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박종인 기자님의 『땅의역사 7권』이 나왔다. 나름 기자님 스토커(ㅋㅋ)라 ‘땅의 역사’ 신문 연재는 진즉에 끝나고, ‘흔적’이라는 새 주제로 다시 연재하는거 보면서, 역사책 『땅의 역사』도 완결인가 싶어서 괜시리 걱정했는데! 신간이 나와부렸다♡ 오얘예옝예ㅖ예
땅의 역사 7권은 기존에 조선일보에서 연재하셨던 ‘땅의 역사’ 와 현재 연재중인 ‘흔적’에 있는 내용이 섞여 있는거 보니, 앞으로도 역사책 ‘땅의 역사’ 시리즈는 계속 될 것 같은 너낌적인 너낌이다. 암만! 내 답사여행에 시작이 된 책인데, 저얼대 끝나면 안되지!! 지금은 육아로 인해 잠시 멈춘 답사여행이지만, 뿡뿡이가 크면 다시 답사여행을 다녀야하니! 그런 의미에서 기자님께서 계속 쭈욱 답사를 해주셨으면!
이번 땅의 역사 7권도 어김없이 의도적으로 ‘삭제’되거나, ‘왜곡’된 역사 속 진실을 찾아가는 기록이다. 정부 주도하에 의도적으로 삭제된 역사, 피해의식으로 인해 왜곡된 역사,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아서 사라진 역사 그 모든 것들이 주인공이다.
예컨데 지금 핫한 관광지가 된 경복궁 본연의 역사라던가, 친일파 춘원 이광수가 쓴 소설 『단종애사』로 인해 숙주나물로 왜곡된 신숙주의 일생이라던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 세금 수송 마차를 탈취했던 잊혀진 독립운동가 박상진의 일생이라던가, 정약용과 박제가 등이 인두법을 발견하고 임상까지 하여, 정조의 사상통제만 아니었다면 지석영 우두법보다 빨리 천연두를 몰아낼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의 역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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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0년전 매향리 마을에 간적이 있다. 매향리 마을이 어떤 곳인지 알고 간게 아니라, 제암리 유적지를 가는 길에 우연히 본 ‘매향리정보화마을’이라는 표지판이 신기해서 들렀던 곳이다. 우연히 들렀던 그 곳에서 나는 눈물흘리고 말았다.
경기도 화성 매향리 마을. 불과 가까운 과거에는 섬이었으나,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미군이 폭격훈련장으로 사용하면서 섬이 아닌 곳이 되어버렸다. 1951년부터 연간 250일간 폭격 훈련이 있었다. 사격횟수도 1일 600회가 넘었다. 미공군 전투기는 하루에도 수백번 매향리 마을 상공을 돌며 기총사격과 폭탄을 투하했다. 그렇게 숲이 우거졌던 농섬은 밑둥만 남았다.
남양만 남쪽 매향리 앞바다의 농섬은 또 다른 이유로 사라졌다. 매향리와 궁평항을 잇는 화옹방조제로 남양만은 화성호로 변했다. 숲이 우거졌다는 뜻으로 ‘짙을 농濃’자를 쓴 농섬은, 방조제 바깥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정확하게는 밑동만 남았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한 미 공군은 이곳 매향리를 폭격 훈련장으로 사용했다. 훈련장 이름은 쿠니 사격장 이다. 토착주민은 물론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까지, 조개와 굴을 주우며 살던 사람들에게 희생이 강요됐다. p 049
“아기를 낳을 여자들에게는 신생아 귀를 막을 탈지면을 선물했다. 오일장이 서면 사람들은 괘종시계를 들고 장터에 갔다. 벽에 건 시계들이 다 떨어져 고장이 나서”
주민들은 난폭해졌고, 강력범죄와 자살이 잇달았다. 오폭과 불발탄 사고로 많은 이가 죽었다. 2000년 미군 전투기가 추락하고 한미군사협정 개정이 이슈가 되면서 대한민국 사회는 매향리 문제를 ‘생존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2005년 마침대 쿠니 사격장은 폐쇄됐다. p 051
매향리에서 봤던 폭탄 잔존물로 만든 조형미술과 벽화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폭탄 잔여물 위에서 여자아이가 꽃에 물을 주고 있던 벽화. 폭탄 파편에 맞아 죽은 사람중에는 임산부와 뱃속 아기도 있었다고 했다. 벽화속 꽃이 꼭 별이 되어버린 아기인 것 같아서 그 앞에서 유독 눈물을 흘렸었다.
