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내 책 취향과는 사뭇 다른, 정말 새로운 책을 읽었다. 근데 또 책 구성이나, 흐름 이런건 꽤나 익숙하다. 심지어 내 관심사 중 하나인 대한민국 대중음악사도 곳곳에 스며들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색다르게 느낀건, 이 책 속 주인공 때문이다. 왜? 이 책 속 주인공은 내 세대보다는, 우리 엄마 세대가 좋아할 바로 그 사람! 오빠 부대 원조! 가수 ‘남진’ 이기 때문이다.
책 제목은 『오빠, 남진』.
가수 남진의 음악 인생사는 대한민국 대중가요 음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가요는 잘 안듣지만(?) 대중가요 음악사는 꽤 관심이 있는 편이다. 여기저기서 주어들은 잔지식도 꽤 있고. ‘역사’라는 범주 안에 있다면, 어떤 장르의 역사든 일단 파고 보는 습성이 여기서 빛을 발한다.
19세기를 지나면서 우리 전통 음악에도 변화의 바람이 분다. 이전까지 왕을 위한 궁중음악과 중인 이상 지배층이 즐기던 가곡, 서민들의 잡가 등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는데, 신분제가 폐지되고 근대식 극장과 대중매체가 등장하면서 이런 구분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판소리와 잡가에 능한 전문 소리꾼이 국왕에서 천민까지 모두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대중매체가 등장했다. p 022
19세기에 이미 변화를 겪고 있었던 전통 음악은 우리 대중 음악이 탄생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외래 음악의 영향을 받은 전통 음악이 대중음악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민요풍의 창작 대중가요인 ‘신민요’다. 전통 음악 다음으로 대중음악에 영향을 준 것은 서양 음악이었다.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와 교회 그리고 대한제국 군악대 등을 통해 도입된 서양 음악은 창가와 찬송가, 군가의 형태로 우리 대중음악에 영향을 끼쳤다. 그 뒤를 이은 일본 음악은 일본의 전통 음악이라기보다 ‘일본이 받아들인 서양 음악’에 가까웠다. 서양음악이 일본을 거쳐 우리 대중음악으로 정착한 셈이다. p 025
모름지기 대중음악이란 ‘대중’이 듣는 음악을 말한다. 고로 대한민국 대중음악은 대중이 존재하는 시기부터 시작한다. 그 시기가 언제인고 하면, 백년 전으로 훌쩍 올라가 신분제를 철폐한 갑오개혁까지 가야한다. 그 과정과 배경에는 청일전쟁과 조선에서 주도권을 빼앗고자 하는 일본의 흑심이 다분히 포함되어 있지만, 이유야 어찌되었든 갑오개혁으로 조선에서 신분제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물론 왕족 제외하고. 그렇게 이 땅에 대중이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개화기. 일본을 시작으로 여러 외국에 문호를 개방했다. 자연스럽게 외국의 음악도 조선으로 들어온다. 조선 땅에 있는 음악이라고는 궁중음악이나 판소리, 민요 등이 전부였으나, 이 시기를 기점으로 여러 장르의 노래가 동시다발적으로 조선 땅에 들어왔다. 백성이었으나, 이제는 대중이 된 개화기 조선 사람들. 그들은 조선에 들어온 외국 노래를 조선화 시키며 부르기 시작했다.
1. 신민요: 기존의 민요를 대중가요화한 장르로 작곡, 작사가가 따로 있다.
2. 트로트: 일본에서 유행하던 대중음악의 영향으로 생겨났다. 처음엔 일본 유행가 번안곡 형태로 시작했다.
3. 재즈송: 재즈, 팝성, 샹송, 라틴음악 등의 서양 대중 음악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노래로, 가사에 외래어를 섞어 쓰는 특징이다.
4. 만요: 미국 팝송에 재미난 가사를 붙인 일종의 코믹송. 대표적인 노래로 ‘유쾌한 시골 영감’, ‘오빠는 풍각쟁이’가 있다.
하지만 서슬퍼런 일제강점기와 태평양전쟁, 한국전쟁이 연이어 터진다. 개화기 때 한창 발전하던 한국 대중가요는 긴 기간 암흑기를 보냈다.
일제 말기가 되면서 당국의 검열은 더욱 심해졌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노골적인 친일을 담은 군국가요 음반만 발매할 수 있었다. 심지어 빅타와 컬럼비아 같은 레코드 회사는 ‘적성 국가 언어로 된 이름’이라 하여 회사 명칭까지 바꿔야 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성장을 거듭하던 대중음악이 암흑기에 접어든 것이다. p 039
1935년 발매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우리 민족의 현실을 담아낸 가사로 인해, 일본 경찰이 문제 삼았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음반사 측 기지로 풀려났고, 오히려 이 일화로 인해 더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는 그 노래! 목포 유달산에는 이를 기념하는 노래하는 비석까지 서있다. 그 목포에서 해방을 맞은 1945년에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이름은 김남진. 무려 양반가문에, 재력까지 있던 집안의 늦둥이였다.
해방 후 한국의 대중가요는 새로운 도약에 나섰다. ‘이난영(목포의 눈물)’을 시작으로 ‘현인(신라의 달밤)’, ‘한복남(빈대떡신사)’, ‘백난아(낭랑 십팔세’), 등 지금도 많은 후배 가수들이 리메이크하는 명곡들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이 명곡들은 발매된지 채 몇년 안되서, 묻히고 만다. 1950년, 북한이 남한을 쳐들어오며 전쟁이 시작되었기에. 바로 한국전쟁, 6.25 전쟁이다. 더욱이 한국전쟁 당시 많은 예술인이 월북(을 빙자한 납북)되었다. 일제강점기 못지 않은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의 암흑기였다.
