 이어 2권 리뷰 시작!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역사책은 수험생들에겐 권장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시험을 합격하고 난 후에는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왜? 시험공부 중에 이 책을 읽으면 교과서와 모순된 사실에 혼란스러운게 첫번째. 두번째는 교과서에서 배우는 우리 근대사가 전부가 아닌게 두번째. 분명 교과서에 실린 근대사도 사실이긴 하지만, 그 사실은 만들어진 사실이라는 점을 수험자들은 모르기에 이 역사책은 절대적으로 모든 시험이 끝나고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예컨데 ‘A가 B해서 C를 했다’라는 사실이 있다고 하자. ‘A가 C를 했다’는 말은 듣기가 좋다. 하지만 그 사이에 있는 보기에 좋지 않은 ‘B를 해서’라는 문구가 있다. 여기서 우리 국사 교과서 특징이 나타난다. 보기 좋지 않은 ‘B를 해서’를 삭제하고, 바로 ‘A가 C했다’라는 문장으로 수정하는 것. B를 삭제하긴 했지만, 여튼 ‘A가 C했다’는 말도 맞는 말이니까.
자, 이제 본격적으로 교과서가 은폐한 우리 근대사를 살펴보자. 2권은 동학농민전쟁부터 해방이 된 1945년까지다.
만국박람회가 공식 개막하던 바로 그날, 조선에서는 복잡한 이력을 가진 공무원 하나가 전라도 고부군수로 임명됩니다. 이 하찮은 지방 관리는 이후 조선은 물론 동아시아 역사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신임 군수 이름은 ‘조병갑’ 입니다. 5년 뒤 조선팔도를 뒤흔든 동학 농민 전쟁의 불씨가 된 사람입니다. 조병갑은 훗날 영의정이 된 조두순의 서조카입니다. p 027
부정부패 탐관오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어떤 모습일까? 바로 조두순이 아닐까? 물론 그 시대 양반네들 대다수가 부정부패로 찌들어있었기에, 조두순보다 더한 인간도 분명 많았다. 조두순 이전에 세도정치하던 양반네들이 그랬고, 조병갑 이후에는 여흥민씨들이 그랬으니까. 그렇게나 탐관오리가 많았음에도, 유독 조병갑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병갑이 중요한 이유. 우리가 국사책에서 배우는 대표적인 이유는 바로 조병갑의 학정이 동학 농민 전쟁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국사책에는 없으나, 사실인 이야기 하나 더. 못살겠다 들고 일어난 백성들과 달리 고종은 끊임없이 조병갑을 감싸며, 조병갑을 최고중의 최고 수령이라 극찬했다. 왜? 고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조대비의 양자로 들어갔기에 가능한거였으며, 따라서 풍양조씨 일가는 고종의 (새로운) 외가였다. 세도정치를 끊어낼줄 알았던 고종시대는 놀랍게도 앞서 세도정치의 세력이었던 풍양 조씨와, 고종의 처가댁인 여흥 민씨 세력이 부정부패라는 말 조차도 그들에겐 먼지가 될 정도로 탐학과 비리, 가렴주구에 점철된 시대였다.
조병갑을 끊임없이 감싸던 고종. 동학을 역당으로 치부하고 이들을 처단하고자 청나라 군사를 스스로 불러들였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청나라군이 조선땅에 들어온 이유다. 청군이 조선땅에 들어오니, 텐진조약에 의거하여 일본군도 조선 땅에 들어왔다. 동학은 당연하게도 섬멸되었고, 남은 청군과 일본군은 조선 땅에서 전쟁을 벌였다. 조선을 니가갖니 내가갖니 하는 이유였다. 바로 청일전쟁이다. 여기서 일본이 승리했다. 그렇게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는데 본격적인 첫 발을 내딛게된다.
동학농민전쟁을 시작으로 조선의 식민지화까지. 조병갑이 바로 그 시작점에 위치한, 그래서 중요한 인물인 것이다. 거기다! 국사책에서 배운 동학 농민 전쟁의 발단은 분명 조병갑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2020년에 제정된 동학 특별법에선 그를 가해자 신분에서 제외시켰다. 근대사 뿐만 아니라 현대사에서 조병갑이 중요한 이유다. 따라서 특별법에 따르면, 조병갑 학정에 분노하여 처음 들고 일어난 고부봉기 참여자는 동학군이 아니게 되었다.