한국전쟁은 진작에 끝났고, 독재정권도 끝났고, 국민이 1인 1표를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시대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매향리는 더 오랫동안 지옥에서 살았다. 왜? 미군이 사용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이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한다고 생각했기에, 따라서 매향리의 문제를 국민들이 알면 안되었고, 당연히 매향리 문제는 묵살되어야 했기에.
그렇게 오폭사고와 불발탄 폭발 등으로 사망자와 중상자가 끈임없이 나왔던 매향리. 폭발로 인한 주거지, 어장 파괴, 소음성 난청등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던 매향리. 매향리는 2005년이 되어서야 그 지옥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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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시흥 오이도와 화성 대부도 사이를 가로막는 방조제 공사는 1994년에 끝이 났다. 공업단지 부지와 농경지를 확보하겠다는 계획은 엉터리임이 공사 도중에 드러났다. 물이 나갈 길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헛되고 기이한 공사였다. 막힌 하천 물은 썩었고 갯벌도 썩었고 땅도 썩어 버렸다. 그 꼬락서니를 이제 일흔을 눈앞에 둔 당시 젊은 사내 최종인이 보았다. 누구는 그를 개발 방해자라 불렀고 누구는 그를 시화호 지킴이라 불렀다. p 052
2n년간 시흥에 산, 지금도 시흥에 살고 있는 시흥시민으로서 ‘시화호’ 이야기를 그냥 넘기면 섭하다. 시화호는 한 때 ‘죽음의 호수’라 불렸다. 하지만 지금은 천연기념물까지 찾는 생명의 호수다.
1980년대 중동 건설 붐이 끝나면서, 수많은 중장비와 인력이 남아돌게 된다. 그렇게 남아도는 중장비와 인력을 꾸려 거대한 간척 사업을 시작했으니, 그게 바로 바다를 막아버리는 시화호 간척사업이다. 졸속으로 진행된 간척사업은 실패했다. 시화 방조제는 건설되었지만, 그 안에 가로막힌 바닷물은 썩어들어갔다. 검은호수, 죽음의 호수가 되었다. 그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는 호수였다. 전문가들은 시화호가 살아나는데 30년은 더 걸린다고 이야기했다.
이 공사 기간 동안 한 사내가 끊임없이 공사를 방해했다. 그는 시화호가 죽어가는 과정을 꼼꼼히 기록했고, 언론에 알렸다. 끊임없이 정부를 귀찮게 했다. 결국 그 사내말대로 가로막혀있던 물을 통하게 했다. 딱 10년이다. 10년만에 시화호는 생명의 호수가 되었다. 저어새, 밭종다리, 홍여새, 재두루미 등 천연기념물들이 찾는 공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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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페르트 도굴 사건을 알고 있다. 독일 상인이 흥선대원군 부친인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이와 함께 자연스레 따라오는 이야기가 있으니, 바로 남연군묘 이장에 관한 이야기다. 이 땅에 가야사라는 대찰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 부친의 묘를 쓰면 2대가 왕이 된다는 지관의 말에 흥선대원군이 냅다 절을 밀어버리고 자신 부친의 묘를 썼다는 이야기.
역사적 사실이라 알려진 남연군묘 이장에 관한 이야기, 놀랍게도 이 이야기 속에는 거짓이 교묘하게 섞여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남연군묘 앞에 버젓이 진실이 기록된 비석이 서있다는 사실이다.
대원군이 부순 절은 가야사가 아니라 묘암사다. 그리고 석탑 또한 전설 속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탑이다. 하나 더 있다. 대개 남연군묘, 즉 대원군이 세운 선친 묘가 이장된 해를 ‘고종이 왕이 되기 13년 전’인 1850년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남연군묘 입구에 있는 비석에는 역사적 진실이 기록돼 있다.
‘처음 마전 백자동에 장사 지냈다가 바로 연천 남송정에 이장하고 을사년에 덕산 가야산 북쪽 기슭에 이장했다가 병오 3월 18일 드디어 중록 건좌한 언덕에 면례하였다.’
이미 대원군은 선친을 한 차례 이장한 뒤 을사년(1845년)에 가야산 북쪽으로 이장하고, 이듬해에는 지금 자리에 묘를 썼다는 뜻이다. 을사년에 첫 이장을 한 자리를 주민들은 ‘구광터(옛 무덤자리)’라고 부른다. 남연군 묘에서 400미터 북동쪽 산기슭 밭이다. 왜 처음부터 석탑 자리에 옮기지 않았을까? 이기웅이 말했다.