한국전쟁이 끝났다. 그와 함께 대한민국에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미군이 주둔하자, 자연스레 팝송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소년 김남진을 사로잡은 팝송의 유행은 한국전쟁 때 한반도로 온 미군과 함께 시작되었다. 전쟁 후에도 미군이 주둔하면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원판 LP들은 기지촌 주변과 양키 시장에서 유통된 것이다. 1957년 첫 방송을 시작한 AFKN(주한 미군 방송)도 한몫했다. p 058
해방둥이로 태어났던 김남진은, 팝송을 즐겨 듣는 청소년이 되었다. 그렇게 팝송에 푹 빠진 김남진. 그때까지만해도 철부지 김남진은, 자기 인생이 대중음악과 한 몸이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극장 쇼는 악극에 신파, 코미디, 국악, 가요, 팝송, 미술까지 망라한 종합 엔터테인먼트였어요. 중학교 때부터 팝송에 푹 빠져 있던 나는 당연이 국악이나 트로트보다 팝송 스타일의 노래를 좋아했죠. 그래서 쟈니리나 정원, 김상국 같은 분들이 나온다고 하면 학교를 빼먹고라도 꼭 보러 갔어요. 『오빠, 남진』 中
미8군쇼와 미국 대중음악의 유행으로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에 팝송스타일의 가요가 주름잡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노래로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 현미의 ‘밤안개’, 정훈희 ‘안개’등이 있다. 이렇게 팝송 스타일의 가요가 유행한 건 미군 주둔이 제일 큰 이유겠지만, 내적으로 보면 미군에 잘보여야 할 군부독재 정권의 묵인도 한몫했다.
이때 한창 유행했던게 바로 ‘미8군쇼’다. 미8군쇼에 얼굴을 비치고, 노래를 부르면 바로 인기가수가 될 수 있었다. 실제로 미8군쇼에서 노래를 불렀던 사람들은,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에 한 획을 긋는 존경받는 가수가 되었다. 당시 인기가 어느정도였나면, 당시 수많은 음악학원 중 미8군 무대 진출을 위한 음악학원도 있을 정도였다.
청소년 김남진도 이때 음악학원에 들어갔다. 유명 작곡가 한동훈이 세운 한동훈 음악학원에. 여기서 중요한 건 이거다. 청소년 김남진은 요즘말로 길거리 캐스팅을 당했다! 팝송을 부르는 그의 실력이 꽤나 좋았다는 이야기다.
난 진짜 그때 앨범만 나오면 인기 스타가 될 줄 알았어요. 아버님이 운영하시던 언론사를 통해 기사화까지 예정되어 있었으니 더욱 그랬죠. 앨범이 나오고 기사가 뜨면 방송국에서 내 노래를 틀어댈테니, 인기가수는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오빠, 남진』 中
‘최희준 모창 가수’라고 할 정도로 스타일을 따라한 음악적 한계, 방송계에 촌지를 돌리는게 관행이었으나 이를 몰랐던 신인가수 남진과 고지식했던 작곡가 한동훈. 그렇게 가수 남진의 데뷔곡 ‘서울 푸레이보이’는 대실패했다. 하지만 이 실패는 가수 남진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었다.
그때 제일 인기 있던 라디오가 동아방송이었는데, 아는 사람도 없이 무작정 찾아갔어요. 지금도 이름을 잊어버리질 않아. 강수향 음악부장님이라고, 원래 테너 가수였는데 은퇴하고 방송국에서 음악 방송 총책임자로 일하고 했었어요. 무턱대고 그분을 찾아가서 앨범을 드리며 인사를 했지.
6개월즘이 지나가 여기저기 다른 방송국에서도 내 노래가 나오는 거예요. MBC, KBS, 동양방송, 기독교방송까지 모두 다요. 심지어 하루에 네댓 번까지도 방송을 탔어요. 정말 하늘로 날아오르는 기분이었죠. 『오빠, 남진』 中
금지곡 지정. 검열이라는 명목하에 금지, 통제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유신독재시절이다. 금지 사유야 많지만, 실질적으로는 권력자 마음에 안들면 바로 금지가 되어버리는 세상이었다. 그렇게 남진이 부른 ‘연애 0번지’는 금지곡이 되었다. 여기서 반전. 남진이 부르기 싫었던, 어쩔수 없이 불렀던 트로트 ‘울려고 내가 왔나’가 인기를 타기 시작했다. 요즘말로 순위 역주행!
그때 기분을 지금도 잊지를 못해요.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절로 떠오릅디다. 애당초 부를 생각이 없었던 곡인데 작곡가가 술에 취해서 하기 싫은 걸 할 수 없이 불렀고, 다행히 다른 노래가 인기를 끌다가 금지곡이 되어버렸고, 어머지가 이 노래 좋다고 해서 방송국에 부탁할 때도 이게 터질 거란 생각은 한 번도 안했어요. 근데 그해 우리나라 가요를 통틀어서 최고 히트곡이 바로 ‘울려고 내가 왔나’였어요.
『오빠, 남진』 中
또 금지곡 지정.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대중들에게 가수 ‘남진’이라는 이름을 깊이 새겼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가수 남진의 음악인생은, 굴곡진 우리나라 현대사와 궤를 같이한다.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는 대중음악사 지식은 해방이전 근대사에 한했다. 하지만 이 책 『오빠 남진』 덕분에 그 범위가 넓어졌다. 더해서 엄마들이 왜 가수 ‘남진’에 열광하는 지까지!
이 책은 고스란히 우리 엄마님께 상납하고 효도하는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