그런데 2020년 제정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2조에는 이렇게 규정돼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란 1894년 3월에 봉건체제를 개혁하기 위하여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참여자를 말한다.”
1894년 2월 고부관아를 습격해 조병갑이 만든 만석보를 부순 첫번째 거병은 ‘동학농민전쟁(혹은 혁명)’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법적으로 조병갑 또한 동학 농민 전쟁 가해자 명단에서 제외돼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치와 관계가 있으니, 입을 다물겠습니다. p 036
고종은 전제군주권을 제한하려는 일본의 개혁안(갑오개혁안)을 끊임없이 반대하다가, 일본군이 철수한다고 하니 돌연 개혁안을 받아들이며 일본군 철수를 반대한다. 국사책에서 배우던 ‘일본군 철수를 요구했지만, 일본군이 거부하고 되려 경복궁을 점거하여 고종을 협박하며 친일정권을 세웠다’ 등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다. 왜? 국사책에 실린 내용도 분명 사실이지만, 중간 중간에 지워진 사실들 때문이다. 고종이 부도덕하고 능력없는 지도자로 보이는 사실들을 생략하고, 남은 사실들로만 끼워맞추다보니 발생한 현상이다. 이 얼마나 기이한 역사인지.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난다. 청나라와 일본은 이른바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 1조의 내용은 이렇다. ‘청은 조선국의 완전무결한 독립자주를 확인한다’. 공식적으로 청나라는 조선에서 손을 뗐으며, 일본은 조선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한다.
동학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궤멸되고 청일전쟁 전선도 대륙으로 넘어가고 일본 승리가 확실시되던 그 겨울, 일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일본 공사에게 “남아서 민란을 진압해 달라”며 소매를 붙잡고 있는 어느 유력인사의 육성입니다. 공사 이노우에는 며칠 줄다리기 끝에 이 요청을 수용합니다. 그 어느 교과서에서도 이 발언과 발언 주인공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일본군은 철수하지 말라’고 요청한 이 사람은 ‘조선국 국왕 고종’ 입니다. p 088
일본이 어디 조선이 예뻐서 자기네 병사를 희생했겠습니까. 더 이상 1876년 수신사 김기수에게 함께 근대화를 하자고 권했던 일본이 아닙니다. 여관방에 앉아 있으려는 김기수를 끌고 나가 견학을 시키며 “함께 나아가는 게 소망”이라고 역정 내던 이노우에 가오루는 없습니다. 1894년 12월 4일 일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고종을 ‘협박’했던 이노우에 가오루는 협박이 성공한 뒤 본국에 ‘임무 완수’ 보고서를 보냅니다. p 097
청이 조선에 손을 떼고, 일본이 본격적으로 조선 식민지화 첫삽을 뜨게 한 시모노세키 조약이 맺어졌던 그 해변가. 그 해변에는 기념비 하나가 세워져있다. 기념비 이름은 ‘조선통신사 상륙엄지지’. 선진국인 조선 사절단이 세련된 학문과 예술문화를 일본에 전해주었다. 참 아이러니하다. 고대에는 도래인이, 중세에는 통신사가 일본 땅에 수많은 선진문물을 전해주었는데, 그 관계가 이렇게 역전될 수가 있다니. 이게 오로지 침략한 일본 탓이라고 하기엔, 조선의 위정자들의 잘못된 선택이 너무나도 많았다.
일본보다 더 이른 시기에 서양의 문물을 습득할 기회가 수차례 있었지만 이를 스스로 날렸고, 날릴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미 지도에서 사라진 명나라에 사대하며, 끊임없이 쇄국으로 치달았던 조선. 일본과 비슷한 시기에 근대화를 할 수 있었음에도 이 역시 날리고 쇄국에 박차를 가했던 조선. 쇄국을 했으면 자국민을 위한 정치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백성들은 굶어죽어도 본체만체 지식탐구조차 못하게 했던 조선. 동시대 바다건너 유럽에선 시민혁명,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과 너무 대조되지 않은가.