“묘암사 주변 주민들과 땅 문제를 협상하는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다 마지막 남은 절을 불태웠고.”
이장 시기와 토박이 역사가 분석을 들어보니 ‘만세 권력을 누린다는 지관 말에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털어서 급히 가야사라는 대찰을 불태우고 주민을 내쫓았다’는 대중매체의 보도와 공식 안내문은 수정돼야 마땅하다. p 082
현재 남연군묘가 있는 자리는 옛 가야사가 있던 절터라고 알려져있다. 분명 이는 사실이다. 헌데 흥선대원군이 가야사를 때려부수고, 남연군묘를 이장했다는 건 일부 거짓이다.
주자학의 나라 조선. 양반네들은 사찰과 승려를 천시했다. 하지만 예외가 있었다. 바로 왕실사찰이다. 왕실의 원찰로 지정된 사찰은 막대한 권력을 누렸다. 보통 태실이나 왕릉을 조성했을 때 이를 수호하는 사찰이 지정되는데, 이런 사찰들이 바로 원찰이다. 원찰은 뒷배가 무려 왕실이기에, 양반네들이 함부러 할 수 없었다. 외려 원찰 소속 승려들이 양반네들을 상대로 떵떵거리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원찰에 지정된 사찰 중 하나가 바로 예산 가야사다. 가야사는 광해군이 왕이었을 때, 세자 이지의 원찰이었다. 세자 이지 태실은 황해도 신계군이 있었으니, 태실 수호사찰은 아닐테고. 세자 이지를 지지하기 위한 원찰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여튼! 원찰이 된 가야사는 거대해졌다. 그러다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광해군이 폐위되었고, 당연히 세자도 폐위되었다. 폐세자 원찰이었던 가야사는 몰락했다. 당시에 이미 가야사는 텅 비어있었고, 가야사의 말사였던 묘암사만 남아있던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흥선대원군이 가야산 북쪽에 남연군 묘를 이장하고, 일정 기간 뒤에 남아있는 묘암사를 철거 한 뒤 현재 자리에 남연군묘를 이장했다. 고로 우리가 알고 있는 남연군 묘 이장 스토리는 진실과 거짓이 교묘하게 섞인 왜곡된 이야기라는 것. 하지만 왜 바로잡지 않는건지는 당최 모르겠다.
흥선대원군이 ‘무자비하게 사찰을 부시고 부친 묘를 이장하여, 아들을 왕으로 만들었다’라는 풍수지리 중요성에 힘을 실어주고 싶은건지, 아니면 흥선대원군이 ‘무자비하게 사찰을 부시는 바람에, 왕이 된 아들이 나라를 말아먹었다’라는 이야기에 힘을 실어주고 싶은건지, 아니면 이도저도 아니고 그냥 될대로 되라- 싶은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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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4년 추석, 산청에 살던 선비가 고택을 찾아왔다. 고택에는 정온의 증손자 정중원이 살고 있었다. 선비의 이름은 유이태다. 그는 한양에서 임금 숙종의 병을 치료하고 내려오던 길이었다. 유이태는 선비의사다. 유의라 한다. 유학자이면서 동양적 의학 이치에 통달한 선비다. 두창(천연두)과 마진(홍역) 치료에 능했다. 거창에서 태어나 남쪽 산청에서 살았는데, 워낙 의술이 뛰어나 영남과 호남 일대에 숱한 전설과 설화를 남겼다. p 195
명의, 산청, 전설.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맞다. 과연 자기 몸을 해부용으로 내놓은, 의성 허준의 스승 유의태가 아닌가. 산청에는 유의태를 기리는 테마파크 동의보감촌이 있고 그에 관한 전설이 남아있다. 결론부터. 여의태는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는, 소설 『동의보감』과 드라마 <집념> 속 인물이다. 거창에서 태어나 산청에서 활동하고 임금 숙종의 병을 고치고 의술을 베푼 의사는 유의태가 아니라 유이태다. 동계 고택에서 주인장과 대작하고 죽은 해가 1715년이니, 허준(1530~1615)보다 100년 뒤 사람이다. p 196
민관이 합작하여 만들어낸 역사왜곡, 허준 스승 유의태. 이 인물은 명확한 ‘허구’다. 민관은 유의태라는 허구 인물을 실제로 만들기 위해, 실제 역사속 인물 유이태를 꽁꽁 감추었다. 실존 인물 유이태의 흔적은, 허구 인물 유의태의 흔적으로 바꿔치기 했다.