“작년 6월 이후 칙령과 재가 사항은 어느 것도 내 의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철회한다.”
갑오개혁정부가 내놓은 200여 가지 개혁안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순간입니다. 신분제가 부활하고 문무 차별이 부활하고 연좌제가 부활하고 과부가 다시 평생을 수절해야하고 노비가 주인집으로 돌아와야하고 과거가 부활하는 끔찍한 세상이 돌아온 겁니다. 물론 이 같은 선언이 이 모든 구악의 실질적 부활을 뜻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권력은 동력을 잃은 갑오개혁정부로부터 고종에게 역류하기 시작합니다. p 102
일본군을 붙잡기 위해 승낙했던 군주권을 제한하는 갑오개혁안. 일본군 잔류가 결정되었으니, 고종은 다시 군주권을 찾고자 한다. 왜? 고종은 언제나 왕인 본인만을 생각했던 사람이기에. 그리고는 대사면령을 내린다. 겨우 겨우 잡아들였던 민영휘, 민영주 등 여흥민씨 척족과, 동학농민전쟁의 근원인 조병갑을 포함한 풍양 조씨들.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던 그들을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자기 측근으로 앉혔다. 예컨데 그 조병갑! 조병갑은 대한제국 법부 민사국장이 되었다.
이후에도 고종은 끊임없이 본인 안위만을 위한 정치를 한다. 그 중 고종의 이기심이 똘똘 담겨있는 아주 적은 일부를 아래에 옮긴다. 이것만 읽어도 속에 분노가 들끓지만, 슬프게도 이는 발톱의 때만한 분량일 뿐이다. 이 이후의 내용은 부디 이 책을 읽어보시길.
아관파천을 포함해 고종은 1907년 황제 퇴위까지 모두 일곱 차례 외국 공관으로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 와중에 미관파런과 영관파천 미수 각 1회, 1896년 왕비 민씨 살해사건 직후 성공한 아관파천 1회,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직후 미관파천 미수 1회, 1904년 러일전쟁 직전 미관파천 미수 1회화 1905년 러일전쟁 도중 미관파천과 불관파런 미수 각 1회, 도합 4개국 7회. 국가 운명이 풍전등화일 때마다 고종은 외국에 피난처를 의뢰합니다. 아관파천은 그 ‘7관 파천’ 가운데 유일한 성공 케이스입니다. 이를 ‘훗날을 도모한 망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관 1년 동안 팔려나각 수많은 국가 이권사업과, 도주 생활 청산 후 고종이 한 일들을 보면 ‘훗날 도모’ 같은 비전은 보이지 ㅇ낳습니다. 그저 그가 즐겨 쓰는 ‘이권 판매 조건부 권력 유지’ 거래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p 115
1885년 묄렌도르프를 시켜서 러시아 보호국을 요청했던 그 짓을 또 합니다. 그리고 민영환은 ‘최대한 빨리 귀국해 보고해야 한다’며 즉답을 요구합니다. 개인 민영환이 아니라 ‘고종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민영환이 내놓은 조선정부 공식 요청입니다. 500년 대중 사대에 찌든 나라가 근대라는 격랑을 맞아 러시아로 사대 본국을 바꾸려고 합니다. 관모를 고집하며 대관식 참석을 거부하고 사요의 장인 식사 자리를 거부한 전권공사가, 곧바로 황제와 대신에게 보호령 본국이 돼달라고 거듭 요청합니다. p 123
민영환이 모스크바로 향하고 있던 4월 22일 고종은 러시아인 니시켄스키에게 함경도 경원과 종성 사금광 채굴뤈을 허용합니다. 민영환이 귀국길에 들른 연해주에서 조선 동포들을 만나고 있던 9월 9일 고종은 연해주 상인 보리스 브리네르가 설립한 합성조선목상회사에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 벌목과 양목 권한을 허가합니다. 숱하게 판매된 이권 가운데 일부입니다. 아, 보리스 브리네르는 러시아계 미국 영화배우 율 브리너의 아버지입니다. p 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