여기서 말하는 민관은 이들이다. 『한국인물사』에 허준 스승 유의태를 소개한 한의사 노정우,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소설 『동의보감』을 집필한 소설가, 이를 드라마로 만든 방송사, 이 인기에 편승하기 위해 동의보감촌을 만들고 광고한 산청군. 이들 연합작전으로 인해 산청에서 실재 활동했고, 산청에 무덤까지 있는 선비 의사 유이태는 사라졌다. 대신 유이태의 모든 흔적을 가로챈 소설 속 인물 유의태가 나타났다. 그 누구도 이 거짓을 바로잡지 않았다. 실존 인물 유이태 후손이 나와 논문까지 써가며 반박하기 전까지.
허구 인물 유의태의 흔적이라던, 유적지라던 공간은 하나둘 철거되었지만 아직 완벽하지 않다. 산청군은 아직도 허구인물 유의태를 내세우고 있으니 말이다.
무원칙의 원칙을 모아 보니 온통 대한제국이고 고종이다. 이로써 대한민국 국민은 ‘간악한 일제가 담장을 철거한’ 탁 트인 경회루 경치를 감상한뒤, ‘총독부 박물관’ 건물에 상주한 경복궁 관리소 관할 경복궁을 떠나, 촬영 세트장으로 변한 덕수궁 월대를 넘어서 ‘순종 황제가 즉위한 장소임을 절대로 알리면 안되는’ 덕수궁관리소가 상주한 3층짜리 신축 건물에서 끝나는 테마공원 조선 궁궐을 소유하게 되었다. p 212
위 유의태 이야기는 지방정부가 주도한 왜곡이라면, 이번엔 중앙정부다. 무려 문화재 당국이 주도한 결과다.
문화재청은 경복궁 복원 기준 연도를 1888년으로 설정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 이후를 기준으로 했다. 2023년에 복원된 경복궁 앞 광화문 월대. 월대가 설치되었던 해는 1866년이다. 그러다 1917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 세워진지 고작 100년도 안된 월대였지만, 복원 기준 연도 안에 포함된다. 문화재청은 원칙대로 1888년에 그 자리에 있었을 월대를 복원했다.
1888년 경복궁 경복궁 경회루에는 사방에 담장이 있었다. 그러다 일제 시대에 담장이 철거되었다. 현재 복원된 경회루는 딱 두 곳에만 담장이 있다. 관람객 편의를 위해서! 일제가 담장을 철거한 이유를 그대로 답습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경복궁 동쪽에 숨어있는 경복궁 관리소 사무실. 이 건물은 일제시대에 지어진 총독부 박물관이다. 당연히 문화재청이 설정한 복원 기준 연도 1888년에 없었다. 오롯이 일제가 만든, 강탈한 문화재 전시용 건물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멀쩡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 다음은 덕수궁 돈덕전.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순종이 즉위한 공간이다. 2층 건물이었던 돈덕전은 1920년에 철거되었다. 현재 복원된 돈덕전은 실제를 기반한 복원이 아니다. 사라진 돈덕전을 재현하기 위해 상상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건물이다. 심지어 지금 재현된 돈덕전은 3층 건물이다. 3층은 덕수궁 관리소다. 이 돈덕전 재현을 위해 600년간 그 자리에 있었던 회화나무 한 그루를 옮겨버렸다.
기함할 이야기 하나 더. 문화재청은 경복궁 영추문루 소문이 1926년 소실되었고, 지금까지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놀랍게도 영추문 소문은 100년간 쭉 경복궁 안에 있었다. 자경전 구역에 이전된채. 자경전은 위에서 말한, 총독부 박물관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복궁 관리소 지척에 있다.
이 모든 내용들은 역사 전문가나 문화재 당국이나 알 법한 내용이다. 따라서 이런 내용을 문화재 안내판이나, 역사 교과서 등을 통하여 일반인에게 알려야 한다. 나같은 일반인들이 역사적 지식을 습득하는 제일 쉬운 경로가 바로 문화재 안내판이나 역사 교과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국에서 맘 먹고 왜곡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왜곡된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만다.
그리하여 우리에겐 시화호 지킴이 최종인씨처럼, 유이태 후손 유철호씨처럼, 이 책을 쓴 박종인 기자님처럼 왜곡된 사실이 바로잡고자 하는, 외력에도 흔들림없고 끈질긴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들처럼 잘 알지 못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들을 지지하여 지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 뿐이니.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가려지고 왜곡되고 사라진 역사를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조그만 기대를 가져본다.